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장으로 구성된 루카복음은 맨 마지막 장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소식을 전하고, 곧바로 뒤이어 부활하신 주님과 그분에 관한 표징을 알아보지 못하고 낙향하던 두 제자와 예수님의 동행(루카 24,13-35)에 관한 이야기, 루벵 대학의 교수였던 스힐러벡스Edward Schillebeeckx가 ‘현대인에게 가장 의미 있는 복음 대목’이라고 소개했던 내용을 전한다. 의미도 의미려니와 ‘동행’을 두고 이 이야기만큼 아름답고 결정적인 이야기는 또 없다. 이 이야기는 스승 예수님과 동행하던 이들의 제자 체험이요 제자가 되어간 이야기이다.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배워간 삶의 여정이다. 삶에서 머리보다는 마음이 언제나 낫다. 예수님을 만나 제자들의 마음이 뜨겁게 “타오르던” 이야기이다. “마음은 행복에 대한 갈증이고, 진리에 대한 갈증이며, 감각에 대한 갈증이다. 마음은 저마다의 안에 묻혀 있는 진리, 행복, 아름다움, 사랑에 충실하다.”(L.M. 에피코코) 교육 동행은 이처럼 체험과 마음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돈 보스코는 교육을 ‘마음의 일’이라고 정의했다. 이 성경의 이야기는 도착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출발로부터 과정과 회귀로까지의 전체 여정을 그린다는 점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교육적 동행을 묘사한다. 교육은 도착만을 목표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실망에서 희망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무덤에서 삶으로, 눈먼 삶에서 눈뜬 삶으로, 일상의 식탁에서 성찬의 식탁으로 옮겨간다.
1. 낙담·혼란
이야기의 시작은 “바로 그날”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고 제자들이 그 부활의 표징들을 발견하기 시작한 날이다. 제자들은 낙담과 혼란 속에 낙향落鄕한다. 실패했다는 좌절감과 자괴 속에 피신하여 내리막길을 간다. 도망간다. 힘들게 터덜터덜 길을 간다. 교육적 동행은 새로운 신세계를 향한 내딛음일 때보다 이처럼 더는 희망이 없다는 실망과 주저앉음 속에서 훨씬 더 본질적인 원리가 돋보인다. 실망과 혼란, 당황과 좌절에는 상처가 뒤따른다. 외적인 사건이 내적인 고통을 유발한다. 넘어지고 무릎이 깨져도 걸음마를 배우기 위해서는 걸어야 한다. 누군가에게 넘어짐은 창피함이지만 청소년들에게는 새로운 시도가 된다. 청소년들에게 상처는 나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성장통이다. 아이들은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것을 배우는 시기가 아니라 무엇이 불가능한지를 배우는 시기이다. 되지 않는 것들과 불가능한 것들을 배우고 사회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비로소 사회의 일원이 된다. 베드로 사도의 말씀대로 “마음속에 감추어진 자신”(1베드 3,4)을 발견해가는 시기이다.
2. 토론·대화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루카 24,14-15) 제자들이 “서로” “모든 일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예수님께서 “함께” 걸으신다. 동행은 낙담과 좌절, 기대와 희망까지 아우른다. 이들은 “모든 일에 관하여” 대화하고자 한다. “함께” 대화하는 동행은 빗나감이 없다. 예수님께서 반드시 함께 걸으시고 우리의 “모든 일”을 즐겨 들으신다. 인간은 누구나 어머니의 배 안에 있을 때부터 “서로”에게 속해있고, “함께”여서 인간이다. 존재의 체험은 “서로”와 “함께”를 통해서 주어진다. 혼자서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그리고 노는 것도 의미가 없다. 혼자는 따돌림이고 왕따여서 비인간적이다.
현대인은 늘 함께이기를 갈망하고 허덕인다. 늘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어서 전화기와 이어폰을 끼고 산다. 현실을 넘어 가상 세계까지도 함께이고자 하여 수시로 연결되는 문자와 이모티콘의 홍수 속에서 살지만, 이는 그만큼 혼자라는 방증이다. 함께 있다는 환상과 허상의 착각 속에 철저히 고립되어 혼자 사는 사회의 인간이다. 인류는 지구의 끝까지도 하루 안에 가 닿으면서 globalization(세계화)을 꿈꾸지만, ‘globalization’이 불길한 숫자 13개의 알파벳으로 형성된 단어여서 태생적으로 이룰 수 없는 꿈이다. 그런 의미로 세계화는 고독의 연장이요 확장이다. 그래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서로 대화했고 함께 길을 가던 친구여서 서로 외롭지 않았다. 우정이다. 친구가 있는 우정의 자리에는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 15,15) 하신 분께서 섭리적으로 동행하신다. 친구의 시작은 함께 걷는 걸음이고 대화이며 소통이고 토론이다. 그렇게 우정이 두터워진다. 실망과 좌절의 나눔은 기쁨과 희망의 나눔보다 더 오래 깊이 가는 우정을 만든다. 서로 돕자고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흘리는 눈물이 있어서 친구가 된다. 빵보다 친구인 까닭이다.
3. 접근·동행
친구들이 함께 걷는 자리에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신다. 그리고 함께 걸으신다. 제자들이 “침통한 표정”(루카 24,17)으로 걷는 길, 낙담과 실패 속에 걷는 길에 예수님게서 오시어 곁에서 걸으신다. 함께 걸으며, 함께 기억하고, 함께 생각하며 걷는다. 그리스도인은 본질에서 순례자이고 걷는 이이며, 여정의 길 위에 있는 사람이다. 예수님과 함께 걷는 길은 인생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생각하며 걷는 길이다. “나는 길이다.”(요한 14,6) 하신 예수님께서는 인생에서 언제나 먼저 다가오신다. 선생님은 함께 걸으려는 아이들에게 예수님처럼 ‘먼저’ 다가간다. 그리고 함께 걷는다. 그럴 때는 ‘왜?’라는 물음이 서로에게 필요 없다.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함께 걸으시는데도 제자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루카 24,16) 중요한 것 앞에서도 인간은 보는 것만을 보려는 속성을 띤다. 마음의 눈으로만 보이고 하느님께서 마음의 열쇠를 열어주셔야만 보인다. 누구에게나 마음은 있다. 마음이 없으면 관계도 없다. 마음이 없으면 비극이다. 마음이 없으면 살지 못한다. “새 마음…새 영…살로 된 마음”(에제 36,26)만이 우리가 살 길이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제자들은 다가오시어 “무슨 말들?”이냐고 묻는 예수님을 두고 우리도 알고 당신도 마땅히 알아야 할 말을 그렇게 묻는 당신이 어이없다는 듯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루카 24,17) 그리고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무슨 일?”(루카 24,18-19) 하며 또 다른 대화의 창이 열린다. 너와 나의 이야기가 이제 우리와 당신의 이야기가 된다. 예수님의 앎과 인간의 앎이 달라서 서로 묻고 그렇게 대화가 시작한다.
4. 질문·설명
낯선 접근과 의아스러움, 어이없음 안에서도 말을 주고받으면 관계가 형성된다. 서로가 질문한다. 그리고 제자 중 한 사람인 클레오파스가 길게 설명하고(루카 24,19-24) 주님께서는 잠자코 들으신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을 클레오파스는 그래도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었다는 듯이 실의失意 속에서도 넋두리처럼, 아름다웠던 과거를 회상하듯 주님께 말씀드린다. 주님께서는 짧게 질문하시고,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루카 24,27) 하시기에 앞서 길게 경청하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말을 들으시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설명을 듣는다. 상호 물음과 대화 속에서 예수님의 애정 어린 탄식이 있고, 제자들의 “굼뜬 마음”이 타오르기 시작한다. “성경 전체”를 꿰뚫는 통찰과 “지혜”이신 분의 설명이다. 궁극적인 행복, 기다림, 아름다움, 근본과 거짓, 위대한 삶에 대한 염원, 삶의 의미…이 모든 것들이 “당신에 관한 기록들”임을 설명해 주신다.
“성경 전체”는 인간과 하느님 간의 관계와 그 안에서 주어진 예언, 그리고 인간과 세상의 역사가 지녔던 체험과 의미이다. “예언”은 앞일의 예고가 아니라 지나온 체험이 이루어낸 현재에서 미래를 의미로 바라보는 일이다. 씨앗을 심으며 씨앗 속에 나무가 있음을 믿는 행위이다. 일곱 개의 음표 나열만을 보고 분석하는 일이 아니라 그 음표들로 이루어진 교향곡을 듣는 연습이다. 예언적 방식으로 역사와 사건·사물을 함께 바라보고, 의미로 연결하는 일이 학습이고 배움이며 동행의 목적이다. 결국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각자 자기만의 인생이라는 곡의 연주 끝에 모두에게 감동으로 남는 공통된 아름다움이 ‘거룩함’이라는 것을 공유하고자 함이다. 거룩함을 연주하기 위한 질문과 설명이라는 동행의 교향곡이다.
5. 붙듬·머묾
저녁때가 되고 날도 저물어갈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루카 24,29ㄱ) 하고 예수님을 붙든다. 동행의 길이 깊어지면서 우리는 서로를 붙들고 싶어진다. 서로에 대한 애틋함을 넘어 아직 다 하지 못한 이야기에 대한 그리움이다. 충만한 기쁨은 이처럼 안주와 확장을 갈구하는 사랑이 된다. 그저 그대로 함께 있고 싶음이다. 사랑은 붙듬과 머묾으로 번역된다. 사랑은 날이 저물 때 함께 있고 싶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루카 24,29ㄴ) 사랑은 함께 같은 “집”에 들어가는 것이다. 인간의 집에 갇히고 제한될 수 없으신 부활하신 분께서 제자들의 간청에 따라 기꺼이 집에 들어가신다. 집은 함께 먹고 자고 살아서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식구들의 자리이다. 예수님과 함께 집에 들어간 이들은 그렇게 영신적인 혈연이요 식구들이 된다. 함께 머무는 집은 뿔뿔이 나가서 제 나름대로 돌아다니다가 부르튼 발을 끌고 언제고 다시 돌아와 함께 친근함과 환대를 나누는 자리, 함께 밤을 지새울 편안한 공간이다. 서로를 들을 수 있고 서로가 보호받는다는 사실을 느끼는 자리이다. 서로가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같은 부모와 피로 연결되어있는 허물 많은 식구들이 서로의 개성을 존중하는 자리이다. 서로의 몸짓과 말투, 스타일을 인정하면서 긍정이든 부정이든 서로 같은 부모를 몸으로 체험한 이들이 함께 있는 자리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집에 들어간 것은 집 안에서나 집 밖에서나 서로가 하나임을 깨우치기 위한 또 다른 동행의 발걸음이었다.
6. 식탁·나눔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루카 24,30) 집에서는 함께 식탁에 앉는다. 식탁은 “빵을 떼는” 자리, 서로 “나누어 주는” 자리, “찬미를 드리는” 자리, 관계의 자리, 친밀의 자리, 일치의 자리, 기쁨의 자리, 믿음과 신뢰의 자리이다. 그래서 식탁은 우리 서로를 발견하는 자리, 기도의 자리, ‘오늘 어땠어?’하고 묻는 자리, 함께 먹고 마시면서 ‘좀, 더 들어!’라고 말하는 자리, 옛이야기와 새로운 이야기가 어우러지는 자리, 웃음과 눈물이 있는 자리이다. 그렇지만, 서로서로 간에 어쩔 수 없는 거리와 한계가 다가서는 자리, 부모들 사이에서 애들이 긴장을 느끼는 자리, 형제와 자매들이 그들의 분노와 질투를 내뱉는 자리, 걱정에 걱정을 더하고 접시와 밥그릇이 폭력의 도구가 되어버릴 수도 있는 자리, 그런 자리가 또한 식탁이다. 우리는 식탁에서 우리의 우정과 동행, 그리고 공동체가 어디쯤 와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우리의 미움과 분열이 어디까지 가 닿았는지도 알게 된다. 정확히 말해서 식탁은 모든 식구의 친밀과 마음을 느끼는 자리이면서, 동시에 그 친밀과 마음의 어그러짐이 적나라하게 자기 실체를 드러내는 바로 그런 동행의 자리이다. 혼술이나 혼밥의 자리는 에너지 충전소의 기능을 할지언정 식탁은 아니다. 식탁의 동행은 서로 나를 먹인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식탁은 궁극적으로 같은 빵과 같은 음식을 나누는 성체의 식탁이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질質은 성체의 식탁에 둘러앉은 이들의 믿음에 정확히 비례한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사용하신 인간의 개념과 유비類比는 빵과 식탁이었으며 잔칫상이었다. 아직 때가 오지 않았음에도 이루셔야만 했던 첫 번째 기적은 “신들과 사람들을 흥겹게 해 주는”(판관 9,13) 혼인 잔치의 포도주였으며, 끝까지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지상 여정을 마치실 때의 눈물겨운 마지막 당부의 자리 역시 밥자리였고, 어스름 새벽녘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보이신 호숫가 역시 아침상 자리(참조. 요한 21,5-13)였다.
7. 눈뜸·회귀
예수님과 식탁에 함께 앉았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자” 제자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 24,31) 그때까지 제자 중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기대했던 예수님의 모습 안에서는 그분을 발견할 수 없었다. 어디서나 누구에게나(anybody) 항상 주님이셨는데도 그분께서는 노바디(nobody) 이셨다. 제대로 된 동행은 서로 기대했던 모습을 언제나 뛰어넘는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상대방의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는다. 익숙하고 일반적인 것에서 특별하고 독특한 저마다의 고유성을 찾아내는 예술이 교육이다. 사랑은 눈을 크게 뜨라 하고, 예민하고 세심한 주의와 인내를 요구한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만이,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던”(요한 21,20) 그 제자만이 주님을 알아보고 “주님이십니다.”(요한 21,7) 하면서 다른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주시니 제자들이 눈뜬다. “마음이 열리고”(참조. 사도 16,14), 성경을 깨닫도록 “정신”이 열리며(참조. 루카 24,45), 눈이 열린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루카 24,31) 그리고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제자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루카 24,32-35)
“빵을 떼실 때” 비로소 제자들이 눈을 떠 예수님을 알아본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쪼개시고 찢어내심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쪼개시고 눈을 찢으신다. 빵은 쪼개고 찢어지면서 먹을 수 있게 된다. 나를 쪼개고 찢어 너의 완고한 마음을 쪼개고 눈을 찢는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사라지시며, 제자들이 서로 말하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며, 다른 동료를 발견하고, 자기들의 체험을 말해준다.
예수님을 알아본 제자들은 “곧바로”, 지체없이 길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 주님을 만난 기쁨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자 서둘러 길을 떠난다. 형제들에게 기쁨을 나누고자 하는 열망이다. “길을 떠나는 두 발”(교황 프란치스코)을 지닌 이는 “기쁨을 나누는 사람, 아름다운 전망을 보여 주는 사람, 풍요로운 잔치에 다른 이들을 초대하고자 하는 사람”이다.(복음의 기쁨, 14항)이다.
쪼개고 찢어져 시작된 앎-사라짐-대화-회귀-발견-체험나눔이다. 동행의 완벽한 패턴이다. 동행의 진정한 결말은 나의 파괴에서 시작한다. 동행 안에서 서로 알게 되면, 서로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며, 그 자리에는 감동의 나눔만이 있다. 그렇게도 바라던 주님을 간신히 알아보았는가 싶었는데 주님께서 사라지신다. 그래도 제자들은 당황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오히려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 첫 자리로 돌아간다. 진정한 앎은 서로를 놓아준다. 자유롭게 열린 결말로 모든 것을 마감한다. 하나의 동행을 매듭진 이들은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 비로소 온전한 나와 너를 발견하고 나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어 또 다른 동행의 출발점에 선다. 이때의 이야기는 떠벌리기나 나의 주장이 아니며 고백이다.
눈을 뜬 두 제자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고, 열둘에서 하나가 빠진 불완전한 수 열한 제자들을 다시 만난다. 되돌아감은 자신과의 화해이고 나아가 형제들과의 화해이다. 예수님을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지고”(요한 16,32)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놓고 있던”(요한 20,19) 제자들이 예수님의 용서를 체험하고 서로 용서하며 한목소리를 낸다. 신앙은 용서를 체험한 이들 간의 고백이고 용서의 나눔이다. 그때에야 그들의 말은 생명력을 지니고 힘이 있다. 용서는 내 안의 상처와 고통을 너와 나눔으로써 치유하고 각자의 인생 여정 안에서 축복의 자국들을 되새기는 과정이다. 이탈리아 말의 ‘ricordare’는 ‘기억하다’라는 뜻인데, re(다시)+cor(마음)+dare(주다)로 분해해서 새겨볼 수도 있다. 기억은 서로의 마음에 각자 주님의 용서를 체험했던 이야기, 애초에 우리가 하나였음을 되돌리는 상호 고백의 과정이다. 이것이 진정한 회귀이다. 우리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 너머에 있는 특별한 의미를 마음에 새기는 믿음의 한 동행이 그렇게 끝나고, 성령의 바람을 따라서 다른 동행이 시작한다.(*이미지-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