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로 탐욕의 굳센 성을 깨자(해탐解貪)

베풀 줄 모르는 탐욕의 수레

「칠극」의 제3권 ‘해탐’(解貪)을 살펴볼 차례다. 해탐에서는 말 그대로 탐욕을 해체하는 방법을 얘기한다. 탐욕이란 죄악은 무엇이든 욕심 사납게 그러쥐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최창은 소서(小序)에서 열자(列子)의 한 단락을 인용하는 것으로 서두를 열었다. 어떤 사람이 시장에서 대낮에 황금을 훔치다가 잡혔다. 왜 그랬느냐고 묻자 그의 대답이 이랬다. “그때 제 눈에는 오직 황금만 보이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탐욕은 이렇게 사람을 눈멀게 한다. 비탈길을 내려오는 수레처럼 치닫다가 엎어진 뒤에야 비로소 끝이 난다.

오력은 ‘칠극송’에서 탐욕에 대해 설명하면서, 병 속에 있는 물건을 꺼내려고 손을 집어넣었다가 붙잡힌 어리석은 원숭이의 이야기를 꺼냈다. 쥔 물건을 놓으면 충분히 병에서 손을 뺄 수 있는데, 원숭이는 끝내 물건을 놓지 않아 병에서 손을 빼지 못한다. 저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욕망이 일체의 다른 판단을 멈추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탐욕은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 그것은 우선 손에 꽉 쥔 것을 놓는 데서 시작한다. 여기에는 훈련과 연습이 필요하다. 판토하는 첫 단락에서 사람의 정 가운데 가장 먼저 생겨나서 가장 늦게 식는 것이 탐욕이라고 보았다. 어린아이들은 좋은 물건을 보면 가지려 한다. 늙은 사람도 다른 감정이 시들해져도 탐욕만큼은 나이와 함께 점점 더 깊어져만 간다.

탐욕은 저 혼자만 가지려는 욕심이기 때문에 남에게 베푸는 것은 질색이라 필연적으로 인색함을 동반한다. 판토하는 재미있는 비유를 했다. 인색함이라는 수레에는 네 개의 바퀴가 있는데, 그 네 개는 바로 나약한 마음과 잔혹한 학대, 천주를 가벼이 여김과 죽을 때를 잊는 것이다. 그 수레는 누가 끄는가? 빼앗고 내치거나 베풀 줄 모르는 마음이 수레를 끄는 두 마리의 소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수레를 모는 사람은 탐욕이다. 이 네 개의 바퀴와 두 마리 소를 채찍질해 열심히 수레를 몰아 이들이 가고자 하는 곳은 어디인가? 귀신의 땅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탐욕스러운 자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던졌다. “너는 아내와 자식, 직업과 옷과 신발이 아름답기를 원하면서, 정작 아름다운 마음과 맑은 마음은 원하지도 지니려고도 하지 않는다. 남들이 너를 천하게 보지 않기를 바라면서 네 마음을 네 신발 보듯 하면 되겠는가?”

이런 말도 있다. “부자는 대인을 만나면 해코지당할까 염려하고, 소인을 보면 제 것을 훔쳐 갈까 걱정한다. 쫓아오지 않는데도 항상 달아나 숨고, 핍박함이 없어도 놀라 두려워하는 소리가 언제나 귀에 들린다. 그런데도 지금 사람들은 모두 다 나를 힘들게 만드는 부를 부러워하고, 나를 편안하게 해 주는 가난을 미워한다. 대체 왜 그러는 걸까?”

그레고리오 성인이 인색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남의 재물을 보고서 빼앗을 수 있으면 빼앗고, 빼앗을 수 없으면 욕심을 낸다. 탐욕으로 인해 날마다 남을 속이고, 날마다 남을 저주하며, 날마다 남에게서 훔치니, 이것은 부유함의 증거인가? 가난함의 증거인가?”

더 갖고 다 가지면 기뻐야 할 텐데 점점 더 불안해지고 불편해진다. 이렇듯 탐욕은 인간의 마음속에 지옥을 심는다.

탐욕은 거짓 즐거움을 주고 진짜 근심을 남긴다

재물은 가시와 같다. 찔리면 아프고 제거하지 않으면 더 아프고 제거할 때는 더더욱 아프다. 재물을 모으려면 험하고 힘든 일을 해야 하니 마음이 불안하고, 얻고 나서는 지키기 위해 더 근심하며, 잃고 나면 상심이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재물은 얻을 때는 거짓 즐거움이 생기고, 잃을 때는 진짜 근심을 남긴다”고 말한다.

재물을 쌓아 기쁜 것은 잠깐뿐이고, 그 대가는 불안과 근심과 상심이니, 그 즐거움이 거짓 즐거움이요 진짜 근심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이런 설명을 보탰다. “재물을 꾀하는 사람은 모을 때는 몹시 힘들고, 얻을 때는 더욱 근심스러우며, 잃었을 때는 몹시 아프다. 하물며 재물을 모으기에 힘쓰면서 의로움을 범하지 않는 자는 드물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의 참된 행복이 세상의 부유함 속에는 없다고 단정했다. 참된 복은 마음에 지녀 간직해야 하는데, 재물은 흩어 쓰기만 하니 결코 참된 복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재물은 거짓된 벗과 같다. 편안할 때는 나를 따르다가, 위태로워지면 나를 버린다.”라거나 “세간의 재물은 나의 재물이 아니다. 다만 내 손을 거쳐 가는 것일 뿐이다. 감춰 두고 쓰지 않으면 바로 다른 사람의 것이 되고 마니, 어찌 나의 재물이겠는가?”와 같은 말들이 이어진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했다. “재물을 끊는 것은 얻는 것일 뿐이다. 만약 재물을 모으는 일에 마음이 빠져있다면 자신은 자기 자신이 아니다.” 「칠극」에는 또 이런 말도 보인다. “죽을 때가 되어 재물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덕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일 뿐이다. 자기가 재물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자기를 버리는 것이다.” 모르지 않으면서 벗어나지를 못하니 탐욕의 독이 이렇게 깊다.

베풂만이 탐욕을 지운다

탐욕을 마음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힘과 지혜는 베풂의 덕에서 나온다. 세네카가 재물에 욕심부리는 한 사람을 경계하며 말했다. “네가 구하는 것을 얻고자 한다면, 어찌 구함이 없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가? 구함이 없는 것이 구함을 얻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구함이 없음은 자기에게 있는 것을 얻음이요, 구함을 얻음은 남에게 있는 것을 얻음이니, 어느 것이 쉽겠는가?”

지혜의 임금 솔로몬의 기도는 이랬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 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잠언 30,8-9) 또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 기도한 대로 이루어 주마 하시자 이렇게 기도했다.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어느 누가 이렇게 큰 당신 백성을 통치할 수 있겠습니까?”(1열왕 3.9)

이 기도를 들으신 하느님께서는 크게 기뻐하며 말씀하셨다. “자신을 위해 장수를 청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 부를 청하지도 않고, 네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그 대신 이처럼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자,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 너 같은 사람은 네앞에도 없었고, 너 같은 사람은 네 뒤에도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다. 또한 나는 네가 청하지 않은 것, 곧 부와 명예도 너에게 준다”(11-13절)

베풂 중에 가장 큰 것은 하느님을 위해 가난한 이를 보살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루카 6,38), 또 “빈곤한 이의 울부짖음에 귀를 막는 자는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대답을 얻지 못한다.”(잠언 21,13)고도 했다.

가난을 큰 재앙이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은 부가 큰 행운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안다. 군자는 재물에 대해 부러워하지 않고 다만 순리에 따른다. 얻더라도 버리지는 않고 그저 가볍게 여긴다. 어떤 인색한 부자가 변고를 당해 빈털터리가 되었다. 세네카에게 하소연하자 세네카가 그에게 말했다. “만약 당신이 재물을 잃었다면 당신의 탐욕도 함께 잃은 것이니 큰 다행입니다. 탐욕을 잃지 않았더라도 재물을 잃은 것은 탐욕의 매개를 없앤 것이니 다행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다음 말은 마음에 와서 콕 박힌다. “재물이 많다고 스스로 뽐내는 사람은 몸에 종기를 앓으면서 내가 얻은 종기의 처방이 매우 많다며 자랑하는 것이나 한가지다. 종기가 없으면 더욱 편안하지 않겠는가?”

만족을 모르고, 자꾸 남과 비교하며, 하나라도 더 쥐고 놓지 않으려는 탐욕이 마음속에 지옥을 만든다. 탐욕은 인색을 낳고, 인색은 베풂을 지워, 세상은 갈수록 강퍅해지고 가시가 돋쳐 살기가 넘친다. 그 길의 끝에는 지옥뿐, 아무것도 없다. 꽉 쥔 것을 내려놓고, 채우려 들지 않고 비울 때 고이는 기쁨이 있다.(정민, 경향잡지, 2023년 5월호, 제115권, 통권 18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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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화·물욕·인색

3.1 …탐욕과 인색-황금이 나는 땅은 가장 척박해서 오곡이 자라는 밭이 될 수 없다.… (…貪欲·吝嗇-生金之地最瘠, 不能爲五穀之田…)

3.2 인색함은 세상 사람들이 타는 수레다. ① 나약한 마음과 ② 잔혹한 학대, ③ 천주를 가벼이 여김과 ④ 죽을 때를 잊음을 네 바퀴로 삼는다. ① 빼앗고 내침, ② 베풀 줄 모름이 수레를 끄는 두 마리 소다. 탐욕은 수레를 모는 사람이다. 이 수레를 타고서 어디로 갈까? 귀신의 땅으로 돌아간다. (吝者, 世人所乘之車也. 心弱, 酷虐, 輕天主, 忘死候, 四輪也, 奪攘, 不施舍, 兩牛也. 貪焚, 御夫也, 乘此何歸? 歸於鬼域.)

3.3 굶주림에서는 간사함이 나오지 않고, 군색함에서는 음란이 생겨나지 않는다. 가난 때문에 죄를 받는 경우는 아직 보지 못했다. 배부르면 간사함을 생각하고, 넉넉하면 음란함을 저지른다.… (饑不生姦, 窘不生淫, 因貧而受罪, 未見焉. 飽思姦, 豐恣淫.…)

3.6 부자의 근심은 벗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가 벗이 없는 것은 어째서일까? 꿀이 있는 곳에 벌이 모이고, 썩은 고기가 있으면 이리가 몰려든다. 누린내 나는 고기가 있으면 개미가 꼬이고, 곡식이 있으면 쥐가 달려들며, 부유함이 있으면 벗이 모여든다. 너의 부가 남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니, 너를 사랑하기 때문일까, 너의 재물을 사랑하기 때문인가? 알 수가 없다. 알 수 없는 것과 있지 않은 것이 무슨 차이란 말인가? (富人之患, 無友其一. 其無友何也? 蜜在蜂聚, 胔在狼聚, 羶在蟻聚, 穀在鼠聚, 富在友聚. 爾富見愛於人, 其爲愛爾乎, 其爲愛爾財乎? 不可知也. 不可知與無有, 何異哉?)

3.7 …훌륭한 말과 아름다운 생각은 선행의 씨앗이다. 이것을 재물을 좋아하는 마음에다 뿌리면, 재물을 향하는 생각이 또한 즉시 이를 눌러버려서 더 자라나지 못하게 만든다. 가시는 날카로운 침으로 몸을 찌르고, 재물은 악한 생각으로 마음을 찌른다. 사람이 가시나무가 자라는 땅에 들어가면 해를 입지 않음이 드물다. 너의 몸을 해칠 뿐 아니라, 반드시 너의 옷을 잡아당길 것이다. (…嘉言美意, 善行之種也. 播之嗜財之心, 財念亦即壓之, 不使滋殖焉. 夫棘以銳刺刺身, 財以惡念刺心. 人入棘地, 鮮不受害. 非害爾身, 必搏爾衣.)

부자와 사귀면 내 집이야 낚아채지 못하더라도 틀림없이 내 밭을 빼앗아가서 손해를 입지 않음이 없다. 가시는 손을 펴서 취하면 다치지 않지만, 손바닥을 구부린 채 이를 쥐면 다치게 된다. 쥐는 것이 굳셀수록 더 심하게 다친다. 재물이라는 것은 손을 펴서 흩어 베풀면 해로움은 없고 유익함이 있다. 다만 굳세게 붙잡아서 놓지 않으면 유익함은 없고 그 해로움을 받게 된다. (交於富者, 非攫我室, 必奪我田, 未嘗不受損焉, 夫棘申手取之, 不傷也. 曲常握之, 乃傷矣, 据愈固, 傷亦愈深. 財者, 申手散施, 無害有益. 惟固握不捨, 乃無其益而受其害焉.)

독충은 흔히 가시덤불에 숨어서 가시에 기대 성으로 삼는다. 여러 가지 더러운 죄악은 탐욕스러운 마음에 함께 모이고, 또한 부에 기대 그것으로 성을 삼는다.… (夫毒螫多匿於棘域, 倚棘爲城. 諸凡罪汚, 俱聚於貪心, 亦倚當爲城.…)

…재물을 꾀하는 사람은 모을 때는 몹시 힘들고, 얻을 때는 더욱 근심스러우며, 잃을 때는 몹시 아프다. 하물며 재물을 모으기에 힘쓰면서 의로움을 범하지 않는 자는 드물다.(성 베르나르도)… (…謀財者, 聚時甚勞, 得時甚憂, 失時甚痛. 矧務聚財而不犯義者鮮焉.-聖 百爾納…)

…사특한 마귀는 재물을 끼고서 사람을 희롱함이 많다. 그 아름다운 빛깔은 드러내고 그 날카로운 가시는 감춘다.… (…邪魔挾財以戲人多矣. 顯其美色, 而匿其利刺.…)

3.10 …세상의 부는 길이 몹시 좁기 때문에, 마치 두 사람이 굴속에서 만났을 때 저쪽이 물러나지 않으면 내가 나아갈 수 없는 것과 같다. 세상의 부는 가장 가난하다. 한 물건을 두 사람이 교대로 얻으려 하는데, 이 사람이 없어야만 내가 가질 수가 있고, 많은 사람이 가난해지지 않고는 내가 부자가 될 수 없는 것과 한가지이다. 오직 덕만이 가장 넉넉하다. 가지려 하는 자가 다 가져도 줄어들지 않는다. 그 길은 가장 넓어서, 가려는 자를 다 받아들여도 서로 부딪치는 법이 없다.(참조. 마태 7,13-14 루카 13,24) (…世富之路甚狹, 如兩人相遇穴中, 非彼退, 我不得進, 世富最貧, 如一物而兩人交欲得之, 非是人無, 我不得有. 非多人貧, 我不得富. 惟德最富, 欲取者俱取而不減. 其路最寬, 欲行者俱容而不相觸.)

3.13 …두 사람이 같이 가는데 개 한 마리가 따라간다고 하자. 함께 가고 있을 때는 누가 개 주인인지 알기가 어렵다. 헤어진 뒤에 따라가는 것을 살펴보면 그제야 알게 된다. 네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세상과 함께 가므로 세상의 재물 또한 너를 따른다. 그래서 잘못 알아 너의 재물이라고 말한다. 세상을 떠날 때에 재물은 세상을 따르지 너를 따르지 않으니, 어찌 너의 재물이겠느냐? 바로 세상의 재물일 뿐이다. (…二人同行, 一犬從之, 當同行時, 孰爲犬主, 難識也. 視別後所從, 乃識焉. 爾居世之時, 與世同行, 世財亦從爾, 故誤謂爾財也. 別世之時, 財從世不從爾, 豈爾財? 正世財耳.)

3.18 사람으로 하여금 먹으면 먹을수록 배가 더 늘어나게 한다면 어찌 능히 배가 부르겠는가? 욕심 많고 인색한 사람은 새로 돈이 생기면 바로 새 바구니를 만들고, 새로 곡식이 생기면 즉시 새 창고를 짓는다. 앞서는 돈과 곡식이 있어도 바구니나 창고에 넣을 수 없는 것을 근심하더니, 나중에는 바구니와 창고는 있는데 돈과 곡식을 채울 수 없음을 근심한다. 앞서는 물건을 담아둘 장소를 생각하다가, 나중에는 그곳을 가득 채울 물건을 생각하니, 한 가지 탐욕이 끝나지 않았는데 한 가지 탐욕이 이를 잇는다. 그래서 탐욕스러운 마음은 큰길과 같다. 오가는 발걸음이 서로 이어져 끊이지 않고, 조용할 때가 없으니 말이다. (使人愈食腹愈寬, 何能飽乎? 食吝者有新金, 旋制新篇也. 有新穀, 旋造新廩也. 先有金穀, 患無篇廩容之, 後有篇廩, 患無金穀實之, 先思容物之所, 後思實所之物, 一貪未終, 一貪續之, 故貪心如大道矣. 來往之跡, 相繼不絶, 無時可靜.)

3.20 자기가 얻은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큰 부자고 참 부자다. 족함을 알지 못하는 자는 큰 가난뱅이고 진짜 가난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탐욕스럽고 인색한 사람은 부자 같아도 실제로는 부자가 아니다. 성 그레고리오가 인색한 사람에게 말했다. “당신은 남의 재물을 보고서 빼앗을 수 있으면 빼앗고, 빼앗을 수 없으면 욕심을 낸다. 탐욕으로 인해 날마다 남을 속이고, 날마다 남을 저주하며, 날마다 남에게서 훔치니, 이것은 부유함의 증거인가, 가난함의 증거인가? 궤가 비고 찬 것을 두고는 가난하다거나 부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람이 텅 비었는지 알찬지로 가난하고 부유하다고 말한다. 당신의 마음이 손과 함께 비어 있다면, 당신의 궤짝이 황금 같은 물건으로 가득 채워져 있더라도 나는 당신을 부자라고 말하지 않겠다.” (以其所得知足者, 大富也, 實富也. 不知足者, 大貧也, 實貧也. 故貪吝者, 如富焉, 未嘗富矣. 聖厄勒卧略謂 吝者 曰: “爾見財, 能奪則奪, 不能奪則貪. 因貪也, 日欺人, 日詛人, 日竊人, 此徵富耶, 微貧耶? 櫝虛實, 不開貧富. 人虛實, 謂貧富. 爾心與手俱虛, 即爾櫝實于金物, 我不謂爾富也.”)

3.22 …세네카가 재물에 욕심을 부리는 한 사람을 경계하며 말했다. “네가 구하는 것을 얻고자 한다면, 어찌 구함이 없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가? 구함이 없는 것이 구함을 얻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구함이 없음은 자기에게 있는 것을 얻음이요, 구함을 얻음은 남에게 있는 것을 얻음이니, 어느 것이 쉽겠는가?” (…色搦加 箴一貪財者 曰: “爾願得所求, 曷不願得無求乎? 無求不勝得求乎? 無求得在己, 得求得在人. 孰易乎?”)

3.24 …사람이 재물을 부리는 것이 이치고, 재물이 사람을 부리는 것은 탐욕과 인색이다. 그래서 재물에 인색한 자를 재물에 걸려들었다고 말하니, 이는 감옥에 갇힌 자가 족쇄를 차게 되는 것과 같다. 실제로 직접 족쇄를 찬 것이 아니라 해도 족쇄에 걸려든 것이나 같다.… (…人之財, 理也. 財之人, 貪吝也. 故言吝財者獲財, 猶言囚繫者獲桎梏, 實非自獲桎梏, 正獲於桎梏矣.…)

…탐욕과 인색의 마음은 나를 가장 귀찮게 부리면서도 나를 가장 박하게 대접한다. 내 음식과 내 의복마저도 온통 가져가서 제멋대로 한다. (…濁貪吝之情, 役我最煩, 視我最薄, 并我食我衣, 悉將靳之.)

3.31 …사람의 성품은 나약하고 물러터져서 늘 악에 노출되는데, 재물의 편리함을 얻으면 정욕이 따라서 바뀌고 온갖 악이 쉬 이루어짐을 알기 때문이다.… (…知人性脆弱, 恒垂於惡, 得財之便, 情欲易遂, 諸惡易成.…)

3.32 …“속이는 말을 제 마음에서 멀어지게 하시고, 가난함과 부유함을 모두 내려주시려 한다면 알맞을 정도만 내려주시면 좋겠습니다.부가 지나친 사람은 당신을 잊고서 누가 나의 주인이냐고 말하게 될까 봐 염려스럽고, 너무 가난한 사람은 또 도둑질과 거짓 맹세에 빠져들까 걱정스럽기 때문입니다.”(참조. 잠언 30,7-9) (…“誑言違之我心, 貧富咸欲見賜, 賜所足, 足矣. 富過者, 恐忘爾而云誰爲我主. 貧過者, 又恐流入盜竊証誓故也.”)

3.33 가난이 큰 재앙이 아님을 아는 사람은 부가 큰 행운이 아님을 안다. 이 같은 사람은 부자가 되게 할 만하다. 군자는 재물에 대해 부러워하지 않고 다만 순리에 따른다. 얻더라도 버리지는 않고 그저 가볍게 여긴다. (知貧非大災者, 則知富非大幸也. 若此人, 可令富矣. 君子於財不羡, 惟隨順之, 得之不廢, 惟輕之.)

3.35 한 사람이 부유하지만 인색했는데, 사변을 만나 그 재물을 모두 잃고 세네카에게 고하니, 그가 말했다. “만약 당신이 재물을 잃었다면 당신의 탐욕도 함께 잃은 것이니 큰 다행입니다. 탐욕을 잃지 않았더라도 재물을 잃은 것은 탐욕의 매개를 없앤 것이니 또한 다행입니다.” (一人富而吝, 遇事變, 盡亡其財, 以告色搦加, 曰: “若失爾財, 兼失爾貪, 大幸矣. 即不失貪, 失財, 去貪之媒, 亦幸也.”)

3.37 …성 아우구스티노가 말했다. “재물이 많다고 스스로 뽐내는 사람은몸에 종기를 앓으면서 내가 얻은 종기의 처방이 매우 많다며 자랑하는 것이나 한가지다. 종기가 없으면 더욱 편안하지 않겠는가?”… (…聖亞吾斯丁 曰: “財厚自伐者, 猶身病痬, 而云我所得痬方甚多, 以自伐也, 無痬, 不更安乎?”…)

3.41 재화의 아름다움에 한 가지가 있으니, 사람이 품고 있는 선과 악을 환하게 밝혀 줄 수 있다는 점이다. (貨財之美有一端, 能顯明人所懷善惡.)

베풂의 덕施捨德

3.49 성 예로니모逸羅尼가 말했다. “베풀어 주기를 기뻐하면서 죽음을 근심하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 남이 네게 구할 때, 네가 줄 수 있다면 주고, 줄 수 없다면 그 까닭을 알려주어라. 그렇게 하면 주지 않더라도 그 사람이 성내지 않을 것이다. 교활한 꾀를 피워 거절해서는 안 된다.”… (聖 逸羅尼 曰: “喜捨施而以患死者, 未之見也. 人求爾, 爾能予則予, 不能予, 告之以其故. 即不予, 人不恚矣. 若設巧計拒之, 不可也.”…)

…어떤 사람이 적은 물건을 구하면 왕은 후하게 주었다. 그 사람이 사양하니, 왕이 말했다. “나는 네가 구하는 바를 살피지 않고, 다만 내가 마땅히 줄 바를 살핀다.”

어떤 이가 말했다. “얻은 것을 모두 남에게 주시면, 자기에게는 어떤 물건이 남습니까?” 왕이 말했다. “남에게 주는 즐거움이 남는다.”… (…或求以少物, 王厚賜之. 是人辭, 王曰: “我不視爾所求, 惟視我所當予.” 或問曰: “所得盡予人, 己所留何物乎?” 王曰: “留予人之樂耳.”…)

3.52 …“여기 쓸모 있는 사람은 내게 그가 필요하고, 여기 쓸모없는 사람은 그들에게 내가 필요하다.”… (…“此有用者, 我須彼․ 此無用者, 彼須我.”…)

3.53 남에게 베풀 때는 두 가지를 조심해야 한다. 하나는 굳이 ① 억지로 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施捨二戒, 一戒勉強.…)

세네카도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남이 어떤 물건을 주는지는 따지지 않고, 오직 어떤 마음으로 주는지를 살핀다.… (色搦加亦曰: “吾不視人以何物與, 惟視以何心與.…)

3.54 두 번째로 경계할 것은 ② 구하는 것을 더디 주는 것이다. 속담에서는 “빨리 주는 것은 두 배로 주는 것이다”라고 했다. 사람이 원하는 바가 있을 때 오래오래 매달려 바랐는데도 주지 않는 것보다 괴로운 것이 없다. 그래서 기다리게 하는 것은 그 자리에서 거절하는 것만 못하다. 그 자리에서 거절하면 속이는 것이 적다. 사람을 죽이는 것에 비유하면, 점차 조금씩 형벌을 더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잔혹한 것이다. 하물며 더디게 베푸는 자는 오래되면 혹 아까워하기까지 한다. 사람을 욕보이고 업신여김이 은혜보다 더 깊다.… (二戒需遲, 諺曰: “速與者, 兩與.” 人有所願, 莫苦乎久久懸望而弗得焉, 故與其須, 不如即拒, 即拒, 欺微也. 譬戮人者, 以漸加刑, 似愛而實酷, 況遲施者, 久或靳之, 辱慢入人, 深於恩惠.…)

3.55 …은혜를 베풀 때 네 역량을 넘어서면 안 된다. 벗을 자기처럼 보살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짊을 베푸는 차례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 까닭에 가난한 이에게 주는 것이 나를 가난하게 해서는 안 되고, 환난을 구하려다가 나를 환난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되니, 이렇게 해야 잘 주는 것이다. (…所施恩, 勿過爾量. 視友如足矣. 列仁之序, 從己身始, 故予貧不使我貧, 救患不使我入患, 乃善予也.)

3.56 베풂이란, 한 사람을 보태주려고 한 사람을 손해 보지 않게 해야 잘 베푼 것이다. 진실로 저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면서 이 사람을 보태준다면 손해와 이익이 반반이니, 잘 베풀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청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베푸는 것을 ‘아름다운 은혜’라고 말한다. 만약 나에게 의롭지 않은 일로 베풀어달라고 청할 경우, 이를 일러 ‘부드러운 원수’라고 한다. 내가 저 사람에게 베풀었을 때 그가 반드시 은혜를 믿고 악을 자행할 것을 안다면, 베풀어서는 안 된다. 그의 죄악이 내게까지 미칠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施者, 益一人, 不損一人, 善施也. 苟損彼益此, 損益半, 可謂善施哉? 施不待求, 謂之美恩,如求我以非義而施之, 謂之柔讐, 知我施彼, 彼必侍恩以恣惡, 勿施之. 恐其罪惡及我故也.)

3.57 잊어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남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것이다. 잊어서는 안 될 것은 남에게 은혜를 입은 것이다. 네가 베풀어 주었는데 상대가 감사할 줄 모르더라도 성을 내서는 안 된다. 성내지 않아야 혹 감화되어 고치게 할 수가 있다. 성을 내면 더더욱 상대방을 미워하게 될 뿐이다. 한 번 베풀어 주어 반응하지 않을 경우, 두 번 베풀어 주면 틀림없이 반응할 것이다. 두 번 베풀었는데도 잊어버린다면 세 번 베풀어 주어라. 혹 앞서 두 차례 베푼 것까지 돌이켜 생각하게 될 것이다. (有不可不忘, 施恩於人者是. 有不可忘, 受恩於人者是, 爾施不知謝, 勿怒也. 不怒, 或可化令改矣. 怒之, 則令增惡彼人也. 不應一施, 必應再施, 再施亦忘, 三施之, 或并前二, 能追憶焉.)

베풀 줄 모르는 탐욕의 수레

「칠극」의 제3권 ‘해탐’(解貪)을 살펴볼 차례다. 해탐에서는 말 그대로 탐욕을 해체하는 방법을 얘기한다. 탐욕이란 죄악은 무엇이든 욕심 사납게 그러쥐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최창은 소서(小序)에서 열자(列子)의 한 단락을 인용하는 것으로 서두를 열었다. 어떤 사람이 시장에서 대낮에 황금을 훔치다가 잡혔다. 왜 그랬느냐고 묻자 그의 대답이 이랬다. “그때 제 눈에는 오직 황금만 보이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탐욕은 이렇게 사람을 눈멀게 한다. 비탈길을 내려오는 수레처럼 치닫다가 엎어진 뒤에야 비로소 끝이 난다.

오력은 ‘칠극송’에서 탐욕에 대해 설명하면서, 병 속에 있는 물건을 꺼내려고 손을 집어넣었다가 붙잡힌 어리석은 원숭이의 이야기를 꺼냈다. 쥔 물건을 놓으면 충분히 병에서 손을 뺄 수 있는데, 원숭이는 끝내 물건을 놓지 않아 병에서 손을 빼지 못한다. 저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욕망이 일체의 다른 판단을 멈추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탐욕은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 그것은 우선 손에 꽉 쥔 것을 놓는 데서 시작한다. 여기에는 훈련과 연습이 필요하다. 판토하는 첫 단락에서 사람의 정 가운데 가장 먼저 생겨나서 가장 늦게 식는 것이 탐욕이라고 보았다. 어린아이들은 좋은 물건을 보면 가지려 한다. 늙은 사람도 다른 감정이 시들해져도 탐욕만큼은 나이와 함께 점점 더 깊어져만 간다.

탐욕은 저 혼자만 가지려는 욕심이기 때문에 남에게 베푸는 것은 질색이라 필연적으로 인색함을 동반한다. 판토하는 재미있는 비유를 했다. 인색함이라는 수레에는 네 개의 바퀴가 있는데, 그 네 개는 바로 나약한 마음과 잔혹한 학대, 천주를 가벼이 여김과 죽을 때를 잊는 것이다. 그 수레는 누가 끄는가? 빼앗고 내치거나 베풀 줄 모르는 마음이 수레를 끄는 두 마리의 소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수레를 모는 사람은 탐욕이다. 이 네 개의 바퀴와 두 마리 소를 채찍질해 열심히 수레를 몰아 이들이 가고자 하는 곳은 어디인가? 귀신의 땅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탐욕스러운 자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던졌다. “너는 아내와 자식, 직업과 옷과 신발이 아름답기를 원하면서, 정작 아름다운 마음과 맑은 마음은 원하지도 지니려고도 하지 않는다. 남들이 너를 천하게 보지 않기를 바라면서 네 마음을 네 신발 보듯 하면 되겠는가?”

이런 말도 있다. “부자는 대인을 만나면 해코지당할까 염려하고, 소인을 보면 제 것을 훔쳐 갈까 걱정한다. 쫓아오지 않는데도 항상 달아나 숨고, 핍박함이 없어도 놀라 두려워하는 소리가 언제나 귀에 들린다. 그런데도 지금 사람들은 모두 다 나를 힘들게 만드는 부를 부러워하고, 나를 편안하게 해 주는 가난을 미워한다. 대체 왜 그러는 걸까?”

그레고리오 성인이 인색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남의 재물을 보고서 빼앗을 수 있으면 빼앗고, 빼앗을 수 없으면 욕심을 낸다. 탐욕으로 인해 날마다 남을 속이고, 날마다 남을 저주하며, 날마다 남에게서 훔치니, 이것은 부유함의 증거인가? 가난함의 증거인가?”

더 갖고 다 가지면 기뻐야 할 텐데 점점 더 불안해지고 불편해진다. 이렇듯 탐욕은 인간의 마음속에 지옥을 심는다.

탐욕은 거짓 즐거움을 주고 진짜 근심을 남긴다

재물은 가시와 같다. 찔리면 아프고 제거하지 않으면 더 아프고 제거할 때는 더더욱 아프다. 재물을 모으려면 험하고 힘든 일을 해야 하니 마음이 불안하고, 얻고 나서는 지키기 위해 더 근심하며, 잃고 나면 상심이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재물은 얻을 때는 거짓 즐거움이 생기고, 잃을 때는 진짜 근심을 남긴다”고 말한다.

재물을 쌓아 기쁜 것은 잠깐뿐이고, 그 대가는 불안과 근심과 상심이니, 그 즐거움이 거짓 즐거움이요 진짜 근심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이런 설명을 보탰다. “재물을 꾀하는 사람은 모을 때는 몹시 힘들고, 얻을 때는 더욱 근심스러우며, 잃었을 때는 몹시 아프다. 하물며 재물을 모으기에 힘쓰면서 의로움을 범하지 않는 자는 드물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의 참된 행복이 세상의 부유함 속에는 없다고 단정했다. 참된 복은 마음에 지녀 간직해야 하는데, 재물은 흩어 쓰기만 하니 결코 참된 복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재물은 거짓된 벗과 같다. 편안할 때는 나를 따르다가, 위태로워지면 나를 버린다.”라거나 “세간의 재물은 나의 재물이 아니다. 다만 내 손을 거쳐 가는 것일 뿐이다. 감춰 두고 쓰지 않으면 바로 다른 사람의 것이 되고 마니, 어찌 나의 재물이겠는가?”와 같은 말들이 이어진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했다. “재물을 끊는 것은 얻는 것일 뿐이다. 만약 재물을 모으는 일에 마음이 빠져있다면 자신은 자기 자신이 아니다.” 「칠극」에는 또 이런 말도 보인다. “죽을 때가 되어 재물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덕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일 뿐이다. 자기가 재물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자기를 버리는 것이다.” 모르지 않으면서 벗어나지를 못하니 탐욕의 독이 이렇게 깊다.

베풂만이 탐욕을 지운다

탐욕을 마음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힘과 지혜는 베풂의 덕에서 나온다. 세네카가 재물에 욕심부리는 한 사람을 경계하며 말했다. “네가 구하는 것을 얻고자 한다면, 어찌 구함이 없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가? 구함이 없는 것이 구함을 얻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구함이 없음은 자기에게 있는 것을 얻음이요, 구함을 얻음은 남에게 있는 것을 얻음이니, 어느 것이 쉽겠는가?”

지혜의 임금 솔로몬의 기도는 이랬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 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잠언 30,8-9) 또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 기도한 대로 이루어 주마 하시자 이렇게 기도했다.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어느 누가 이렇게 큰 당신 백성을 통치할 수 있겠습니까?”(1열왕 3.9)

이 기도를 들으신 하느님께서는 크게 기뻐하며 말씀하셨다. “자신을 위해 장수를 청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 부를 청하지도 않고, 네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그 대신 이처럼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자,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 너 같은 사람은 네앞에도 없었고, 너 같은 사람은 네 뒤에도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다. 또한 나는 네가 청하지 않은 것, 곧 부와 명예도 너에게 준다”(11-13절)

베풂 중에 가장 큰 것은 하느님을 위해 가난한 이를 보살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루카 6,38), 또 “빈곤한 이의 울부짖음에 귀를 막는 자는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대답을 얻지 못한다.”(잠언 21,13)고도 했다.

가난을 큰 재앙이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은 부가 큰 행운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안다. 군자는 재물에 대해 부러워하지 않고 다만 순리에 따른다. 얻더라도 버리지는 않고 그저 가볍게 여긴다. 어떤 인색한 부자가 변고를 당해 빈털터리가 되었다. 세네카에게 하소연하자 세네카가 그에게 말했다. “만약 당신이 재물을 잃었다면 당신의 탐욕도 함께 잃은 것이니 큰 다행입니다. 탐욕을 잃지 않았더라도 재물을 잃은 것은 탐욕의 매개를 없앤 것이니 다행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다음 말은 마음에 와서 콕 박힌다. “재물이 많다고 스스로 뽐내는 사람은 몸에 종기를 앓으면서 내가 얻은 종기의 처방이 매우 많다며 자랑하는 것이나 한가지다. 종기가 없으면 더욱 편안하지 않겠는가?”

만족을 모르고, 자꾸 남과 비교하며, 하나라도 더 쥐고 놓지 않으려는 탐욕이 마음속에 지옥을 만든다. 탐욕은 인색을 낳고, 인색은 베풂을 지워, 세상은 갈수록 강퍅해지고 가시가 돋쳐 살기가 넘친다. 그 길의 끝에는 지옥뿐, 아무것도 없다. 꽉 쥔 것을 내려놓고, 채우려 들지 않고 비울 때 고이는 기쁨이 있다.(정민, 경향잡지, 2023년 5월호, 제115권, 통권 18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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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화·물욕·인색

3.1 …탐욕과 인색-황금이 나는 땅은 가장 척박해서 오곡이 자라는 밭이 될 수 없다.… (…貪欲·吝嗇-生金之地最瘠, 不能爲五穀之田…)

3.2 인색함은 세상 사람들이 타는 수레다. ① 나약한 마음과 ② 잔혹한 학대, ③ 천주를 가벼이 여김과 ④ 죽을 때를 잊음을 네 바퀴로 삼는다. ① 빼앗고 내침, ② 베풀 줄 모름이 수레를 끄는 두 마리 소다. 탐욕은 수레를 모는 사람이다. 이 수레를 타고서 어디로 갈까? 귀신의 땅으로 돌아간다. (吝者, 世人所乘之車也. 心弱, 酷虐, 輕天主, 忘死候, 四輪也, 奪攘, 不施舍, 兩牛也. 貪焚, 御夫也, 乘此何歸? 歸於鬼域.)

3.3 굶주림에서는 간사함이 나오지 않고, 군색함에서는 음란이 생겨나지 않는다. 가난 때문에 죄를 받는 경우는 아직 보지 못했다. 배부르면 간사함을 생각하고, 넉넉하면 음란함을 저지른다.… (饑不生姦, 窘不生淫, 因貧而受罪, 未見焉. 飽思姦, 豐恣淫.…)

3.6 부자의 근심은 벗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가 벗이 없는 것은 어째서일까? 꿀이 있는 곳에 벌이 모이고, 썩은 고기가 있으면 이리가 몰려든다. 누린내 나는 고기가 있으면 개미가 꼬이고, 곡식이 있으면 쥐가 달려들며, 부유함이 있으면 벗이 모여든다. 너의 부가 남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니, 너를 사랑하기 때문일까, 너의 재물을 사랑하기 때문인가? 알 수가 없다. 알 수 없는 것과 있지 않은 것이 무슨 차이란 말인가? (富人之患, 無友其一. 其無友何也? 蜜在蜂聚, 胔在狼聚, 羶在蟻聚, 穀在鼠聚, 富在友聚. 爾富見愛於人, 其爲愛爾乎, 其爲愛爾財乎? 不可知也. 不可知與無有, 何異哉?)

3.7 …훌륭한 말과 아름다운 생각은 선행의 씨앗이다. 이것을 재물을 좋아하는 마음에다 뿌리면, 재물을 향하는 생각이 또한 즉시 이를 눌러버려서 더 자라나지 못하게 만든다. 가시는 날카로운 침으로 몸을 찌르고, 재물은 악한 생각으로 마음을 찌른다. 사람이 가시나무가 자라는 땅에 들어가면 해를 입지 않음이 드물다. 너의 몸을 해칠 뿐 아니라, 반드시 너의 옷을 잡아당길 것이다. (…嘉言美意, 善行之種也. 播之嗜財之心, 財念亦即壓之, 不使滋殖焉. 夫棘以銳刺刺身, 財以惡念刺心. 人入棘地, 鮮不受害. 非害爾身, 必搏爾衣.)

부자와 사귀면 내 집이야 낚아채지 못하더라도 틀림없이 내 밭을 빼앗아가서 손해를 입지 않음이 없다. 가시는 손을 펴서 취하면 다치지 않지만, 손바닥을 구부린 채 이를 쥐면 다치게 된다. 쥐는 것이 굳셀수록 더 심하게 다친다. 재물이라는 것은 손을 펴서 흩어 베풀면 해로움은 없고 유익함이 있다. 다만 굳세게 붙잡아서 놓지 않으면 유익함은 없고 그 해로움을 받게 된다. (交於富者, 非攫我室, 必奪我田, 未嘗不受損焉, 夫棘申手取之, 不傷也. 曲常握之, 乃傷矣, 据愈固, 傷亦愈深. 財者, 申手散施, 無害有益. 惟固握不捨, 乃無其益而受其害焉.)

독충은 흔히 가시덤불에 숨어서 가시에 기대 성으로 삼는다. 여러 가지 더러운 죄악은 탐욕스러운 마음에 함께 모이고, 또한 부에 기대 그것으로 성을 삼는다.… (夫毒螫多匿於棘域, 倚棘爲城. 諸凡罪汚, 俱聚於貪心, 亦倚當爲城.…)

…재물을 꾀하는 사람은 모을 때는 몹시 힘들고, 얻을 때는 더욱 근심스러우며, 잃을 때는 몹시 아프다. 하물며 재물을 모으기에 힘쓰면서 의로움을 범하지 않는 자는 드물다.(성 베르나르도)… (…謀財者, 聚時甚勞, 得時甚憂, 失時甚痛. 矧務聚財而不犯義者鮮焉.-聖 百爾納…)

…사특한 마귀는 재물을 끼고서 사람을 희롱함이 많다. 그 아름다운 빛깔은 드러내고 그 날카로운 가시는 감춘다.… (…邪魔挾財以戲人多矣. 顯其美色, 而匿其利刺.…)

3.10 …세상의 부는 길이 몹시 좁기 때문에, 마치 두 사람이 굴속에서 만났을 때 저쪽이 물러나지 않으면 내가 나아갈 수 없는 것과 같다. 세상의 부는 가장 가난하다. 한 물건을 두 사람이 교대로 얻으려 하는데, 이 사람이 없어야만 내가 가질 수가 있고, 많은 사람이 가난해지지 않고는 내가 부자가 될 수 없는 것과 한가지이다. 오직 덕만이 가장 넉넉하다. 가지려 하는 자가 다 가져도 줄어들지 않는다. 그 길은 가장 넓어서, 가려는 자를 다 받아들여도 서로 부딪치는 법이 없다.(참조. 마태 7,13-14 루카 13,24) (…世富之路甚狹, 如兩人相遇穴中, 非彼退, 我不得進, 世富最貧, 如一物而兩人交欲得之, 非是人無, 我不得有. 非多人貧, 我不得富. 惟德最富, 欲取者俱取而不減. 其路最寬, 欲行者俱容而不相觸.)

3.13 …두 사람이 같이 가는데 개 한 마리가 따라간다고 하자. 함께 가고 있을 때는 누가 개 주인인지 알기가 어렵다. 헤어진 뒤에 따라가는 것을 살펴보면 그제야 알게 된다. 네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세상과 함께 가므로 세상의 재물 또한 너를 따른다. 그래서 잘못 알아 너의 재물이라고 말한다. 세상을 떠날 때에 재물은 세상을 따르지 너를 따르지 않으니, 어찌 너의 재물이겠느냐? 바로 세상의 재물일 뿐이다. (…二人同行, 一犬從之, 當同行時, 孰爲犬主, 難識也. 視別後所從, 乃識焉. 爾居世之時, 與世同行, 世財亦從爾, 故誤謂爾財也. 別世之時, 財從世不從爾, 豈爾財? 正世財耳.)

3.18 사람으로 하여금 먹으면 먹을수록 배가 더 늘어나게 한다면 어찌 능히 배가 부르겠는가? 욕심 많고 인색한 사람은 새로 돈이 생기면 바로 새 바구니를 만들고, 새로 곡식이 생기면 즉시 새 창고를 짓는다. 앞서는 돈과 곡식이 있어도 바구니나 창고에 넣을 수 없는 것을 근심하더니, 나중에는 바구니와 창고는 있는데 돈과 곡식을 채울 수 없음을 근심한다. 앞서는 물건을 담아둘 장소를 생각하다가, 나중에는 그곳을 가득 채울 물건을 생각하니, 한 가지 탐욕이 끝나지 않았는데 한 가지 탐욕이 이를 잇는다. 그래서 탐욕스러운 마음은 큰길과 같다. 오가는 발걸음이 서로 이어져 끊이지 않고, 조용할 때가 없으니 말이다. (使人愈食腹愈寬, 何能飽乎? 食吝者有新金, 旋制新篇也. 有新穀, 旋造新廩也. 先有金穀, 患無篇廩容之, 後有篇廩, 患無金穀實之, 先思容物之所, 後思實所之物, 一貪未終, 一貪續之, 故貪心如大道矣. 來往之跡, 相繼不絶, 無時可靜.)

3.20 자기가 얻은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큰 부자고 참 부자다. 족함을 알지 못하는 자는 큰 가난뱅이고 진짜 가난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탐욕스럽고 인색한 사람은 부자 같아도 실제로는 부자가 아니다. 성 그레고리오가 인색한 사람에게 말했다. “당신은 남의 재물을 보고서 빼앗을 수 있으면 빼앗고, 빼앗을 수 없으면 욕심을 낸다. 탐욕으로 인해 날마다 남을 속이고, 날마다 남을 저주하며, 날마다 남에게서 훔치니, 이것은 부유함의 증거인가, 가난함의 증거인가? 궤가 비고 찬 것을 두고는 가난하다거나 부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람이 텅 비었는지 알찬지로 가난하고 부유하다고 말한다. 당신의 마음이 손과 함께 비어 있다면, 당신의 궤짝이 황금 같은 물건으로 가득 채워져 있더라도 나는 당신을 부자라고 말하지 않겠다.” (以其所得知足者, 大富也, 實富也. 不知足者, 大貧也, 實貧也. 故貪吝者, 如富焉, 未嘗富矣. 聖厄勒卧略謂 吝者 曰: “爾見財, 能奪則奪, 不能奪則貪. 因貪也, 日欺人, 日詛人, 日竊人, 此徵富耶, 微貧耶? 櫝虛實, 不開貧富. 人虛實, 謂貧富. 爾心與手俱虛, 即爾櫝實于金物, 我不謂爾富也.”)

3.22 …세네카가 재물에 욕심을 부리는 한 사람을 경계하며 말했다. “네가 구하는 것을 얻고자 한다면, 어찌 구함이 없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가? 구함이 없는 것이 구함을 얻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구함이 없음은 자기에게 있는 것을 얻음이요, 구함을 얻음은 남에게 있는 것을 얻음이니, 어느 것이 쉽겠는가?” (…色搦加 箴一貪財者 曰: “爾願得所求, 曷不願得無求乎? 無求不勝得求乎? 無求得在己, 得求得在人. 孰易乎?”)

3.24 …사람이 재물을 부리는 것이 이치고, 재물이 사람을 부리는 것은 탐욕과 인색이다. 그래서 재물에 인색한 자를 재물에 걸려들었다고 말하니, 이는 감옥에 갇힌 자가 족쇄를 차게 되는 것과 같다. 실제로 직접 족쇄를 찬 것이 아니라 해도 족쇄에 걸려든 것이나 같다.… (…人之財, 理也. 財之人, 貪吝也. 故言吝財者獲財, 猶言囚繫者獲桎梏, 實非自獲桎梏, 正獲於桎梏矣.…)

…탐욕과 인색의 마음은 나를 가장 귀찮게 부리면서도 나를 가장 박하게 대접한다. 내 음식과 내 의복마저도 온통 가져가서 제멋대로 한다. (…濁貪吝之情, 役我最煩, 視我最薄, 并我食我衣, 悉將靳之.)

3.31 …사람의 성품은 나약하고 물러터져서 늘 악에 노출되는데, 재물의 편리함을 얻으면 정욕이 따라서 바뀌고 온갖 악이 쉬 이루어짐을 알기 때문이다.… (…知人性脆弱, 恒垂於惡, 得財之便, 情欲易遂, 諸惡易成.…)

3.32 …“속이는 말을 제 마음에서 멀어지게 하시고, 가난함과 부유함을 모두 내려주시려 한다면 알맞을 정도만 내려주시면 좋겠습니다.부가 지나친 사람은 당신을 잊고서 누가 나의 주인이냐고 말하게 될까 봐 염려스럽고, 너무 가난한 사람은 또 도둑질과 거짓 맹세에 빠져들까 걱정스럽기 때문입니다.”(참조. 잠언 30,7-9) (…“誑言違之我心, 貧富咸欲見賜, 賜所足, 足矣. 富過者, 恐忘爾而云誰爲我主. 貧過者, 又恐流入盜竊証誓故也.”)

3.33 가난이 큰 재앙이 아님을 아는 사람은 부가 큰 행운이 아님을 안다. 이 같은 사람은 부자가 되게 할 만하다. 군자는 재물에 대해 부러워하지 않고 다만 순리에 따른다. 얻더라도 버리지는 않고 그저 가볍게 여긴다. (知貧非大災者, 則知富非大幸也. 若此人, 可令富矣. 君子於財不羡, 惟隨順之, 得之不廢, 惟輕之.)

3.35 한 사람이 부유하지만 인색했는데, 사변을 만나 그 재물을 모두 잃고 세네카에게 고하니, 그가 말했다. “만약 당신이 재물을 잃었다면 당신의 탐욕도 함께 잃은 것이니 큰 다행입니다. 탐욕을 잃지 않았더라도 재물을 잃은 것은 탐욕의 매개를 없앤 것이니 또한 다행입니다.” (一人富而吝, 遇事變, 盡亡其財, 以告色搦加, 曰: “若失爾財, 兼失爾貪, 大幸矣. 即不失貪, 失財, 去貪之媒, 亦幸也.”)

3.37 …성 아우구스티노가 말했다. “재물이 많다고 스스로 뽐내는 사람은몸에 종기를 앓으면서 내가 얻은 종기의 처방이 매우 많다며 자랑하는 것이나 한가지다. 종기가 없으면 더욱 편안하지 않겠는가?”… (…聖亞吾斯丁 曰: “財厚自伐者, 猶身病痬, 而云我所得痬方甚多, 以自伐也, 無痬, 不更安乎?”…)

3.41 재화의 아름다움에 한 가지가 있으니, 사람이 품고 있는 선과 악을 환하게 밝혀 줄 수 있다는 점이다. (貨財之美有一端, 能顯明人所懷善惡.)

베풂의 덕施舍德

3.49 성 예로니모逸羅尼가 말했다. “베풀어 주기를 기뻐하면서 죽음을 근심하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 남이 네게 구할 때, 네가 줄 수 있다면 주고, 줄 수 없다면 그 까닭을 알려주어라. 그렇게 하면 주지 않더라도 그 사람이 성내지 않을 것이다. 교활한 꾀를 피워 거절해서는 안 된다.”… (聖 逸羅尼 曰: “喜捨施而以患死者, 未之見也. 人求爾, 爾能予則予, 不能予, 告之以其故. 即不予, 人不恚矣. 若設巧計拒之, 不可也.”…)

…어떤 사람이 적은 물건을 구하면 왕은 후하게 주었다. 그 사람이 사양하니, 왕이 말했다. “나는 네가 구하는 바를 살피지 않고, 다만 내가 마땅히 줄 바를 살핀다.”

어떤 이가 말했다. “얻은 것을 모두 남에게 주시면, 자기에게는 어떤 물건이 남습니까?” 왕이 말했다. “남에게 주는 즐거움이 남는다.”… (…或求以少物, 王厚賜之. 是人辭, 王曰: “我不視爾所求, 惟視我所當予.” 或問曰: “所得盡予人, 己所留何物乎?” 王曰: “留予人之樂耳.”…)

3.52 …“여기 쓸모 있는 사람은 내게 그가 필요하고, 여기 쓸모없는 사람은 그들에게 내가 필요하다.”… (…“此有用者, 我須彼․ 此無用者, 彼須我.”…)

3.53 남에게 베풀 때는 두 가지를 조심해야 한다. 하나는 굳이 ① 억지로 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施捨二戒, 一戒勉強.…)

세네카도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남이 어떤 물건을 주는지는 따지지 않고, 오직 어떤 마음으로 주는지를 살핀다.… (色搦加亦曰: “吾不視人以何物與, 惟視以何心與.…)

3.54 두 번째로 경계할 것은 ② 구하는 것을 더디 주는 것이다. 속담에서는 “빨리 주는 것은 두 배로 주는 것이다”라고 했다. 사람이 원하는 바가 있을 때 오래오래 매달려 바랐는데도 주지 않는 것보다 괴로운 것이 없다. 그래서 기다리게 하는 것은 그 자리에서 거절하는 것만 못하다. 그 자리에서 거절하면 속이는 것이 적다. 사람을 죽이는 것에 비유하면, 점차 조금씩 형벌을 더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잔혹한 것이다. 하물며 더디게 베푸는 자는 오래되면 혹 아까워하기까지 한다. 사람을 욕보이고 업신여김이 은혜보다 더 깊다.… (二戒需遲, 諺曰: “速與者, 兩與.” 人有所願, 莫苦乎久久懸望而弗得焉, 故與其須, 不如即拒, 即拒, 欺微也. 譬戮人者, 以漸加刑, 似愛而實酷, 況遲施者, 久或靳之, 辱慢入人, 深於恩惠.…)

3.55 …은혜를 베풀 때 네 역량을 넘어서면 안 된다. 벗을 자기처럼 보살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짊을 베푸는 차례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 까닭에 가난한 이에게 주는 것이 나를 가난하게 해서는 안 되고, 환난을 구하려다가 나를 환난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되니, 이렇게 해야 잘 주는 것이다. (…所施恩, 勿過爾量. 視友如足矣. 列仁之序, 從己身始, 故予貧不使我貧, 救患不使我入患, 乃善予也.)

3.56 베풂이란, 한 사람을 보태주려고 한 사람을 손해 보지 않게 해야 잘 베푼 것이다. 진실로 저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면서 이 사람을 보태준다면 손해와 이익이 반반이니, 잘 베풀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청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베푸는 것을 ‘아름다운 은혜’라고 말한다. 만약 나에게 의롭지 않은 일로 베풀어달라고 청할 경우, 이를 일러 ‘부드러운 원수’라고 한다. 내가 저 사람에게 베풀었을 때 그가 반드시 은혜를 믿고 악을 자행할 것을 안다면, 베풀어서는 안 된다. 그의 죄악이 내게까지 미칠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施者, 益一人, 不損一人, 善施也. 苟損彼益此, 損益半, 可謂善施哉? 施不待求, 謂之美恩,如求我以非義而施之, 謂之柔讐, 知我施彼, 彼必侍恩以恣惡, 勿施之. 恐其罪惡及我故也.)

3.57 잊어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남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것이다. 잊어서는 안 될 것은 남에게 은혜를 입은 것이다. 네가 베풀어 주었는데 상대가 감사할 줄 모르더라도 성을 내서는 안 된다. 성내지 않아야 혹 감화되어 고치게 할 수가 있다. 성을 내면 더더욱 상대방을 미워하게 될 뿐이다. 한 번 베풀어 주어 반응하지 않을 경우, 두 번 베풀어 주면 틀림없이 반응할 것이다. 두 번 베풀었는데도 잊어버린다면 세 번 베풀어 주어라. 혹 앞서 두 차례 베푼 것까지 돌이켜 생각하게 될 것이다. (有不可不忘, 施恩於人者是. 有不可忘, 受恩於人者是, 爾施不知謝, 勿怒也. 不怒, 或可化令改矣. 怒之, 則令增惡彼人也. 不應一施, 必應再施, 再施亦忘, 三施之, 或并前二, 能追憶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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