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석이라는 후배 신부가 있다. 같은 수도회 같은 관구라고 하지만, 다소 나이 차가 있고, 살아가는 여정에서 서로 비켜 가면서 살아야 했던 관계로 그저 한 후배로만 알고 있을 뿐 잘 알거나 개인적인 교분은 맺지 못한 후배이다. 10년도 넘는 세월 전에 그가 세상을 뜨기 일주일 전 추운 겨울날, 그가 곧 죽을 것이라는 예감 속에서 개인적으로 마지막 인사를 전했던 것이 그와의 마지막 기억이다. 그를 좀 더 잘 알게 된 것은 오히려 그의 사후에 각종 미디어를 통해서였다. 그의 생애를 기록한 책 <신부 이태석, 이충렬 지음, 김영사, 2021년>에서는 1980년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의대에 가려고 마음을 굳힐 무렵 태석이 광주 민주화 운동에 관한 내용을 접한 뒤 ‘기도 속에서’라는 곡-훗날 ‘묵상’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노래를 지었다고 했다. 노래의 가사이다. 『십자가 앞에 꿇어 주께 물었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 총부리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이들을 왜 당신은 보고만 있냐고 눈물을 흘리면서 주께 물었네 세상엔 죄인들과 닫힌 감옥이 있어야만 하고 인간은 고통 속에서 번민해야 하느냐고 조용한 침묵 속에서 주 말씀하셨지 사랑, 사랑, 사랑 오직 서로 사랑하라고 난 영원히 기도하리라 세계 평화 위해 난 사랑하리라 내 모든 것 바쳐』
이를 읽으면서 문득 ‘솔밭 사이로 흐르는 강The river in the pines’, ‘도나도나Donna Donna’, ‘바람이 알고 있다네Blowin’ In The Wind’와 같은 노래들로 유명했던 존 바에즈Joan Baez(1941~)가 떠올랐다. 중학생쯤 되었을 때 깊은 뜻도 모르면서 아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 가사여서 영어로 흥얼거렸고, 기타 코드가 비교적 쉽고 멜로디가 서정적이며 존 바에즈의 목소리가 깨끗해서 나도 흉내를 내느라 기타를 치며 수십 번을 불러댔던 노래들이다. 그녀의 홈페이지를 방문했고, 내가 아는 그녀의 노래들을 찾아 다시 들었으며 팔순이 넘어서도 자신의 노래만큼이나 깨끗한 이미지를 간직하며 요사이는 유명인들의 초상화를 그린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금년에 우크라이나의 전쟁 영웅 젤렌스키를 그려 판매금으로 전쟁과 관련하여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도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참조. http://www.joanbaez.com/)
다시 존 바에즈를 들춰본 것은 이태석 신부의 ‘묵상’ 가사가 존 바에즈의 ‘바람이 알고 있다네’의 가사와 비슷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존 바에즈의 가사는 이렇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흰 비둘기가 얼마나 많은 바다를 건너야 모래밭에서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포탄이 날아야 지상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 친구여 대답은 바람이 알고 있다네 바람에 있다네 / 세월이 얼마나 가야 산이 바다로 씻겨갈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야 사람들이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얼마나 여러 번 고개를 돌려야 못 본 척 할 수 있을까 친구여 대답은 바람이 알고 있다네 바람에 있다네 / 사람이 얼마나 많이 하늘을 올려다봐야 하늘을 볼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귀가 있어야 사람들의 외침을 들을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너무 많은 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까 친구여 대답은 바람이 알고 있다네 바람에 있다네』
인간과 세상사에 닥쳐오며 분노를 일으키는 고통과 악은 참으로 신비다. 이해할 수도 없고 좋아할 수도 없는 문제 아닌 문제이다. 하느님께서 악의 창조주이실 리는 만무하고, 오직 자비요 사랑이실 뿐인 하느님, 세상을 그토록 사랑하신 하느님께서 어찌 이런 아픔을 허락하시는지 섭리라고 하기에는 석연치 않고, 전체를 볼 줄 모르는 인간의 아둔함으로는 결코 깨우칠 수 없다. 과연 하느님께서 이를 허락하신 것일까? 많은 이들은 악의 실재로 하느님의 실재를 반박하고 거부하기까지 한다. 교리 수업에서 만난 30대의 한 젊은이는 첫 시간에 곧바로 이 주제를 들고나왔다. 그럴 때 교회 편의 사람은 곧잘 하느님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애를 쓴다. 그 논거는 대개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는 악이 선善의 그림자이며 보다 큰 선을 보게 한다는 논리이다. 이는 악이 있어 선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식이며, 악이라는 작은 부분을 우주라는 전체의 선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는 곧 자가당착이 된다. 전체를 위해 부분을 희생해도 된다는 논리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인간 하나하나를 한없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이런 논거 앞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반 카라마조프는 『우주라는 거대한 공장이 더할 나위 없이 비범하고 경탄스러운 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데, 그 대가가 한 어린아이의 눈물 한 방울뿐이라고 해도, 나는 거절한다.』라고 말한다. 고통이 주는 통증은 경고요 시험이며 시련이 정화의 기능을 지녔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자위일 뿐이고 합리화일 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다. 악을 허용하시는 하느님은 우상이다. 둘째는 고통과 악이 벌罰이라는 논리이다. 이러한 논리는 이해할 수 없는 슬픔과 아픔 앞에서 끊임없이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스스로를 자책하게 하며 되새김하게 한다. 욥기에서 보듯이 욥의 불행을 두고 친구들이 위로하며 벌이라고 할 때, 자신의 무죄를 항변해야 하는 억울함의 토로를 계속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는 친구들의 위로마저 야속해진다. 인간이 당하는 고통과 악을 인간이 벌이라고 규정할 때 이는 인간이 하느님을 대신하는 셈이다. 다른 이가 나보다 더 많은 죄를 지었고, 나는 그나마 다행이라는 것도 시시한 자위일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3,4) 하신다. 셋째로 인간의 고통과 세상의 악이 인간의 자유 의지나 한계와 관련되었다는 논리이다. 전쟁과 사회적 불의로 빚어지는 인간의 이기심과 그에 따른 인간의 책임, 예외 없이 연결되어 있는 인간의 연대를 배반하고 거부하는 야만, 충분히 사랑하지 못해서 생겨난 고통을 아파하면서 인간이 스스로를 다그쳐야 하지만 이것만으로 악의 문제가 해결되지는 못한다. 귀찮은 모기의 탄생이 인간의 죄 때문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세상의 악과 고통 앞에서 그리스도교인은 이해를 위한 논리의 개발보다 악을 없애고 극복하려는 인간의 태도를 고민한다. 악은 이해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싸워야 하는 대상이다. 그 자체가 담고 있는 의미는 없지만, 인간은 악과 고통에 의미를 부여해 갈 수 있다. 그러기 위해 그리스도인은 고통과 악을 똑바로 바라보며 예민한 양심을 위해 수련하고, 거룩하게 분노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으로 인간이 할 바를 다하고 선이 악을 이길 것이라는 믿음을 끝까지 놓지 않으며, 그 승리를 앞당겨 기뻐하면서 보다 나은 삶과 세상을 위해 투신한다. 예수님께서는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하시고,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3) 하신다. 그렇게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기쁨으로 나아가는 존재들이다. 그리스도인은 많은 고통의 아주 깊은 뿌리인 소유에서 존재로 나아가는 존재이기를 꿈꾼다. 테야르 드 샤르댕은 『우리가 십자가의 의미를 완전하게 이해하면, 삶을 슬프고 추한 것으로 여길 위험이 없어진다. 그때 우리는 다만, 삶이 지닌 이해할 수 없는 병증病症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게 될 뿐이다.』라고 말한다.
* 전반부의 도입 부분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프랑수아 바리용,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기쁨, 심민화 옮김, 생활성서, 2000년, 144-172쪽>을 읽고 다시 재구성하여 쓴 것임. 주요 골격에 더하여 많은 표현이나 문장, 그리고 개념을 책에서 옮겨왔음. 이미지 출처-영문 존 바에즈 홈페이지(2022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