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과 인간의 동행을 그린 성경은 온통 인생 여정 안에서 누군가가 어떤 동행을 어떻게 살아냈는지를 기록한다.
성경의 첫 권인 창세기는 천지창조, 아담과 하와의 실낙원, 카인과 아벨, 노아와 홍수, 바벨탑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기록하고 나서 아브라함에 이르는 족보를 수록한 뒤,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아브라함의 인생과 그가 살아낸 동행으로 믿음의 여정 첫머리를 삼는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 그러면 “복이 될 것”이라는 하늘의 음성으로 시작한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어가는 여정은 이렇게 떠남으로 시작한다.
아브라함의 부르심
아브라함은 일흔다섯에 하늘의 음성을 진지하게 듣고(창세 12장) 그분과 관계를 맺은 사람이다. 누군가를 들으면 그가 내 인생에 들어와 나의 인생이 달라진다. 첫 번째 들음은 손에 잡히는 확실함이 아니더라도 가슴을 뛰게 하고 내 인생에 나만의 독특한 색깔을 입히기 시작하면서 나를 이끈다. 소명은 모험을 감행하려는 각오이며 내 삶에 갈등을 허용하려는 의지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들이 없어서 시름이 깊었다.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은 자손을 약속하신 하늘의 소리도(창세 15장) 행여나 했지만, 세월이 가면서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이 들었던 하늘의 소리를 그저 막막한 기다림으로 채우면서 자신 안에 얼마나 자주 원망, 자조, 자괴가 오갔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10년이 넘어 여든여섯의 나이에 인생의 반려인 사라이의 말대로 나름대로 해석한 하늘의 소리를 실현해보려고 시도한다.(창세 16장) 사람들은 보통 10년이면 무엇인가 알았다 싶다. 그러나 결코 하늘의 진정한 뜻이 아니었던 시도가 또 다른 갈등의 불씨요 좌절이 되고 만다. 인간의 시간 계획은 하느님을 웃게 한다.
속절없이 세월이 또 흘러 아흔아홉일 때, 아흔인 부인 사라이가 사라가 될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웃어넘길 약속이 다시 주어진다. 아브라함은 간절한 심정으로 자기 몸에 칼을 대어 주님의 음성을 몸에 새긴다.(창세 17장) 그러다가 생각지도 않은 어느 날 오후,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애초에 간직했던 약속을 상기시키는 세 사람을 만난다.(창세 18장) 우연처럼, 나그네로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가오신다. 하느님의 약속은 일상에서 예기치 않게 우연으로 표징을 드러낸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웃어넘기고 아내도 웃는다. 그러면서도 정성을 다해 대접한 나그네 주님께 소돔과 고모라를 두고 선善의 씨앗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으면 생명을 살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흥정한다.
예기치 않은 만남과 사건, 그리고 마음 저 밑바닥에 남아있는 선의 씨앗이 소명을 연장한다. 예민한 감수성으로 기회를 관찰하고 바람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사라처럼 불신이 일어도 허탈하게 웃지 말고 계속해야 한다. ‘불신은 믿음으로 건너가기 전에 머무는 대합실’(L.M. 에피코코)이기 때문이다. 나 아닌 다른 이의 생명 안에 미소할지라도, 선의 흔적을 발견하려는 시도가 나를 살리고, 다른 이를 결국 살린다. 인간의 습성대로 부정적인 사실만을 나열할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예언적 암시를 얘기해야 한다. 아주 작은 긍정의 꼬투리일지라도 이를 붙들고 매달려야 한다. 불가능할 것 같아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아주 조금이라도 좋은 것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아버지는 조그마한 선을 붙들고 늘 아들을 만류한다.
이사악
인간적인 눈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게만 보이던 어처구니없던 계시가 마침내 이루어진다. 자신이 속으로 비웃었으나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 없는 하느님의 계시는, 비웃음을 진정한 웃음인 이사악으로 실현한다. 이사악은 예상 못한 선물이요 은총이다. 사람들이 모두 사심없이 기쁘게 웃어주는 웃음이다. 아브라함이 완전한 수 ‘백百’을 채우던 시점이었다.(창세 21장) 하느님의 일은 당신의 때가 차고 이르러서야 이루어지는 법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맺은 관계가 마침내 눈에 보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된다. 나로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아들로 연장되는 인생이 된다. 나만의 역사가 아니라 대대로 이어지는 역사가 열린다. 이기주의로 남을 수도 있는 나만을 위한 삶이 다른 생명을 위한 이타利他, 비로소 책임이 시작된다. 낳아서 아버지가 아니라 책임질 수 있어서 아버지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기쁨이다. 희망이다. 자기 생명의 연장이다. 아버지가 계속 살아야 할 이유이다. 아들에게 아버지는 신神이다. 표상이다. 기다림이다. 신뢰이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면서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존재이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아들은 아들대로 서로 진정한 아버지가 되어가면서 서로 다른 역사의 동기가 된다.
모리야
청천벽력 같은 시험이 찾아든다.(창세 22장) 인생은 늘 시험이고 시련이다. 믿음은 예기치 못한 시련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시련에 맞설 때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두려움은 마비와 정지, 질병으로 다가온다. 절망과 좌절이다. 하느님이 미워지다 못해 잔인하게까지 느껴진다. 그러나 두려움은 직시해야 한다. 물질 만능 뒤에 그것만이 아닌 무엇인가가 있음을 아는 슬기로움처럼 두려움 너머에 더 큰 무엇인가가 있다는 깨우침이다. 아브라함은 두려움과 온갖 생각 속에서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곳으로 길을 떠난다.” 그렇게 가야만 할 ‘사흘’을 다 간다. 소명의 길은 이루어질 길을 다 가야만 한다. 아들을 사를 장작을 아들 손에 지우고, 자기는 아들을 베고 사를 불과 칼을 손에 쥔 채 눈물 속에 아브라함은 산을 오른다. “우리는 불을 운반하는 사람들이야.” 하며 대재앙 후 남쪽으로 가는 소년과 남자처럼(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 길The Road, 문학동네, 2008) 아브라함과 이사악이 ‘황폐하고 고요하며 신조차 없는 듯 느껴지고 계절도 날짜도 알 수 없으며 색깔도 그 어느 움직임도 없는’ 산을 묵묵히 오른다. 번제물에 바칠 양을 묻는 아들의 물음에도 아브라함은 피눈물을 삼켜 속으로 울며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 하고 떨리는 믿음 속에서 “둘은 계속 함께 걸어갔다.”(창세 22,8) 아버지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과 함께 걷는 그 여정에서 아들 이사악이 자기 웃음만이 아니며 평범한 아이가 아니고, 유일한 이사악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처절하게 체험하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곳”에 다다라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 놓은 다음, 아들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는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곳에 이르는 것 자체도 이리 힘든데, 아들을 묶어 제단 위에 올리는 것은 더욱 못 할 짓이다. 하느님의 요청은 아비에게 자식을 죽이라는 요청처럼 상식을 넘고 불합리하다 못해 잔혹하다. 이성적이지 않다. 말 그대로 피와 눈물의 ‘희생犧牲’이다. 아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내가 낳은 아들이어도 내 아들이 아니며, 끝에는 자신을 죽여 온전히 하느님의 몫으로 돌려놓아야만 하는 동행이다. 누군가가 내가 생각하는 그가 아님을 알 때만 소유와 집착에서 이탈한다. 그렇게 이탈할 수 있을 때 나도 더는 예전의 내가 아니다. 더욱더 온전해진다. 충만한 아픔이다.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되고 우리의 축복이 된다.
「“할 일의 목록은 없었다. 그 자체로 섭리가 되는 날. 시간. 나중은 없다. 지금이 나중이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들, 너무 우아하고 아름다워 마음에 꼭 간직하고 있는 것들은 고통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남자는 잠든 소년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나한테는 네가 있는 거야.”(매카시)」 이렇게 아브라함은 아버지가 되었고, 하느님의 약속인 이사악은 아들이 되었으며, 이사악은 다른 아버지가 된다.
※참조: 아브라함(http://benjikim.com/?p=4142) / 춤추는 동행 (http://benjikim.com/?p=5747)
“아브라함과 이사악, 더 로드” 아버지와 아들의 마음이 느껴져 울컥….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읽는 감동적인 멋진 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