성 요셉께 드리는 편지(성 요셉 성월)

※ 온 교회는 성 요셉 성월인 3월을 맞아 요셉 성인를 기리며 전구를 청한다. 다음 글은 ‘돈 토니노’로 더 잘 알려진 안토니오 벨로Antonio Bello(1935~1993년) 주교님이 1990년 3월에 쓴 편지글이다. 주교님은 이탈리아 풀리아 지역의 주교이자 ‘섬기는 교회’를 건설하는 데 헌신한 참된 사목자였다. 또한 뛰어난 화술가요 지칠 줄 모르는 평화 수호자로서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i 운동’의 책임자로도 활동했으며 가난한 사람과 이주민 등 힘없는 이들의 대변자로 살았다. 이 편지글은 L.M. 에피코크 지음, 성 염 옮김, <아버지 성 요셉>, 바오로딸, 2021년, 119-149쪽에서 옮겨왔다.(*이미지-구글)

***

사랑하올 성 요셉님,

당신이 반겨주시니 이곳, 당신의 목공소에서 한 30분만 머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게 해주십시오.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습니다. 보아하니 일거리가 잔뜩 쌓여있고 시간에 쫓기고 계신다는 것도 알겠습니다. 그러니 하시던 대로 계속 나무에 대패질을 하셔도 됩니다. 그동안 저는 송진 향이 풍기는 톱밥 더미 사이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아 제 속 얘기를 좀 털어놓고 싶습니다. 대꾸는 안 하셔도 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워낙 말수가 적다는 걸 이미 알고 있습니다. 동방의 밤처럼 깊은 당신의 생각은 말보다 행동으로 드러난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장인匠人이 운영하는 가게들은 한때 우리 서민들의 평일 집결지였습니다. 그곳에선 못 할 이야기가 없었지요. 일, 연애, 계절, 삶과 죽음 등 마을의 온갖 사연이 화제에 오르거나 ‘공식적으로 널리 알려지곤 했습니다. 최신 뉴스랍시고 악의 없는 잡담을 꾸며내어 단골들에게 순식간에 퍼뜨리는 이들도 있었지요.

그때는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서 15분 간격으로 들려오던 동네 교회 종소리마저도 마치 영원처럼 여겨졌지요. 어쩌면 영원을 떠올리게 하던 그 아련한 희망이 바로 장인의 작업을 소중한 무엇으로 만들어 주었고, 삶의 고단함 가운데서도 종일 묵묵히 공을 들였던 작품에 생기를 불어넣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자든 쟁기날이든 그 진짜 재료는 목재나 철재라기보다 바로 ‘시간’이 아닐까 싶네요. 그 안에 대장장이나 목수의 노고가 고스란히 깃들게 되니까요. 그들은 작품 안에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간, 곧 그들 목숨의 일부도 꼭꼭 눌러 담았던 셈입니다. 육체 안에 영혼이 존재하듯, 그들이 혼신의 힘을 다한 시간도 그들이 만든 작품 속에 서서히 스며들어 생명력을 불어넣었습니다. 그처럼 서서히 그리고 많은 노고에 힘입어 탄생한 작품들이었기에 그토록 비길데 없는 고유한 모습을 지닐 수가 있었던 것이겠지요. 한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도 열 달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는 장인이 운영하는 가게는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대신 소비형 대규모 상점이 많이 생겼지요.

더 이상 뭔가를 제대로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원본’만 하나 만들어서 순식간에 그 복제품을 마구 찍어내지요. 아무 공도 들이지 않고 그저 철저한 계산 하에 그렇게 합니다. 수고를 덜하고 싶으니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진열대에 놓여진 우아한 듯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물건들, 짧디짧은 유통기한을 가진 것들, 예쁘기는 하지만 영혼이 없는 물건들, 완벽해 보이지만 실은 정체가 모호한 것들, 반짝거리지만 흐릿한 것들.… 그것들은 결코 말을 건네오지 않습니다. 사랑의 열매가 아니니까요. 생명의 기운도 없습니다. 그 안에 시간의 숨결이 깃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요셉님! 공들인 시간이 빠져있는 물건은 모두 그처럼 냉랭할 뿐입니다.

저기 좀 보십시오. 반쯤 열린 문 너머로 마리아가 아주 고운 천에다 수를 놓고 있군요. 솔기가 없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통으로 짜 내려간 천이네요. 아마도 예수님의 옷인가 봅니다. 태어나면 입을 옷이 아니라 어른이 되면 입을 옷 같습니다. 아직 아기가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저렇게 준비하고 있군요.

저야 물론 옷 만드는 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 마리아가 지금 수놓고 있는 저 아라베스크 문양이 구체적으로 어떤 자수 기법인지 잘 모릅니다. 어쩌면 십자수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겠습니다. 훗날 당신 아드님이 저 옷을 입었을 때, 어깨를 따스하게 감싸는 어머니의 섬세한 손길을 느낄 것입니다.

가엾은 마리아는 아들에게 자기 목숨을 통째로 내주고 싶겠지요. 하지만 그럴 수가 없기에 목숨의 한 부분이라도 떼어주고 싶은 겁니다. 당장 지금부터 바로 저 옷을 보물상자 삼아 그 속에 목숨의 일부인 시간을 쏟아 넣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훗날 골고타 언덕에서 아드님을 십자가에 매달 군사들마저도 그 옷을 차마 찢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자수마저도 대량으로 찍어냅니다. 수를 정확하게 놓는 기계도 발명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고향인 어느 가게에서 ‘아시시 자수’라는 문구가 수놓아진 베개를 하나 구입해서, 그날 밤 그 베개를 베고 누워 클라라 성녀만큼 아름다운 어느 여인이 수놓은 베개일 거라고, 그 여인이 공들인 시간이 담긴 베개일 거라는 우스운 착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 시대의 가장 심각한 불경죄일지도 모릅니다. 시간의 숨결을 아예 배제하는 행위니까요. 사랑의 시간, 상상의 시간, 예술의 시간을 외면하는 것이죠. 탁자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저 목재만 있으면 된다고 믿는 겁니다.

목재를 마련하려면 나무가 필요하고, 나무를 키우려면 일단 씨앗을 뿌려야 한다는 것 그리고 씨앗을 얻으려면 먼저 꽃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까지는 수긍하면서도, ‘탁자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꽃 한 송이가 필요하다’라는 결론을 내릴 용기는 차마 내지 못하는 것이죠. 그런 말은 시인들이나 하는 거라고 치부해 버립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남은 장인의 가게들은 그저 약간의 향수를 자아내는 곳일 뿐입니다. 더 이상 뭔가를 만들어 내지도 않을뿐더러 그곳에서 뭔가를 수선하거나 수리하는 경우도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요셉님! 제가 당신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이 몇 분 동안에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어린애 하나가 팽이를 들고 와서 심을 고쳐 박아달라고 했고, 노파 하나가 의자를 들고 와서 짚방석을 다시 깔아달라고 했으며, 한 농부는 금이 간 함지를 가져와서 손봐달라고 했고, 바퀴살이 닳아서 망가진 바퀴를 가지고 와서 수리를 부탁했던 마부도 한 사람 있었지요.

이제는 그런 것들을 더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쓰던 물건에 조금만 흠이 생기거나 기능에 이상이 있으면 손보려고 하기보다 그냥 한쪽으로 치워버립니다. 속에 사랑이 깃들어 있지 않다면, 이미 죽은 몸으로 태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것에 생명을 다시 부여하려 애쓸 필요도 없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일컬어 ‘쓰고 버리는 문화’라고 합니다. 거실에 놓아둔 텔레비전의 퓨즈가 끊어졌다고요? 걱정할 것 없습니다. 그건 한쪽에 밀어놓고 더 좋은 사양을 가진 텔레비전을 구입해서 설치하면 됩니다. 갖고 놀던 인형이 갑자기 졸도라도 한 것처럼 작동을 멈춘 걸 보아하니 속에 든 건전지가 다 된 것 같다고요? 바로 쓰레기통에 버리고 새 걸로 하나 더 사면 되죠. 출생증명서처럼 각종 보증서를 붙여 파는 인형, 결혼하는 인형, 데이트하는 인형, 여름 휴가 복장을 한 인형 등 종류가 넘쳐나니까요. 사내아이가 성탄 선물로 받은 장난감 총의 방아쇠 나사 하나가 빠졌다고요? 빨리 해결해야죠. 설날 선물로 총알이 촘촘하게 장전된 탄창이 두 줄이나 붙은 기관총이 아이 앞에 척 대령할 것입니다. 근데 그 총이 금세 말썽을 일으킨다고요? 그렇다면 주님 공현 대축일 선물로, 공격 목표물을 정확히 조준하는 기능에다가 미사일 발사 장치까지 장착된 잠수함을 사달라고 해야죠. 벨벳 양복의 단추가 떨어졌다고요? 외투 안감의 올이 풀렸다고요? 레이스 달린 속옷 고무줄이 늘어났다고요? 샌들 한 짝의 버클이 떨어져 덜렁거린다고요? 그런 것들을 수선하려고 돈을 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괜히 망설이지 말고 당장 갖다 버리시죠. 아니, 잠깐! 며칠 후에 본당의 카리타스 단체 사람들이 다녀갈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해서 귀찮은 물건들로 넘쳐나는 옷장도 비우고, 일석이조로 남을 돕기도 하면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죠 뭐. 가난한 사람들은 늘 우리 곁에 있으리라(요한 12,8 참조)고 말씀하신 분도 주님이시니까. 이렇게 우리가 미리 수를 쓰고 있으니 훗날 주님께서 우리에게 천국의 한 모퉁이라도 차지하게 해주실지도 모르죠. 우리로서는 남아도는 것을 이렇게 처리할 수 있으니 좋고요.

그런데 요셉님, 무슨 일이신지요? 지금까지 제가 하는 말을 들으며 묵묵히 일만 하던 당신이 망치를 허공에 든 채 슬픔과 고통에 찬 눈길로 저를 응시하고 계시는군요.

알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으신 거죠. “가엾은 사람들! ‘쓰고 버리는’ 것도 모자라 도를 넘는 일을 일삼으며 심지어 ‘버릴 것을 베푸는’ 지경에 이르렀구려. 그대들의 소유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선의 가장 내밀한 본질까지도 왜곡시켜 버리다니….”

맞는 말입니다, 나자렛의 목수님! 저희는 어느새 탐욕의 악취가 나는 폐수를 맑은 물로 만들겠노라고 큰소리치는 파렴치한 수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저희는 저희 이기심의 찌꺼기까지도 상품처럼 거래하고 있습니다. 저희의 이익을 채우고 남은 것은 공동의 이익을 위한다는 거짓 명목을 내세우기도 합니다. 거저 베푸는 척 추악한 가면으로 위장한채, 오랫동안 겪어온 사랑의 결핍 상태를 드디어 벗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착각합니다.

사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아직도 많은데, 당신이 들고 있는 그 망치가 두려워서 주저하고 있습니다. 제가 만일 텔레비전 방송에서 소위 박애주의를 표방하며 여기저기에서 후원받아 내보내는 각종 프로그램에 관해 이야기한다면, 당신처럼 성품이 온화한 사람도 분명히 견디기 힘들어할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말도 안 되는 그런 수치스러운 오락성 행사들에 맞서 들고 일어나야 마땅할 터인데, 정작 사람들은 저 거대한 어리석음의 바닷속으로 대책 없이 함께 침몰하는 중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질곡 많은 이 시대에 장인이 운영하는 가게가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까닭은, 무엇인가를 더는 만들어 내지 않아서일 뿐 아니라 더 이상 수선이나 수리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을 들이고 소중하게 매만지는 시간을 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설명을 드리죠. 보세요, 요셉님! 제가 이곳에 들어왔을 때부터 당신은 대패로 목재를 다듬는 데 얼마나 많은 정성을 들였는지 모릅니다. 대패질을 할 때마다 매번 당신은 대패가 지나간 곳을 곧장 손으로 매만졌습니다. 마치 물결 위에서 반짝이는 불빛처럼 부드럽게 쓰다듬더군요. 속살이 드러난 나무의 부끄러움을 가려주려는 것 같기도 하고, 나무에 가한 폭력으로 생긴 상처를 자상한 손길로 다독여 주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지금 제가 말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당신은 끌로 다듬은 나무의 모서리를 계속해서 손가락으로 쓸어내리고 있군요. 모서리의 거친 부분을 매만지는 당신의 손길은 갓 태어난 새끼 양을 혀로 핥는 어미 양의 모습과도 닮았습니다. 당신은 이제 그동안 못질로 생겨난 나무의 생채기 위에 아라비아산 기름을 바르거나 회반죽으로 흉터를 메우고 있군요. 게다가 목재의 재질을 강화하기 위해 발라준 천연 오일의 향내가 진동합니다. 군데군데 아교칠까지 하며 잘 손질한 너도밤나무 판자들이 마치 거울처럼 반들반들해졌습니다. 손바닥으로, 붓으로, 주걱으로 그리고 눈길로까지 그것을 쓰다듬었으니 당신은 참으로 지극한 정성을 쏟아붓는군요. 조금 전에 요람 하나를 완성한 당신은 눈길로 그 요람을 계속 흔들면서도 좀처럼 지치지 않는 기색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더 이상 정성을 들이지 않습니다. 그저 소비할 뿐입니다. 아니 욕심만 낼 뿐입니다. 손은 더 이상 뭔가를 주는 법도 모르고 그저 움켜잡기만 하는 갈고리가 되었지요. 사심 없이 누군가를 끌어안던 두 팔은 무엇이든 가차 없이 찍어대는 새의 부리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자비의 눈물이 말라버렸고 보다 드높은 곳을 관상할 능력을 잃어버렸으며 시선은 그저 탐욕으로 번득입니다. ‘쓰고 버리는’ 차가운 논리가 만연한 가운데, 이윤이 얼마나 남을지에 따라 모든 것을 판단하고 저희의 일상도 대부분 그 기준에 따라 좌우되곤 합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이 함부로 다루어집니다.

명확하던 본질은 갈수록 모호해져 그저 허상만 초라하게 남아있는 듯한 현상이 단지 우리 주변의 사물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뭔가 생산해 내는 사람만이 가치 있게 평가됩니다. 더는 뭔가를 제공할 수 없는 사람은 도태됩니다. 물론 그럴 때도 소위 정의를 내세우며 온갖 핑계를 갖다 붙이지요. 예를 들면, 버림받은 아내를 위한 부양비, 기숙사에 보내버린 아들에게 매달 보내는 경비, 부모님을 맡겨둔 요양원에 보내는 비용 등. 힘없는 이들은 탐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당한 후 사람들에게 전혀 관심을 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인간의 몸은 사고파는 상품으로 전락하고 소비성 제품을 위한 광고판 또는 마네킹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관계의 뿌리까지 잠식한 상업주의는 친교를 허물고 공동체를 파괴하며 가정을 우습게 여깁니다. 마케팅 전략에 따라 여성을 상품화하고, 성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비인격화하여 권력욕에 좌우되는 무엇으로 깎아내리고….

어느덧 날이 저물어 갑니다. 해가 기울면서 갈릴래아 산악지대의 봉우리들이 진홍빛으로 물드는군요. 그러고 보니 제가 당신을 찾아온 진짜 이유를 아직도 말씀드리지 않았네요. 마치 이 시대의 부정적인 모습들을 꿰뚫고 있다는 듯 탄식을 늘어놓으면서 당신을 귀찮게 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이 시대의 위태로운 상황을 외면하려는 마음도 아닙니다. 저는 그저 당신의 목공소가 마치 오아시스처럼 느껴졌고, 벽에 나란히 걸려있는 쇠집게, 줄, 톱 등의 연장들 사이에 잠시 제 마음도 함께 걸어놓고 싶을 뿐입니다. 혹시 제가 당신께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인상을 드렸더라도, 저를 그저 내성적인 사람이나 어떤 겁에 질린 피해자로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런 판단은 요즘 한창 유행하는 심리분석가들의 의견들만으로도 이미 족합니다. 그들 앞에서는 저희가 품는 감정 자체를 부정해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더군요. 마치 목재를 끼워 움직이지 않게 고정하는 저 기구처럼, 그들이 내세우는 무자비한 논리에 꼼짝없이 사로잡혀 휘둘리고 싶지 않다면 말입니다.

사랑하올 성 요셉님, 제가 여기 온 것은 무엇보다도 당신을 더 잘 알고 싶어서입니다. 마리아의 배필로, 예수님의 아버지로, 그리고 평생을 헌신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어떻게 사셨는지 궁금했습니다. 한 동정녀의 배필로서 구체적으로 아내와 어떤 모습으로 소통하며 사셨는지,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 아드님을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보살피셨는지, 집 안팎 구석구석을 책임지고 돌보던 방식은 어떠했는지 저는 늘 궁금했습니다. 또한 이제는 당신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데서 그치지 않고, 당신이 보여준 그 고귀한 삶의 모습을, ‘쓰고 버리는’ 일에 익숙해진 저희가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닮을 수 있을지 알고 싶습니다.

말씀해 주세요, 요셉님! 당신이 마리아를 처음 만난 때가 언제였나요? 아마도 어느 봄날 아침, 그녀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손은 꽃대처럼 가느다란 허리에 올린 채 마을 우물에서 돌아오던 길이었나요? 아니면 어느 안식일에 회당 지붕 밑 한구석에서 나자렛 처녀들과 속닥이고 있던가요? 그것도 아니면 어느 여름 한낮 밀밭에서 가난의 부끄러움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 다소곳이 눈을 내리깔고서 말없이 밀이삭을 줍고 있던가요?

당신과 그녀의 눈길이 처음으로 마주쳤을 때, 그녀가 당신에게 보낸 미소 한 자락은 마치 당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것 같았겠지요. 당신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그건 어쩌면 하나의 축복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날 밤 당신은 행복에 겨워 눈물로 베개를 적시지 않았던가요?

그녀가 당신한테 사랑의 편지를 쓰곤 했나요? 아마도 그랬을 것 같습니다. 일에 열중하던 당신이 가끔 각종 염료와 도료를 보관해 둔 수납장을 향해 미소 담긴 눈길을 보내는 걸 보니 짐작이 갑니다. 그 장 안에는 거의 열어보지 않는 빈 단지들도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에 당신은 어쩌면 그녀의 편지들을, 그녀와의 추억들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겠지요.

어느 날 밤 드디어 당신은 용기를 내어, 두 손을 불끈 쥐고 그녀의 방 창문 아래로 갔습니다. 바람에 실려온 박하향이 그윽하던 그곳에서 아가서의 몇 구절을 가만히 읊조렸습니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주오. 자, 이제 겨울은 지나고 장마는 걷혔다오. 땅에는 꽃이 모습을 드러내고 노래의 계절이 다가왔다오. 우리 땅에서는 멧비둘기 소리가 들려온다오. 무화과나무는 이른 열매를 맺어가고 포도나무 꽃송이들은 향기를 내뿜는다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와주오. 바위틈에 있는 나의 비둘기, 벼랑 속에 있는 나의비둘기여! 그대의 모습을 보게 해주오. 그대의 목소리를 듣게 해주오. 그대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그대의 모습은 어여쁘다오.”(아가 2,10-14)

그러자 그녀가 정말로 집 밖으로 나왔지요. 당신은 기뻐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다가온 그녀가 당신의 손을 잡았을 때 당신의 심장은 터질 듯이 두근거렸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하늘의 별들 아래서 그녀는 당신에게 커다란 비밀을 털어놓았습니다. 오로지 당신만이, 꿈을 자주 꾸는 당신만이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녀는 주님의 천사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오랫동안 감춰져 있었고 이제는 그녀의 태중에 자리 잡은 신비를 털어놓았습니다. 그것은 온 세상에서 가장 드높고 위대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당신에게 자기를 떠나달라고, 영원히 자기를 잊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때 당신은 처음으로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지요. “마리아, 당신과 함께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내가 원래 기대한 바를 기꺼이 단념하겠소. 대신 주님이 당신께 맡기셨다는 그 일을 함께 짊어지겠소.” 눈물이 글썽해진 그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당신은 용기를 내어 그녀의 배 위에 가만히 손을 대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탄생을 앞둔 교회에 당신이 베푼 첫 번째 축복이었습니다.

벽에 기대놓은 저 나무판자들 뒤에 행여 어떤 신학자나 라삐가 숨어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저를 회당으로 끌고 가서 고발할 좋은 구실을 찾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여하튼 저는 하느님의 계획에 순응하기로 결심한 마리아보다, 그녀와 함께하겠다는 일념으로 그런 결단을 내린 당신에게 더 큰 용기가 필요했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녀는 창조주의 전능하심에 모든 것을 의지했지만, 당신은 연약한 한 피조물에 모든 것을 걸었으니까요. 그녀는 굳건한 ‘믿음’을 드러냈고, 보다 큰 ‘희망’을 품었던 이는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사랑’이 당신과 그녀 안에서 나머지 모든 것을 이루었습니다.

요셉님, 이제는 화제를 좀 바꾸어 보겠습니다.

저기 좀 보세요. 빵집에서 일하는 여인이 여기로 들어오고 있네요. 당신에게 빵을 가져다주러 온 듯한데, 덕분에 목공소 안이 금방 빵 냄새로 가득 찼습니다. 때마침 이런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니 저는 참 운이 좋은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필요한 것을 제때에 보여주신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함께 나누는 일에 관해 우리가 얘기를 나누던 참이었는데, 바로 그러한 나눔의 가장 전형적인 표징인 빵이 등장하지 않습니까!

빵이란 먹히기 위해서라기보다 벗들, 가난한 사람들, 나그네들, 손님들과 나누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듯합니다. 식탁 위에서 쪼개지면서 그것을 함께 먹는 이들의 친교를 다져주니까요. 배낭 속 깊숙이 넣어둔 빵이 길 가는 사람과 화해를 이루어 주기도 합니다. 걸인에게 선심으로 건네진 빵은,그것이 금세 잊힌다 할지라도, 형제애를 체험하는 기회가 됩니다. 사정이 급해서 한밤중에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내어주는 빵은 배 속의 허기뿐 아니라 영혼의 허기도 가라앉힙니다. 그것은 연대에 대한 허기니까요. 풀밭에 모인 오천명이 배불리 먹은 후에도 열두 광주리에 빵 부스러기가 가득 모아졌다는 기적 이야기는, 나누면 더 풍요로워진다는 진리를 깨우쳐 줍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요셉님! 빵은 당신이 마리아와 맺은 고귀한 인연을 가장 잘 드러내는 성사입니다. 그녀는 날마다 당신이 땀 흘리며 마련한 곡식으로 빵을 만듭니다.

나자렛의 목수님, 당신은 관대하면서도 인간의 논리를 뛰어넘는 정열적이면서도 무모해 보이는, 참으로 지혜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장 어리석은 일처럼 보이는 그런 나눔을 하라고 저희를 재촉하시는 듯합니다. 모쪼록 저희가 그 나눔을 제대로 깨닫게 해주십시오.

안타깝게도 해마다 수많은 이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이 세상에서, 친교의 상징이던 빵은 단죄의 상징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전쟁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에는 빵을 가진 이들과 못 가진 이들이 존재합니다. 탐욕스러운 이들이 빵을 독점하고 있기에 가난한 이들에게는 돌아갈 몫이 없습니다. 욕심 많은 이들의 부엌 찬장 속에서 곰팡이가 들어가는 빵은 있어도, 굶주린 이들을 기쁘게 해줄 빵은 없습니다. 소수의 사람이 움켜쥐고 있는 많은 빵은 없는 이들을 배불리는데 사용되지 않습니다. 강대국의 쓰레기통마다 차고 넘치는 빵이 약소국의 식탁에서는 자취를 찾아볼 수도 없습니다. 선진국의 화려한 만찬 석상에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먹는 빵이, 후진국의 모든 이에게는 그저 금지된 꿈입니다. 어쩌다 인심을 쓴답시고 생색을 내며 빵을 그저 ‘분배’하기도 합니다만, 정작 빵을 먹을 권리가 있는 이들에게 빵을 ‘되돌려’ 주지는 않습니다. 참회의 노래를 부르며 정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되돌려 주어야 할 빵인데 말입니다.

요셉님, 혹시 헤르몬산 만년설이 마법에 걸린 듯 갑자기 녹는다면, 거기서 흘러내린 물이 계곡들을 덮치고 티베리아스 호수가 바다처럼 변하며 요르단강이 제방을 무너뜨리고 범람하여 팔레스티나 전역의 가뭄이 영구히 해결되리라는 이야기를 들어보셨나요?

하느님 곁에는 요셉님처럼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성인들이 별로 없나 봅니다. 굶주리는 사람들이 더 이상 생겨나지 않도록, 소수가 독점한 부를 만년설처럼 녹아내리게 하여 이 세상 모든 곳에 빵이 넘쳐나도록 할 수는 없는 걸까요?

만일 그런 기적이 당신의 역량에 다소 버거운 일이라면, 이천 년 넘는 역사를 지닌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잘 보살피도록 적어도 설득하실 수는 없는지요? 교회가, 소유한 것을 그들과 나누는 일뿐 아니라 특히 소외된 이들과 연대하며 가난해질 수는 없는 것일까요?

오늘날 저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거룩한 교회의 수호자’인 당신의 손길을 간절히 체험하고 싶습니다. 버려진 이들, 소외된 이들, 유린당한 이들, 팔레스타인 사람들, 회교도들, 제3세계 사람들, 추방당한 이들, 착취당하는 이들, 감옥에 갇힌 이들, 가장 누추한 변두리에서 사는 이들의 교회… 바로 그런 교회의 수호자로 당신을 느끼고 싶습니다.

지금 당신이 제 말에 대꾸를 하시지 않는 건, 당신이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이라서라기보다 빵집 여인이 이곳에 늦게까지 머물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까 요람을 발견한 그녀가 거기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네요.

잠시 후 그녀는 몸을 굽혀 자기 겉옷을 땅바닥에 펼치더니 거기에 대패밥, 톱밥, 나무조각 등을 주워 담았습니다. 여인은 그것을 가져가서 저녁마다 빵 굽는 화덕에 불을 붙인다고 하지요. 그녀 덕분에 목공소 바닥이 말끔해집니다. 그녀는 목공소를 떠나면서 당신이 저녁에 먹을 수 있도록 옥수수빵 하나를 남겨두었군요.

요셉님, 그나저나 이제 우리 둘만 남았으니 당신의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습니다. 저 요람의 신비를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이신 건가요? 꿈의 사나이인 당신은 도대체 왜 자꾸만 저 나무 요람으로 눈길을 돌리시는 건지요? 가끔씩 숨을 죽인 채 마치 아기의 옹알이라도 듣겠다는 듯 그곳에 귀를 갖다 대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다윗 집안의 후손님, 너무 초조해 마시고 진정하시지요.곧 태어날 당신의 아기는 하느님입니다. ‘양털 뭉치 위에 내리는 이슬’(판관 6,37 참조)처럼 살며시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좀 더 기다려야 합니다. 요람도 주인을 기다려야 합니다. 설령 누군가 당신이 그토록 공들여 만든 저 요람이 영영 빈 채로 남아있으리라고 말한다 해도 언짢아하지 마십시오. 당신 아드님이 유랑 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집으로 돌아올 때쯤이면 그분에게 저 요람은 너무 작을 겁니다. 그 무렵이면 또 다른 어떤 나무(이번에는 당신이 손질할 나무는 아닐 겁니다)에, ‘숨이 멎어가는 당신 아드님’이자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몸이 매달려 흔들리게 되겠지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해도 당신은 별로 당황하시지 않는 것 같네요. 하느님의 지극히 순수한 그 ‘거저 베푸심’을 얼마나 깊이 체험하셨으면 그럴 수 있을까 싶습니다. 당신의 수고가 전혀 보상을 받지 못한다 해도, 당신 스스로도 누군가를 도와줬다는 보람조차 느끼지 못한다 해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법도 터득하셨겠지요.

당신이 공들여 만든 요람이든 여물통이든 당신한테는 크게 중요치 않을 겁니다. 당신은 감정적 보상이라도 받겠노라고 나설 사람도 아니고요. 당신은 그저 계속해서 단순하고 고요하게 소박한 선물을 기다리듯 그렇게 기다립니다. 누가 재촉해서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거저 주어지는 선물, 오로지 무한한 자비로 말미암은 선물, 바로 당신의 위대한 하느님을 기다립니다.

오 하늘이여, 비를 내려라. 구름이여, 거룩하신 분을 우리에게 보내라. 오 땅이여, 열려라. 구세주가 나게 하라.(이사 45,8 참조)

요셉님, 당신의 삶도 거저 주어진 선물이 되었습니다.

그토록 위대한 선물! 당신의 족보에 열거된 모든 아버지를 한데 모은다 해도, 당신이 온전한 자유로 선택한 ‘예수님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 영예를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토록 심오한 선물! 당신이 마리아의 동정을 지켜주면서도 그녀와 일치를 이루는 선물입니다. 이 세상의 신랑 신부가 사랑으로 온전히 하나되는 경지를 훌쩍 넘어 영원한 일치를 이루는 선물입니다.

그토록 기쁨에 찬 선물! 당신은 누구에게 얼마를 주었으니 얼마를 되받아야 한다는 식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기꺼이 그저 주기만 했습니다. 당신은 당신 몫으로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자만심 때문이 아닙니다. 사랑이 너무도 크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계산하지 않고 다 줍니다. 그동안 겪었던 고뇌의 순간들을 앞으로 보상받고자 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쉿! 요셉님, 조금 전 목공소 앞에 마차가 한 대 멈추어 섰습니다. 몹시 지쳐 보이는 한 남성이 들어오네요. 구석의 탁자 위에 조그만 포도주 부대를 올려놓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난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 전체를 가로질러 왔소.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즈불룬 땅에 도착해야 하오. 당신한테 주려고 포도주를 좀 가져왔지. 사해 부근의 유명한 엔 게디에서 난 포도로 담근 좋은 포도주요. 요셉, 마셔요. 당신 아내와 함께 내 건강을 위해 축배를 들어줘요. 당신 아들이 태어나길 기다리는 중이란 걸 알아요.”

아하, 오늘 저녁엔 주님께서 나에게 각별히 관대하신 듯합니다. 거저 베푸는 잔치를 떠올리게 하는 또 하나의 상징을 보여주시네요. 빵집 여인이 가져다준 빵, 그다음엔 마차꾼이 가져다준 포도주! 술은 사람의 맘을 흥겹게 하지요. 그런데 요셉님, 당신이 지금 항아리를 들고 물을 길으러 나서는 걸 보니 곧 목공소 문 닫을 채비를 하고 있는 것 같군요.

그렇다면 저는, 좀 짖궂은 생각이긴 하지만, 마침 당신이 잠시 자리를 비우신 틈을 타서 저 탁자에 놓인 포도주 부대를 좀 가볍게 해드리고 싶네요. 그러고 보니 세상에서 도저히 마음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제가 오늘 저녁 나자렛 목공소에 들르게 된 일이 정말 그저 우연이었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술이 ‘‘저 베풂과 축제의 상징’이라는 말을 꺼내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할 겁니다. 안타깝게도 술은 어느새 회피와 도피를 뜻하는 상징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약물 중독자라고 하면 알코올의존증 환자와 동급으로 간주되고, 열혈 팬이라고 하면 마치 부랑인처럼 취급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하지만 어쩌다가 술이, 삶이 버거워 포기해 버리려는 이들에게 매혹적인 우상으로 변질되고 말았을까요? 물론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저희가 ‘거저 베풂’에 취하는 법을 잃어버렸고, 그저 알코올에만 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세상은 그저 국제수지에만 관심이 있고, 투기와도 밀접하게 결탁되어 있으며, 이른바 ‘후진국’의 국민들이 떠안고 사는 빚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강대국은 약소국 주민들의 생명까지 위협하며 이윤의 극대화에 몰두합니다. 가난한 이들의 땅을 빼앗아 미사일 기지로 만들고, 무기 거래를 위해 그들을 착취하며, 참으로 필요한 새로운 국제 질서를 세우자는 호소에 귀를 틀어막은 세상…이런 세상에 무슨 흥겨움이 있겠습니까? 그냥 사는 거지요.모든 걸 그저 숙명이려니 하고 치부해 버립니다. 더는 경탄할 줄도 모르고 삶을 진지하게 마주하지도 않은 채 그냥 흘러가도록 놔둡니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 때는 마치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듯이 너무 쉽게 해버립니다. 그러고는 뭔가를 선택했다고 믿지만 실은 선택을 당한 셈입니다.

기쁨이 없어서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축제일을 늘이지만 진정한 축제는 없습니다. 참된 기쁨도 없이 그저 술에 취하고, 만남은 소란스러울 뿐이며, 인간관계는 퇴폐적으로 변질되기 일쑤입니다.

요셉님, 다행히도 우물에서 일찍 돌아오셨네요. 당신이 자리를 비운 그 잠시 동안 저는 마치 희망을 잃어버린 듯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가 하마터면 이곳에서 나가버릴 뻔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돌아온 지금은 엔 게디의 포도주, 저 탁자 위에 놓인 포도주가 파스카의 기쁨을 표현하듯 불그레한 색으로 변하면서 축제의 상징처럼 반짝거리네요. 그 마차꾼의 건강을 기원하면서 저 술을 마리아랑 같이 맛보십시오. 또한 곧 태어날 당신 아드님에게도 축복이 함께하기를 빕니다. 어느 날엔가 그는, 가난한 이들의 식탁에 포도주가 넘치게 할 것이고,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성사를 제정할 때도 포도주를 사용할 것입니다.

혹시 당신만 괜찮다면, 나한테도 그 술을 저기 보이는 작은 병에다가 조금만 나눠주십시오. 우리의 만남을 기념하는 뜻으로 가져가고 싶습니다.

기왕이면 당신이 방금 길어온 물도, 아직도 땅바닥에 뚝뚝 방울져 떨어지는 그 물도 좀 주십시오. 오염되지 않은 물이네요. 산성비, 공장에서 내보내는 폐수, 각종 화학물질이 함유된 물투성이인 세상에서 아직까지 깨끗하게 보호된 물이네요. 순수함과 생태계의 조화를 상징하는 물, 유익하고 소박하면서도 귀하고 맑은 그 물을 좀 주십시오. 왜냐하면 당신 아드님이 니산 달의 어느 날 밤, 배반당하시는 바로 그 밤에 그분 친구들의 발을 씻는 데 그 물을 쓰실 테니까요.

그 물은 그렇게 ‘사랑으로 섬김’을 가리키는 상징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빵도 조금 주셨으면 합니다. 요셉님, 그걸 다 달라는 게 아니고 쪼개서 저에게 나눠주시면 됩니다. 언젠가 당신 아드님도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빵을 쪼개실 테지요. 아드님 덕분에 이 세상에는 희망이 넘쳐흐르게 될 것입니다. 물과 포도주와 빵, 우리 실존을 본질적으로 압축한 그 세 가지를 제 배낭에 넣어 가겠습니다. 다소 고단한 제 삶의 여정에서 참으로 필요한 것들이라서요.

뿐만 아니라 제가 몸 담고 있는 교회에도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저에게 와서 뭔가를 달라고 요구한다면, 저는 그 세 가지 말고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습니다. 돈도 명예도 권력도 없고, 오로지 물과 포도주와 빵!

이제 날이 더 어두워졌네요. 광장을 오가는 이들도 보이지 않고, 당신의 집 뜰에 있는 삼나무에서 귀뚜라미가 우네요. 집집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기억하라!’(신명 6,4-9 참조) 기도를 바치는 소리가 들리는군요. 그리고 조금 있으면 나자렛 마을 전체가 저 달빛 아래 곤히 잠들겠지요.

지금쯤 화덕 가까이에 저녁상이 차려져 있겠네요. 가난한 사람들의 저녁식사! 우물에서 길어온 물, 하루 먹을 만큼의 빵, 그리고 엔 게디의 포도주 그리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마리아가 있네요.

부탁합니다. 집에 들어가시거든 그녀를 꼭 안아주면서 저의 인사도 좀 전해주세요. 저도 그녀를 무척 좋아한다고 말씀해 주세요.

평온한 저녁이 되길 바랍니다, 요셉님!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