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 하지 말라’는 금지, ‘아니다’라거나 ‘없다, 없애다’라는 부정의 뜻이 담겨있는 글자가 ‘말 물勿’이다. 먼지를 터는 상황을 묘사할 때는 ‘몰’로 소리를 낸다. 따라서 분주奔走하게, 혹은 걱정스럽게 수선을 피우는 상황이기도 하다. 많이 쓰는 ‘물론이고 말고’ 할 때의 ‘물론勿論(논의의 여지가 없다)’이나 도나우 강변의 전설에서 이름 지어져 왕의 문장으로까지 사용되었다는 독일 이름 vergiss mich nicht(=Forget-me-not)를 옮길 때 말 그대로 옮겨 ‘물망초勿忘草(잊을 망忘, 말 물勿, 풀 초草)’라고 할 때도 이 글자를 쓴다.
이 ‘물勿’이라는 글자의 모양이나 뜻의 풀이는 다양하다. 장대 끝에 펄럭이는 깃을 달아서 어느 특정 지역을 나타내거나 들어가지 말라는 경계의 표시, 장대 끝에 깃의 폭을 서로 다르게 조정하여 매달아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알림, 혹은 깃털이나 날개의 모습, 심지어는 목이 없는 동물의 모양이라는 풀이, 勹 부분을 ‘칼 도刀’의 변형 또는 쟁기의 모습으로 보고, 나머지 두 점은 칼에 잘려 나간 부분이나 고기 같은 것을 자를 때 칼에 묻은 핏방울 혹은 쟁기질로 흙을 갈아엎을 때의 흙덩이 등이라는 풀이, 활줄이 진동하는 모습이라는 풀이 등등이 있다.
이 ‘물勿’이라는 글자 앞에 ‘쌀 미米’를 붙이면 ‘고운 가루 물粅’이 되고, 물을 뜻하는 ‘삼수변氵’을 붙이면 깊고 그윽하여 ‘아득할 물沕’이 되며, ‘뫼 산山’을 붙이면 ‘산 높을 물岉’이 되고, ‘입 구口’를 붙이면 발음이 약간 달라지면서 칼처럼 날카로운 입술을 가리키는 ‘입술 문吻’이 되며, ‘날 일日’을 옆이나 아래에 붙이면 ‘새벽 물/흘昒=曶’이 되고, ‘날 일日’을 위에 올려붙이면 ‘쉬울 이, 바꿀 역易’이라는 글자가 된다.
‘물勿’이라는 글자 위에 ‘대나무 죽竹’을 붙이면 제후를 봉할 때나 신하들이 임금 앞에 조아릴 때 상아, 옥, 나무 등으로 만들어 손에 드는 ‘홀 홀笏’이 되고, ‘마음 심心’을 밑에 붙이면 ‘갑자기 홀忽’이 되어서 ‘마음(心)에 두지 않다(勿)’라는 뜻이 되면서 ‘마음에 두지 않다→소홀疏忽히 하다→잊다→문득 (잊다)→갑자기’ 등의 뜻이 생긴다. 흔히 소홀히 대접한다는 ‘홀대忽待’ ‘소홀疏忽하다’ 또는 ‘홀연忽然히’ 할 때의 그 ‘홀’이다. 이 ‘갑자기 홀忽’ 옆에 ‘마음 심心(忄)’ 하나를 더 덧붙이면 ‘황홀할 홀惚’이라는 글자가 되면서 ‘황홀恍惚=慌惚(황홀할 황), 황홀경怳惚境(어슴프레할 황怳, 지경 경境-생각할 겨를이 없는 순간의 의미에서 마음을 빼앗겨 멍한 상태)’ 할 때의 글자가 되고, ‘물勿’에 ‘칼 도刂’를 붙이면 발음이 달라지면서 ‘목벨 문刎’자가 되어서 ‘칼(刂)로 목을 베다’는 뜻이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라고 말하면서 목(頸)이 베이는(刎) 한이 있어도 마음이 변하지 않고 사귀는 친한 사이(交)임을 강조한다는 ‘문경지교刎頸之交’에서도 이 글자를 쓴다.
‘물勿’이라는 글자에 ‘소 우牛’를 붙이면 ‘물건 물物’이라는 글자가 되는데, 이는 ‘희생犧牲으로 사용하는, 부정한 것이 없는(勿) 깨끗한 소(牛)’라는 뜻이다. 이것이 발전하여 나중에 ‘물건物件(물건 건件)’이란 말이 된다. 『제물(祭物)은 ‘제사(祭祀)에 소용되는 음식물(飮食物)’, 생물(生物)은 ‘살아(生) 있는 물건(物)’, 무생물(無生物)은 ‘살아(生) 있지 않은(無) 물건(物)’, 동물(動物)은 ‘움직이는(動) 물건(物)’, 식물(植物)은 ‘땅에 심겨(植) 있는 물건(物)’이다.(박홍균의 원리한자)』 ‘물건 물物’에서 ‘물勿’을 얼룩무늬라고 풀기도 한다. 즉 소(牛) 중에서도 얼룩무늬(勿)가 들어간 좋은 ‘물건’인 소라는 뜻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글자들의 변신과 뜻을 더해가는 과정은 인간의 삶이다.
살다 보면,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고, 가지 말아야 할 곳도 있으며, 넘지 말아야 할 선線도 있다. 없애야 할 것도 있고, 먼지를 털 듯이 털어버려야 할 것이 있으며, 정말 뭔가가 아닌 것들도 있다. 이런 것들에 소홀하면 어느 날 홀연히 찾아와 여긴지도 모르고 저긴지도 모르게 황홀경에 접하더라도 그것이 허상임을 눈치채지 못한다. 우리말 성경에서 “-하지 마라”를 담고 있는 구절을 검색하면 무려 266절이 뜬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한사코 못된 짓을 “하지 마라” 하신다. 하지 말아야 할 짓들을 하는 인간의 못된 짓은 사람과 만물이 애초에 하느님의 사랑에서 태어나 사랑받는 존재로 태어났음을 잊고, 상대방을, 서로를, 세상을, 심지어 하느님을 감히 ‘사용’하려 드는 데에 그 근본 뿌리가 있다. 제14대 달라이 라마taa-la’i bla-ma(1935~)께서도 사람이 사랑받기 위해 태어나고 물건은 사용하기 위해서 생겨났지만, 그것이 뒤바뀌면서 세상이 어지럽다 했다.(『People were created to be loved. Things were created to be used. The reason why the world is in chaos is because things are being loved and people are being used.(달라이 라마taa-la’i bla-ma)』(20180407 *이미지-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