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지난주 홍수와 산사태, 수해를 이야기하고 아직 많은 이들이 그 아픔에 슬퍼하고 있는데도 몇 날 반짝하니 사람들은 어느새 휴가를 이야기하고 바캉스를 운운한다. 우리말 휴가에서 ‘휴’는 ‘쉴 휴休’, 곧 나무(木)에 기대고 있는, 혹은 나무 옆에(그늘에) 있어 쉬는 사람(人)의 모양새다. 더해진 ‘가’는 틈이나 겨를을 뜻하는 ‘가暇’이다. 이때 ‘가暇’는 ‘날 일日’과 ‘빌(릴) 가叚’가 더해진 글자이다. ‘빌(릴) 가叚’의 왼쪽은 언덕이나 벼랑의 모양새고 오른쪽은 두 손(又)이므로 합하여 벼랑을 의지하고 기대거나 부여잡고 올라가는 모습이다. ‘가暇’는 결국 시간이나 날을 빌려 부여잡아 만든 틈새이고 짬이며 겨를이다. ‘한가閑暇’에서도 이 ‘가’를 쓴다. ‘날 일日’ 대신에 ‘사람 인人’을 붙여 만든 ‘假’는 사람을 빌리거나 이용하여 무엇인가를 하므로 ‘거짓 가假’이다. 참고로, 여기에 여러 단어를 생산할 수 있는 접미사 ‘-짜’가 붙으면 가짜, 진짜, 타짜, 괴짜, 공짜 등의 말이 된다. 휴가를 뜻하는 서양말 바캉스는 ‘비움’을 뜻하는 라틴어 동사 ‘vacare’에서 온다. 이는 정지나 멈춤, 일정 거리를 뜻하면서 항상 하던 일상을 떠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놀거나 자유로운 상태이다.
‘휴가休暇’이든 바캉스이든 마치 왼쪽으로 흐르던 전류를 오른쪽으로 흐르게 하듯 스위칭이고 변환이며 전환과도 같은 것이다. 그 스위칭은 각종 스마트 기기와 인연의 굴레들로 철저하게 연결되고 옭아 매여져 있는 현대인들에게 참으로 어렵다. 설령 혼자라고 하더라도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는 일상의 전환에는 상당한 내공과 기술이 필요하다. 휴가라고 하면서도 보통은 첫날 눈뜨고 나서 일과 중에 무엇을 할지 계획하고 구상하는 허둥지둥에 휩싸이게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귀고Guigo the Carthusian(?~1188년)가 “일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피곤한 일이다.”라고 말한 것은 타당하다. 내놓고 휴가를 말할 수 없는 수도자들은 ‘본가本家 방문’이라는 그럴듯한 단어를 창안했는데, 출가出家한 이들이 굳이 ‘본가’를 방문할 이유가 없고, 나이 든 이들은 세월이 흘러 아예 돌아갈 본가가 없어 난감하다.
무엇인가를 하던 것으로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전환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눈에 비치는 것들을 마음으로 보는 것, 귀로 들리는 것들을 마음으로 듣는 것, 수동에서 능동으로 변환하여 적극적으로 보고 듣는 것이다. 수도자 같으면 세상으로의 여행이 아니라 내면으로의 여행으로 영적인 투쟁 속에서 나 자신의 그릇된 충동을 분별하여 정돈하고, 사악한 충동을 꺼내 직면하며 자신과 만나는 기회일 것이다. 쉬피오네 아프리카노Scipione Africano(기원전 235~183년)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아침나절이 가장 활동적일 때였다.”라고 말했던 것이 무슨 뜻이었는지 조금 이해가 갈 만도 하다. 그래서 세네카Seneca(기원전 4~기원후 65년) 같은 이는 “활동적이지 않은 이가 실제로는 위대한 활동을 한다”라는 이론을 내세웠다던가.
결국 휴가는 ‘비움’이 아니라 일상에서 벌어지고 금 간 틈새 ‘메꾸기’이다. 사도 바오로는 “생명 없는 것들도 소리를 낸다”(1코린 14,7) 하였고, “모든 피조물이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로마 8,22)라면서 생명이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모두가 내는 소리를 들었다. 휴가는 나무의 소리, 물의 소리, 사람의 소리, 돌멩이의 소리, 모래알들의 소리, 바람 소리를 적극적으로 들어 나를 채우는 기회이다.(*이미지-구글)
“틈새를 메꾼다는 말”참 듣기 좋고 재밌는 말 같다. 한창 지구 다른 쪽에서 틈새 메꾸는 중인 딸이, 바로 어제 해가 저물 녘 헐떡이며 들어오는 나에게 영상통화를 하며 다른 쪽의 해 뜨는 모습과 함께 고요함의 소리를 나누고 싶다 했다. 그 또한 마음으로 보고 듣는 틈새 메꾸는 순간임에 감사했다.
“틈새를 메꾼다는 말”참 듣기 좋고 재밌는 말 같다. 한창 지구 다른 쪽에서 틈새 메꾸는 중인 딸이, 바로 어제 해가 저물 녘 헐떡이며 들어오는 나에게 영상통화를 하며 다른 쪽의 해 뜨는 모습과 함께 고요함의 소리를 나누고 싶다 했다. 그 또한 마음으로 보고 듣는 틈새 메꾸는 순간임에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