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들과 복음에 대한 사랑에 극단적으로 순명하고자 반항적인 사제의 삶을 살았던 로렌쪼 밀라니라는 분이 있다. 마리오 란치시Mario Lancisi라는 작가가 “불순명의 예언자 돈 밀라니의 삶Don Milani. Vita di un profeta disobbediente”이라는 앞뒤가 맞지 않는 듯한 제목으로 TS Edizione라는 출판사를 통해 로렌쪼 밀라니 신부의 전기傳記를 펴냈다. (※로렌쪼 밀라니 신부님에 관한 우리말 책으로 “가난한 아이들의 신부님, 파브리치오 실레이 글, 시모네 마씨 그림, 유지연 역, 지양어린이, 2018년”이 있다) 44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피렌체 출신 사제인 밀라니 신부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책이다. 작가는 바르비아나의 소년들을 위해 학교를 설립한 로렌쪼 신부의 인간적이고도 영적인 여정을 그린다. 명문가 출신이면서도 사제가 되어 오로지 가난한 이들을 선택하고 그들만을 위해 복음 말씀 그대로를 치열하게 살고자 했던 사제의 삶이다.
* 다음은 2023년 2월 12일자로 Vatican News에 실린 내용으로 바티칸의 아드리아나 마소티Adriana Masotti가 전기 작가 마리오 란치시와 나눈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미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로렌쪼 카를로 도메니코 밀라니 콤파레티Lorenzo Carlo Domenico Milani Comparetti라는 긴 이름을 지닌 분이 100년 전인 1923년 5월 27일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스스로 “어둠 속에서 지낸 20년”이라고 부를 만큼 신앙이나 복음과 무관하게 20년을 살았던 로렌쪼는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고 신학교에 입학한다. 새로운 길을 선택한 밀라니는 신학교로 떠나기 전날 저녁에 당시 거의 약혼녀나 다름없었던 카를라Carla에게 “사랑하는 카를라, 나는 내일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려고 해.”라고 쓴다. 1947년 사제가 된 로렌쪼는 1967년 6월 26일 44세의 나이로 죽기까지 큰 고통을 겪으면서도 주변의 아이들과 함께 살았고, 칼렌자노의 산 도나토San Donato di Calenzano 본당과 바르비아나Barbiana 본당이라는 아주 작은 두 개 시골 본당 사람들을 위해 살았던 공로를 교구로부터 전혀 인정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란치시가 기록한 사제 로렌쪼의 생애
권위 있는 전기 작가로 유명한 마리오 란치시는 로렌쪼의 생애 말기에 그의 곁에서 함께 아이들을 가르쳤던 아델레 코라디Adele Corradi와 바르비아나 학교 시절을 미켈레 형제와 함께 13년 동안이나 동반했던 프란쿠쵸 제수알디Francuccio Gesualdi 등을 통해 발굴된 새로운 편지나 증언을 추가하여 로렌쪼의 초상화를 그려나간다. 란치시는 돈 밀라니라는 인물을 두고 1970년대부터 깊은 관심을 두어 반세기가 넘게 연구하고 수집한 내용을 바탕으로 “계속 되돌아간 기준점un punto di riferimento costante”으로 로렌쪼 신부를 정의한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바르비아나 방문
란치시는 돈 밀라니가 실제 누구였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2017년 여름 교황 프란치스코가 바르비아나를 방문하여 돈 밀라니의 묘소에서 기도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란치시는 “교황께서는 로렌쪼가 사제요 교육자의 모범이었다는 것에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교황께서는 그 자리에 함께한 사제들에게 로렌쪼를 모범으로 삼으라.”고 말씀하셨다 전한다. 교황은 이미 2017년 4월 23일 이탈리아 출판 박람회에서 소개된 로렌쪼 신부의 작품 발표를 위해 모인 참석자들에게도 영상메시지를 통해 “상처를 입었으면서도 교회와 사랑에 빠졌으며 열정적인 교육자로 그리스도와 복음의 증인이었던 로렌쪼 신부의 작품들을 애정을 담아 읽어 보라.”고 권했다. 그보다 한참 전이었던 2014년 5월 10일 가톨릭 교사들을 만나신 자리에서도 교황께서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바르비아나의 로렌쪼 신부를 “위대한 이탈리아 교육자un grande educatore italiano”로 칭한다. 그에 몇 주 앞서 교황 프란치스코는 로렌쪼 밀라니의 첫 번째 저서라고 할 수 있는 <사목 경험Esperienze pastorali>을 가톨릭 금서 목록에서 해제하여 하느님의 백성에게 돌려준 바 있다.
로렌쪼 신부의 세 가지 주요 작품: 사목적 헌신과 시민으로서의 헌신
란치시의 전기를 관통하는 줄기는 20세기 역사에 깊은 족적을 남긴 시민적이고도 종교적인 예언자로서의 삶이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모두 바르비아나에서 쓰인 세 가지 주요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훗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종교적 개혁으로 실현될 1958년의 <사목 경험Esperienze pastorali>, 평화, 시민 불복종, 양심의 우위 등과 같은 내용을 아이들과 함께 탐색하면서 맹목적인 순명이 더는 미덕이 아니라면서 1965년에 발행한 <순명L’obbedienza>, 1967년에서 1968년으로 이어지는 <한 여교수에게 보낸 편지Lettera a una professoressa>를 통해서 돈 밀라니는 학교의 계급적 분류를 비판하고 지식의 중요성, 특별히 가난한 이들의 구원을 위한 언어의 사용을 역설한다. 이 책을 두고 란치시는 “가난한 이가 언어(읽고 쓰기)를 안다고 하는 것은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트리는 돌팔매와 같은 것”이라고 하는 로렌쪼 신부의 말을 인용한다.
탄생 100년이 지난 오늘의 돈 밀라니
마리오 란치시는 바티칸 뉴스의 아드리아나 마소티Adriana Masotti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이 전기를 통해 밀라니 신부의 선택과 어려웠던 순간들, 극도의 초지일관, 자신에게 맡겨진 이들을 끝까지 보살피고자 했던 선택을 강조하면서 피렌체의 사제였던 밀라니 신부를 깊이 이해하고자 했다는 점을 피력한다. 마리오 란치시는 어떤 부분에서는 실로 딱딱하고 고통스러웠으나 매우 아름다웠던 한 사제의 삶을 써나가면서 진정한 의미에서 시대를 초월한 예언자로서의 삶을 기록하는데, “불순명의 예언자 돈 밀라니의 삶Don Milani. Vita di un profeta disobbediente”라는 책의 제목에 “불순명”이라는 어휘를 왜 그렇게 써야만 했는지를 역설한다. 아래는 마리오 란치시의 인터뷰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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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그는 자기가 속한 본당의 신자들에게, 그의 소년들에게 예언자들이 그러했듯이 그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말한 그 길이 바른길임을 입증하기 위해 그 길에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쳤습니다. 그는 자기가 말한 대로 살고 사는 대로 말했던 예언자였습니다. 예언자는 새로운 지평을 여는 사람입니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는 그 누구도 다른 이를 인용하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오로지 예수님과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강한 믿음 안에서 그 자신이 곧 예수님이 되고 복음 자체가 되어 말하는 예언자입니다. 그에 관한 책을 기록하면서 ‘불순명’이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순명에 반항하는 듯이 보이는 그의 삶을 계속 읽어나가다 보면 그의 순명과 불순명이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같은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책의 제목을 그렇게 뽑은 것을 보고 금세 누군가는 그의 삶이 무척 모난 삶이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사실 밀라니의 삶에는 순명과 불순명 사이에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있기도 합니다. 그는 급진적이고 엄격한 방식으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과 복음에 순명하기 위해 세속의 논리와 관습,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순명하지 않았습니다. 돈 밀라니는 스무 살에 회개하고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이래 복음적 가치에 충실하기 위해 개인적인 희생을 감수하면서 자기 자신을 가히 학대했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신부님의 하느님을 향한 절대적이고도 엄격한 충실함은 분명코 자신과 타인, 그리고 교회의 사람들까지도 포함해서 그 누구에게도 예외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스무 살에 입학한 신학교 생활을 두고 돈 밀라니는 ‘기막힌 사기詐欺, 지극히 거룩한 순결이 결여된 지저분한 생활, 눈곱만큼의 사랑밖에 없었던 증오할 만한 생활’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런데도 로렌쪼는 그의 사제직을 향한 계획을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이것이 위선일까요? 아닙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극단적으로 충실한 신학생이었습니다. 사제직의 길을 포기하려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기에 빠져 그만두려는 다른 이들을 간곡히 설득하려고 했었습니다. 사제 성소를 의심하는 몇몇 형제들에게 마음으로는 의심하면서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어떤 시점에서는 하느님을 향한 순명을 강조하는 예언자이면서도 비판적인 의식으로 냉철하게 살아야만 한다고 말하는 편지글들이 있습니다. 밀라니의 언어는 맥락을 고려하면서 해석해야 합니다. 그가 ‘사기詐欺’라고 할 때 이는 그가 세상을 두고 강하게 이야기하는 어휘입니다. 밀라니는 신학교를 그만두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사실 위선에 관해서는 그가 더는 견딜 수 없어서 떠나온 명문가의 삶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고, 비슷한 것을 다른 환경인 신학교의 삶에서도 발견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그는 실망하면서 극심하게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것들이 사제가 되기로 한 그의 선택에서 그의 맑은 신앙과 마지막 확신까지도 훼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돈 밀라니의 삶을 통해서 그가 고통을 받았던 중요한 내용 중 하나가 피렌체 교구 참사회를 포함한 바티칸과의 관계였습니다. 밀라니 신부는 이를 두고 많은 기록을 남깁니다. 밀라니의 <사목 경험>이라는 저서는 피렌체 교구의 참사회를 통해서 금서禁書가 되었고 산 도나토와 바르비아나에서 있었던 그의 사목활동은 많은 제약을 받기도 했습니다만 교회를 향한 그의 사랑은 절대 식지 않았습니다. 저로서는 밀라니 신부님의 전기傳記를 통하여 바티칸의 태도와 입장을 피렌체 교구 참사회와 구별하기 위해 조금 더 정확히 피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요한 23세의 비서이면서 훗날 바오로 6세의 협력자였던 로리스 카포빌라와 인터뷰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고, 그의 증언을 통해서 요한 23세나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 이 젊은 피렌체 사제에 관해 자비로운 태도와 관심, 심지어 존경과 찬사를 보내기도 하였다는 사실, 돈 밀라니가 위독했을 때 바티칸이 그의 치료비를 댈 정도로 교황님이 자애로우셨다는 사실까지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피렌체 교구 참사회의 태도는 이와 달랐습니다. 플로릿Florit 추기경이 연령 제한으로 퇴임하게 되었을 때 일간지 아베니레l’Avvenire가 훗날 추기경이 되신 베넬리Benelli의 부임을 알렸는데, 그러한 기사를 다룬 같은 날의 같은 면과 다음날의 기사에서 당시 피렌체에서 존경받고 신뢰받고 있었던 실바노 니스트리Silvano Nistri 신부가 매우 긴 기고문을 통해서 로렌쪼 밀라니 신부를 극찬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싶습니다.
로렌쪼 신부는 명문가 출신이면서도 단호한 태도로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섰고, 세상을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로 나누었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을 가장 가난한 이의 대명사인 프란치스코라고 불리기를 원하는 교황으로부터 마침내 인정을 받았습니다. 앞서 다른 교황님들의 자비로운 태도에 관해서도 이미 언급하였습니다만, 2017년 6월 20일 교황 프란치스코의 바르비아나 방문은 돈 밀라니의 복권을 위해 대단히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교황님들의 자비로운 태도에도 불구하고 로렌쪼 신부의 사후 한참 동안 가톨릭교회 안에서 여전히 바르비아나의 사제에 관한 부정적인 내용이 오늘날까지도 충분히 소화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교황님께서 하얀 수단을 입으신 채로 작은 시골 바르비아나의 작은 묘소를 방문하셨다는 사실이 교황님의 강력한 선택도 선택이지만 그 자체만으로 강력한 이미지가 됩니다. 교황님께서는 수행원들에게 손짓하여 당신 뒤로 오라고 하시며 당신께서 앞서가시고자 했습니다. 이는 마치 ‘죄송합니다. 저희가 실수했습니다.’라고 말하는 듯 교황님의 이 모습이 제게는 아주 강한 인상으로 다가왔습니다. 교황님의 방문이 지닌 역사적 가치는 “집 짓는 사람이 버린 돌”이 미래 교회의 초석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1954년 밀라니 신부는 지도에도 없는 바르비아나라는 곳으로 유배를 당한 셈이었습니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여정에서 바르비아나를 과연 교회의 초석으로 삼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것이 신앙의 갈림길이라고 지적합니다.
돈 로렌쪼 밀라니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한 여교수에게 보낸 편지Lettera a una professoressa>를 통해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중학생 시절 저는 유급을 당했고, 매우 가난한 집의 아들로 태어나 무엇을 해야 할지, 직장에 갈지 공부를 계속해야 할지 갈등하며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그 편지글들이 담긴 책을 읽도록 했습니다. 이 책은 제게 큰 감동을 주었고 저를 울고 웃게 했습니다. 그 울음과 웃음 속에서 해방을 맛보았습니다. 그 편지글들을 통해서 저는 제가 유급을 당해야 했던 상황에서 저의 실수가 무엇이었는지,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서 지닐 수밖에 없었던 수줍음을 극복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던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밀라니의 모습과 그의 세상,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하느님의 바보들’이라고 부르는 피렌체 사람들의 세상에 다가가기 시작했으며 1970년대부터 여지껏 저는 돈 로렌쪼 밀라니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돈 로렌쪼가 자기 방문에 써 붙였던 ‘I care’, 즉 ‘내게 중요해!’ ‘내가 하지!’ ‘내가 할께!’ 하는 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쓴 전기에는 로렌쪼가 몹시 아팠을 때 그에게 편지를 보내왔던 한 젊은 나폴리 소녀의 이야기를 담은 한 장章이 할애되어 있습니다. 소녀는 로렌쪼에게 인생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중요하고도 강한 질문들을 담아 편지를 보냈습니다. 로렌쪼 자신이 답을 보낼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이 편지에 대한 답장은 로렌쪼의 한 학생이 대신 답을 하도록 했습니다. 바르비아나 학교에서 밀라니를 곁에서 동반했던 아델레 코라디라는 여선생이 로렌쪼가 아팠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지만, 이 답장을 읽어 보고는 그러한 답이 편지를 보내온 소녀에게 확신을 주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여 즉시 후회합니다. 이를 보고 들었던 로렌쪼는 고통 속에서도 침상에서 천천히 일어나 작은 책상에 앉아 아주 위대하고 특별한 편지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 편지에는 모두를 사랑할 수는 없지만, 소수의 몇몇이라도 사랑할 수는 있고, 하느님께서는 그 소수를 사랑하는 데에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사랑하라고 요청하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 편지는 일종의 유언서와도 같은 편지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대개는 섭리에 맡기며 외면할 수도 있었겠지만, 로렌쪼는 마지막까지도 소녀의 질문에 관심을 내면서 ‘I care.’, ‘내가 답하겠다’고 나선 것이었습니다. 로렌쪼는 마지막 숨까지도 모두 바치고 싶어 했습니다. 극심한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자기 소년들에게 ‘나는 내 어머니를 통해서 피렌체에서 최고의 간호사를 내 곁에 두도록 할 수도 있지만 나는 여러분들이 내 곁에 머무르도록 원합니다. 그래서 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죽어가는지를 여러분에게 가르쳐주고 싶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자기 죽음까지도 아이들에게 인생의 한 수업이 되게 하였습니다.
돈 밀라니라고 할 때 무엇이 떠오르느냐고 물으면 ……답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그저 게라르도 콜롬보라는 판사 한 분에 얽힌 사실 한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분은 밀라노에서 제가 기록한 전기를 소개하면서 예수님을 만나 부르심을 받고 그분을 따르고자 하였으면서도 결국 침울한 표정으로 예수님을 떠나가야만 했던 부유한 젊은이의 모습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하였습니다. 제게 밀라니 신부님은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기로에서 ‘예’라고 대답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양심을 찔러대는 분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저에게 밀라니 신부님은 항상 근본적인 요소로 불안을 조장하는 분, 별이면서도 한사코 되돌아가야 하는 기준점과도 같은 분입니다.
밀라니 신부님이 탄생하시고 100년이 지난 오늘날, 밀라니 신부님은 어떤 특정한 가치에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그 가치가 인정되는 것처럼 그렇게 인식되고 있을 것입니다. 분명 관성적으로 생각하는 흐름이나 의례적이고도 공허한 추상적인 인식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토론하고 서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은 욕구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피렌체의 한 공동체에서 이 책을 처음 발표하던 날 한 사제가 돈 밀라니의 가치를 오늘날 사회에서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지를 우리가 서로 질문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돈 밀라니 탄생 100주년을 맞으면서 과연 우리는 고통스럽고 불안한 오늘날 현 사회에서 돈 밀라니를 어떻게 하면 다시 살게 할 수 있을까요?(*기사 및 사진 출처 – 바티칸 뉴스, 2023년 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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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조 밀라니 신부에게 헌정된 “책의 시대”에 보내는 교황의 영상메시지
(*출처-2017년 4월 25일자 바티칸 라디오)
프란치스코 교황은 밀라노에서 개최된 “책의 시대” 도서 전시회에 즈음하여 바르비아나 학교의 교장 로렌조 밀라니 신부에게 헌정된 영상메시지를 보냈다. 4월 24일 오후 개최된 이 전시회에서는 메리디아니 몬다도리 출판사의 문집으로 역사가인 알베르토 멜로니가 엮은, 미 발간된 작품을 포함하여 사제의 “전집” 완간이 소개될 예정이다. 영상메시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는 이번 주간에도 여러 번 죄의 용서를 빌 필요가 있기 때문에 결코 교회를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게 된다면 죄의 용서를 구하러 다른 누구에게 가야 할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1958년 10월 10일, 바르비아나 학교장이었던 로렌조 밀라니 신부는 이렇게 썼습니다. 로렌조 밀라니 신부의 생애, 활동과 사제직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볼 때, 하느님의 자비와 교회의 모성에 자신을 맡기는 그의 행동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 불과 4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 토스카나 출신 사제의 수많은 작품을 읽었고, 그가 본당신부로 있었던 바르비아나 학교의 아이들과 함께 썼던 ‘어느 여교사에게 보낸 편지’를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기억합니다. 훌륭한 교육자요 교사로서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독창적인 방법을 실천했지만, 어쩌면 자주, 너무 앞서 나갔고, 그래서 이해하기 힘들고 즉시 받아들이기 힘들 것입니다. 그에게 익숙한 교육방식은 비신자요 반성직주의자였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고, 그에게는 반항적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을 때, 지성적인 변증법과 때때로 지나치게 무례하다고 여길 수 있었던 솔직함이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그는 가정에서 익힌 이러한 특성을 1943년 회심한 후에도, 그리고 사제직을 수행할 때도 계속 유지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점이 마찰과 불화를 야기했고, 마찬가지로 교회와 사회조직의 오해도 불러일으켰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들은 그의 교육적인 제안,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과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옹호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역사는 항상 되풀이됩니다. 저는 무엇보다 먼저, 그가 비록 상처를 입었지만, 교회를 사랑한 신자로서, 그리고 제가 보기에 우리의 청소년들의 마음과 지성이 요청하는 바에 응답으로 생각되는 학교에 대한 비전을 가진 열정 넘친 교육자로 기억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밀라니 신부님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탈리아 학교의 현실을 되짚어봅니다. “현실에 대한 개방과 동의어이기 때문에 저는 학교를 사랑합니다. 적어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항상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관점을 약간 바꿀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학교에 간다는 것은 여러 가지 다양한 측면과 차원에서, 지성과 마음을 현실에 개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현실을 두려워할 아무런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학교는 우리가 현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쳐 줍니다. 학교에 간다는 것은 여러 가지 다양한 측면과 차원에서, 지성과 마음을 현실에 개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런 점은 아주 아름답습니다! 저학년 때에는 360도로 다양하게 배우고, 그런 다음 차츰차츰 한 방향을 심화시키고 마지막에는 전문화하는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 배우는 법을 배웠다면, 배우는 것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 이것이 비밀입니다, 배우는 법을 배우는 것! – 배운 것이 그에게 항상 남아있게 되고, 현실에 개방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가르쳤던 위대한 이탈리아 교육자, 그분은 사제였습니다. 곧 로렌조 밀라니 신부님이셨습니다. 이와같이 저는 2014년 5월 10일, 이탈리아 교육, 이탈리아 학교 관계자들을 대상으로도 말했습니다. 그런데 로렌조 신부님의 걱정은 반항의 결과가 아니라, 청소년들에 대한 사랑과 애정의 결과였습니다. 그의 양떼였던 청소년들을 위해, 그는 고통을 겪으며 싸웠고, 때때로 거절당하기 일쑤였던 존엄성을 그들에게 심어주려고 애썼습니다. 그의 근심은 그리스도를 위한 사랑, 복음을 위한 사랑, 교회를 위한 사랑, 사회를 위한 사랑, 그리고 상ㅊ입은 이들을 도와주고, 소외된 자들과 버려진 이들을 회복시켜주기 위한 “야전병원”처럼 항상 꿈꾸었던 학교를 위한 사랑으로 성장한, 영적인 근심이었습니다. 자기 권리를 방어하기 위해 솔직히 말하는 것, 아는 것, 깨닫는 것, 이해하는 것은 로렌조 신부님이 하느님 말씀의 독서와 성체성사의 집전에서 출발하여 매일매일 사용했던 동사들입니다. 그래서 그를 매우 잘 알았던 한 사제는 그에 대해 “그리스도를 과다 복용”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주님께서 로렌조 신부의 인생의 빛이 되셨고, 저는 그 빛이 그분에 대한 우리의 기억을 비추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그림자가 자주 그의 인생 위에 길게 드리웠지만, 그는 늘 그리스도의 부활 신비와 교회의 신비에 참여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자신의 영적 지도 신부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 명의 그리스도인 신부로 죽는 것으로 봐주었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고통과 다친 상처 그리고 십자가는 결코 그에게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빛을 흐리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걱정은 오직 한 가지, 곧 그의 아이들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루카 10,29-37 참조), 사람들의 피부색이나, 언어나, 문화나, 외형적인 종교를 바라보지 않고, 필요에 처한 자들을 도와주고 가장 힘없는 자들에게 고개 숙일 자세를 갖추고, 연민으로 가득 차 있고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과 개방된 정신을 갖추고 성장할 수 있었으면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결론을 대신하여, 시작 때와 마찬가지로, 한 번 더 로렌조 신부가 그의 아이들 중 하나이자, 젊은 공산주의자였던 피페타에게 썼던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그 청년은 로렌조 신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모든 신부님이 신부님과 같다면, 그렇다면 (…)” 그러자 밀라니 신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공원의 울타리를 함께 허물어버리게 될 날, 부자의 궁궐 같은 주택 안에 가난한 이들의 집을 짓게 되면, 피페타 기억해둬, 바로 그날 난 널 배신할 거야. 그날 마침내 나는 그리스도의 한 사제로서 합당한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거야.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바로 그날 나는 너와 함께 하지 않을 것이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의 주님 앞에서 너를 위해 기도하기 위해 악취를 풍기며 비가 새는 너의 허름한 방으로 돌아갈 테야”(피페타에게 보내는 편지, 1950).
이제,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강한 의식을 가지고, 항상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선사하시고 우리의 어머니이신 교회 안에서 만날 수 있는 위로와 은총, 빛과 온화함을 추구했던, 그리스도와 복음의 증거자로서 그를 바라보는 자로서 애정을 가지고 로렌조 밀라니 신부의 글들에 다가가 봅시다.”
※ 참조 – “우리는 왜 학교에 가는가”(http://benjikim.com/?p=4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