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신자가 기도하는데 자꾸 다른 생각이 찾아들어 기도에 전념하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이를 성사 안에서 고백하고,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어온다. 분심이고 주의력 산만이며 잡념이고 어수선함이다. 분심은 고집스러운 한 가지일 수도 있고 이것저것 여러 가지일 때도 있다. 분심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많은 이가 분심으로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거나 자신의 약함을 자책하며 실망하기도 한다. 운동선수들이 신체적 훈련뿐 아니라 정신적 훈련을 동반해야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하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정갈한 일상생활만이 아니라 깨끗하고 단일한 기도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은 한 가지에만 집중하거나 주어진 과제만 수행하도록 프로그래밍 된 로봇이 아니므로 어찌 보면 분심이 자연스럽다. 더구나 요즘 세상 것들은 현란한 빛깔과 몸짓으로 자기만을 보아달라고 애걸복걸하므로 오늘날은 이런 현상이 더욱 잦다. 컴퓨터의 전원을 끄지 않는 한 화면의 영상들이 계속 나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처럼 분심은 거듭 나의 시선을 훔치려 든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께서는 기도 안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어 내면을 휘저어 놓는 분심을 가리켜 ‘집안의 미치광이(la pazza della casa, 직역하면 집의 미친년)’라고 불렀다. 과연 우리는 나의 시선을 자꾸만 분산시키는 분심들을 우리의 기도 안에서 몰아낼 수 있을까? 분심의 전원을 아예 꺼서 기도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2천 년 교회의 유구한 역사 안에서 삶으로 터득한 교회의 지혜를 지니고 있다. 교회의 지혜는 말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가장 흔한 어려움은 분심이다. 이것은 소리 기도에서 말과 그 의미에 관련될 수 있고, 좀 더 심하면, (전례적이거나 개인적인) 소리 기도에서, 묵상 기도나 관상 기도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그분과 관련될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분심을 몰아내려고 쫓아다니는 것은 오히려 함정에 빠지는 것이 된다. 그저 우리의 마음으로 되돌아가기만 하면 그만이다. 분심은 우리가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를 알려 주므로, 이것을 하느님 앞에서 겸손되이 깨달으면,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우선적인 사랑이 일깨워질 것이다.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결연히 바친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실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싸움이 벌어지는데, 그것은 우리가 주님을 섬기기로 선택하는 것이다.(가톨릭교회교리서, 2729항)」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마태 6,21.24) 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분심’은 우리 마음의 주인이 아닐뿐더러 우리의 보물도 아니다. 분심이 찾아올 때 그 분심을 쫓아내려고 몰입하다 보면 오히려 그 분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가 기도 시간이 다 흘러가고 만다. 그러면 분심이 만들어낸 올가미에 걸린다. 그러한 상황들이 일정 기간 지속되면 기도는 기도가 아닌 자칫 여러 환상·망상·공상·상상·허상들 범벅의 습관이 된다. 이러한 습관은 영적 메마름을 넘어 우울과 나태로까지 나아갈 수도 있다. 그렇지만 분심을 찬찬히 살펴 내가 어떤 것에 마음을 자꾸 빼앗기고 있는지 깨우치게 되면 나의 약점을 발견하는 기회가 된다. 그렇게 나의 분심 상태를 인지·인식하는 것이 먼저이다. 성경이 말하는 ‘깨어 있음’이다. 깨어 있어서 나의 상태를 예수님께 그대로 보여드리고, 그 분심들이 결코 나의 주님이나 보물이 될 수 없으니 주님께서 은총으로 지켜주십사 하고 말씀드려야 한다. 이렇게 우리는 분심이 들 때마다 그 분심보다도 주님께서 나의 주인이심을 자꾸 고백해야만 한다. 주님께서는 나의 적나라한 모습을 듣고 보시기 위해 늘 내 앞에 계신다.(*이미지-구글)
휴! 분심 살피기. 알아차림. 깨어있기. 고요함
감사합니다.
지금 이순간 현존하기에
다가갑니다.
기도하려고 앉으면 끊임없이 찾아드는 분심에 좌절할때 많았는데… 신부님의 글을 읽고, 저의 분심을 찬찬히 살펴 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게되어 기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