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에 시복되고 1934년에 시성된 성 요한 보스코이지만 이탈리아 말로 사제를 뜻하는 ‘돈don’을 이름 앞에 붙여 친근하게 통상 ‘돈 보스코’라고 부른다.
돈 보스코를 만나 돈 보스코와 함께 그의 기숙학교에서 짧은 시간을 보냈으나 그 성덕의 출중함으로 돈 보스코가 몸소 소책자로 전기를 집필하여 다른 기숙학교 아이들에게 성덕의 모델로 제시하였던 성 도메니코 사비오(1842~1857년, 1950년 시복, 1954년 시성)의 멘토이자 영적 지도자이다. 돈 보스코는 도메니코 사비오를 비롯한 많은 아이에게 성인聖人이 되려는 열망을 불러일으켰으며 그러한 과정 안에서 청소년의 친구이자 아버지요 스승이며 동반자로서 본인도 성인이 되어 갔으니, 돈 보스코 편에서는 함께 사는 아이들에 대해서 ‘성인 만들기’였고, 아이들 편에서는 돈 보스코처럼 되고 싶고 성인이 되고 싶었던 ‘성인 되기’의 삶이었다. 그렇다고 돈 보스코가 아이들이 거룩한 천상 시민으로만 살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천상 시민을 지향하면서도 땅에 발을 딛고 사는 건전한 지상 시민으로도 살기를 바랐으니 소박하게는 ‘착한 신자와 건강한 시민’이 그의 교육 목표였다.
돈 보스코는 “꿈꾸는 성인”이라고도 불릴 만큼 자주 주어지는 생생하고 선명한 꿈을 통해 자신의 나아갈 길을 찾았으며, 이를 어린아이들에게도 가르침의 도구로 활용하곤 했다. 교황 비오 9세의 요청으로 그는 자신의 몇몇 꿈을 상세히 기록해 두기도 하였다. 아버지 멜키올 보스코는 토리노 외곽의 베키라는 작은 동네의 시골 농민이었는데, 돈 보스코는 그의 나이 2살 때 이미 아버지를 여의었고, 이에 따라 가난한 농촌의 홀어머니 밑에서 배다른 형제와 함께 성장했다. 돈 보스코는 아홉 살 무렵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첫 번째 선명한 꿈을 꾸었다고 스스로 기록하는데, 이 꿈은 그에게 평생 큰 인상을 남겼으며 여러 번 반복해서 그에 이어지는 꿈을 꾸기도 했다. 아홉 살 꿈속에서 그는 자신의 영적 사명을 처음 들어 알게 되었고, 그것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돈 보스코는 교황님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자전적인 행적을 기록하면서 아홉 살 때의 꿈을 자신의 필치로 다름과 같이 기록한다: 꿈속에서 어린 요한 보스코는 아이들과 함께 집 옆에 있는 들에서 많은 아이와 함께 있었다. 아이들 가운데 거친 애들이 욕설을 내뱉고 못되게 행동하는 것을 본 요한 보스코는 경악하며 그들 가운데 뛰어들어 그들에게 그런 짓을 멈추도록 소리쳤다. 그 순간 그의 앞에 위엄있고 엄숙한 모습으로 잘 차려입은 한 어른이 나타났다. 그는 흰색의 망토를 입었으며, 그의 얼굴은 쳐다볼 수 없을 만큼 빛이 났다.
그 사람은 어린 요한의 이름을 부르며 그에게 이 아이들의 리더로 자리를 잡도록 명령하고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너는 이 친구들을 폭력이 아니라 온화함과 친절함으로 이길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죄가 추하고 덕이 아름다운 것임을 그들에게 보여 주기 시작하라.” 혼란스러워하고 겁을 먹은 채로 요한은 자신은 이 아이들에게 종교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는 어린 소년에 불과하다고 대답했다. 그 순간 싸움과 아우성이 멈추었고 아이들이 요한과 말하고 있는 그 사람을 둘러싸고 모였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요한은 “그렇게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어떻게 명령할 수 있다는 건가요?”라고 물었다.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일이라도 너는 순명과 지혜로 이루어낼 것이다.” 그 사람(예수님)은 요한에게 여선생님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별빛으로 빛나는 고귀한 외모의 여인(성모님)이 나타났다. 아이들은 모두 사라지고 거친 동물들로 대체되었다. 여인은 요한에게 이것이 그가 일하게 될 분야이며 겸손하고 굳건하며 강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동물들이 온순한 어린 양으로 변했다. 혼란스러운 요한에게 여인은 “적절한 시기에 모든 것이 명확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요한은 다음 날 가족과 그 꿈을 나누었다. 그의 형제들은 웃으며 그가 동물을 치는 목동이 되거나 강도 무리의 지도자가 될 것이라 예언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누가 알아? 어쩌면 너는 사제가 될지도 몰라.”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할머니는 “꿈같은 것에 신경 쓸 것 없다”라고 말했다. 요한은 그의 할머니와 같은 생각이었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의 꿈이 점점 더 선명해져 갔다. 16세 때 사제가 되기 위해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하였고, 26세 때인 1841년 6월 5일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매우 가난하여 그가 입은 옷은 모두 다른 이들이 이미 입었던 옷이었다. 젊은 사제로서 그는 토리노의 Convitto Ecclesiastico(사제 양성소)라는 곳에서 첫 소임을 시작하였는데, 이는 젊은 사제들을 목자로서 훈련하는 신학교였다. 그 소임 중에 그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주일학교 교리 수업을 시작하였고, 이는 토리노에서 여러 차례 장소를 옮겨 다니는 유랑 집단으로 발전하였다. 짧은 기간에 아이들이 무척 많이 늘어났고, 얼마 안 가 그는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모아 기숙사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1853년에는 옷감 재단 공방이나 신발 제작 공방 같은 것들도 개설했다. 급기야 그는 함께 살던 아이 중에서 몇몇을 선발하고 양성하여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성인인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이름을 따서 수도회의 설립에 착수했다.
1856년까지 그는 150명의 아이들을 위한 기숙사와 4개의 작업장, 그리고 오라토리오에 있는 약 500명에 이르는 아이들을 보살피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1859년에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회라는 이름을 딴 교황청립 수도회의 설립을 인가받았다. 나아가 1872년에는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회(살레시오 수녀회)’도 설립하였고, 이 역시 빠르게 성장하였으며 1875년에는 최초로 남미에 해외 선교사들을 파견하기도 했다. 돈 보스코는 성당의 건축에도 능력을 발휘하여 1868년에는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을 토리노에 건립하여 봉헌하였고, 이어서 교황님의 부탁에 따라 공사가 중단되어있었던 로마의 예수 성심 대성당 건설 프로젝트도 맡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부족한 건축 비용의 모금을 위해 몇 달간 프랑스를 여행하기도 했다. 거기서 그는 기적을 행하는 성인으로 환영받았다. 로마의 예수 성심 대성당은 1887년 5월에 봉헌되었지만, 극심한 과로 때문에 건강이 악화하고 말았다.
체력이 고갈된 돈 보스코는 1888년 1월 31일에 선종했다. 장례식에는 4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그의 유해를 보기 위해 모였다. 오늘날에는 살레시오회가 전 세계 135개국으로 퍼져나가 있다. 돈 보스코의 특별한 체험인 여러 꿈은 비오 9세 교황의 관심을 끌었으며, 교황은 돈 보스코에게 그의 꿈과 지나온 시절을 기록하도록 지시했다. 그가 직접 기록했거나 그의 후손들에 의해 수집되고 기록된 꿈들은 적어도 150개가 넘는다. 이 꿈 중 많은 꿈은 예언적이었고, 그가 함께 살던 소년들이나 살레시오 수도회에 관련된 꿈들이다. 어떤 꿈은 교육적인 꿈이거나 우화적인 꿈들도 있다. 이 꿈들은 그의 종교적 교육이나 신념과 조화를 이루며, 그의 종교적인 생활의 상징들로 구성되어 있고, 구원을 얻기 위해 가톨릭 교리를 따라야 하는 필요성과 관련되어 있다. 돈 보스코의 선명한 꿈들은 어떨 때 매우 길고 구체적인 세부 사항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일반적인 꿈과는 달리 그의 꿈들은 논리적이었고 시작부터 끝까지 완전한 이야기로 진행된다. 그는 꿈속에서 일반적으로 천사,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 도메니코 사비오 또는 ‘모자를 쓴 사람’이라고 부르는 인물 등과 동행하기도 한다. 그는 꿈속 다른 사람들과 장시간의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으며, 그것들을 기억할 수 있었는데, 이 꿈들은 꿈이라기보다는 실제 경험이나 현실에 가까웠다.
그가 꿈에서 받은 감각적인 인상이 너무 강해서 때로는 꿈인지 깨어있는 상태인지 확인하기 위해 손뼉을 치거나 몸을 만지기까지 해야만 했다. 이는 오늘날 선명한 꿈을 꾸는 사람들이 그들의 경험이 실제인지 확인하기 위해 자신을 꼬집어보는 것과 같다. 때로는 신체적 현상이 꿈에서 깨어난 후까지 계속해서 진행되기도 했다. 그는 어떤 꿈에서 지옥의 공포를 보는 꿈을 꾸었는데, 잠에서 깨어난 후에까지 악의 악취가 남아 있었다. 이러한 의식과 무의식세계를 오가는 꿈을 미신적이라거나 융Carl Gustav Jung이 말하는 대로 무의식이 의식으로 표출되어 나오는 현상 정도로 볼 수도 있겠지만, 성 예로니모가 꿈에 얻어맞았는데 깨어보니 실제 몸이 멍들어있고 쓰라렸다는 식으로 돈 보스코의 꿈 역시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생동감 있게 오간다. 돈 보스코는 선명한 꿈을 통해 실제로 성모님의 많은 지도를 받았다. 그는 소년들에게 혼신을 다해 투신했고, 예언적인 꿈으로 아이들의 영적인 일탈을 알아내거나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꿈을 활용하기도 한다. 돈 보스코의 꿈은 다른 사람들의 비밀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밝혀내기도 하였는데, 임박한 사망과 관련된 문제에서도 그랬다. 돈 보스코는 자신의 꿈을 젊은이들에게 자주 이야기했다. 그는 때때로 꿈에서 “누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고 들을 수 있으며 묻고 대답을 들을 수 있다”라고도 말했다.
그는 소년들에게 자신의 꿈을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했는데, 이는 다른 이들이 꿈을 우스갯소리로 여길까 봐 그렇게 하였다. 때때로 동료나 장상들이 그의 꿈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 그는 심각하게 “꿈보다 훨씬 더 큰 것도 있습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래도 꼬치꼬치 파고들려는 이들이 있으면 관용구처럼 “Otis Botis Pia Tutis(당신의 거룩한 입을 보호하십시오)”라는 말을 되풀이하기도 했다. 이는 별 뜻이 없는 말이면서도 더는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문구였다. 교황 비오 9세의 관심이 없었다면 돈 보스코의 꿈은 역사에서 잊혀질 수도 있었다. 이 꿈들은 꿈과 예언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에게 여전히 흥미롭다. 그의 특이한 꿈과 예언이나 초능력 외에도, 아이들을 위해 먹거리를 불리거나, 미사 중에 공중 부양을 하는 체험, 날씨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고 전해진다. 일례로 1864년에 극심한 가뭄을 겪고 있던 몬테마뇨Montemagno에서 성모님의 승천 축일에 강론하도록 초대되었는데, 그는 사람들이 고백성사를 잘 받고 3일 동안 기도하고 영성체하면서 농부들이 은총 지위에 계시는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면 비가 내릴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에 따라 축일 밤에는 정말 큰 비가 내려 그 동네를 적시게 되었다.
간혹 위험에 처했을 때, 돈 보스코는 신비로운 개의 보호를 받았다고 알려진다. 이 개는 크고 사나운 알사티안Alsatian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돈 보스코는 이 개의 털이 회색이었기 때문에 이를 뜻하는 그리지오Grigio라는 이름을 붙였다. 1850년대에는 종종 종교적 당파들이 그의 가르침에 반대하고 그를 위협했다. 어느 날은 한 사람이 그를 향해 총을 쏘기도 하였는데, 총알은 그의 팔 아래로 통과하여 자켓에 구멍을 뚫었지만, 몸에는 아무런 손상을 주지 않았다. 돈 보스코는 혼자 다닐 때 특히 외딴 장소에서 습격을 당하기도 했다. 그때는 그리지오가 갑자기 나타나 그를 공격하거나 위협적으로 보이는 사람을 공격했다. 돈 보스코가 안전하게 오라토리오로 돌아올 때 그 개는 신비스럽게 사라지곤 했다. 그리지오는 음식을 거부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를 보고 만질 수도 있었다. 그리지오의 경계심은 예민했고, 일반적인 개의 수명보다 훨씬 오래 살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동물 형태의 천사였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곤 했다. 세월이 흐른 뒤 그의 시신을 처음으로 외부에 공개하게 되었을 때 다른 모든 섬유는 모두 다 삭았지만, 그의 시신이 입었던 수단은 완벽한 상태 그대로였다.
언제 들어도 생생하고 신비스런 돈 보스코의 꿈을 올해는 더욱 친숙하고 자주 접하게 되었네요. 그 거룩한 꿈속에 저의 꿈도 합해봅니다.
돈 보스코의 꿈으로 이루어진 살레시오를 사랑합니다. 돈 보스코의 꿈과 함께 오늘도 풍요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