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2주일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고유전례를 따른다. 1965년 한국천주교 주교회의는 해마다 6월 25일에 가까운 주일을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정한 바 있었다. 1992년에 그 명칭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바꾸어, ‘남북통일 기원미사’를 드리는 날이다. 2005년부터 6월 25일이나 그 전前 주일에 지내기로 결정하였고, 2017년부터는 6월 25일에 기념 미사를 지내기로 하였는데, 2023년인 올해는 6월 25일이 주일과 겹치므로 고유 기원미사를 봉헌한다.
3년 1개월 2일 동안 지속된 전쟁으로, 한반도에는 450만 명 이상의 희생자와 320만 명의 피난민, 당시 남북한 인구 3천 3백만 중 1천만의 이산가족, 10만의 전쟁고아들과 30만의 전쟁미망인이 발생했으며 한반도는 황무지처럼 황폐해졌다. 전쟁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재앙이고 가장 참혹한 비극이다. 이런 유례없이 끔찍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고,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이름을 단 채, 우리는 지금 1953년 7월 27일 6·25전쟁 정전협정이 맺어진 뒤 70년간 ‘정전체제’를 이어간다. 정전체제는 당장은 총을 쏘지 말자거나 사람을 죽이지 말자는 ‘부정적 의미의 평화’ 상태임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평화 체제인 것처럼 인식하거나, 설마 전쟁이 있을까 싶은 의구심을 갖거나 외면하고, 벌써 오래전 또 다른 분단국가였던 독일이 1990년 일거에 통일국가를 만들어낸 사건을 목격하고도 ‘우리는 안 될 것’이라는 자괴감을 안고 불안한 두려움과 안이함의 교차 속에서 살아간다.
어떤 이들은 햇볕정책이니 달빛정책이니 하면서 동족이니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개성공단이니 금강산 관광이니 하며 열심히 퍼 주었으나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천안함 참극이었고 연평도 포격 사건, 비무장지대 지뢰사건, 디도스 공격, 핵실험, 미사일 등등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여러 도발 말고 또 무엇이었는가 하고, 어떤 이는 사드라도 배치해 놓아야 안심이라고 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이 땅에 그따위 무기가 왜 필요 하느냐 하고, 어떤 이는 민간 차원의 교류라도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야만 집단인 북한을 철저하게 고립시키고 봉쇄시켜서 무릎 꿇고 손을 들고 나오게 해야 한다고 하고, 이제 내놓고 핵무기 체계를 완성했다고 주장하는 저편을 은근히 두려워하며 우리도 그에 맞서는 핵무기를 가지면 될 것이 아니냐고 한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하신다.
사람들에게 남북통일의 필요를 물으면, 어떤 이는 관심이 없다 하고, 어떤 이는 다 필요 없다면서 우리끼리만 잘 살면 된다고 하고, 어떤 이는 그저 헤어진 이산가족들 간에 소식이나 주고받으면서 서로 위협하거나 해치지 않고 살아가면 되는 것 아닌가 하고, 어떤 이는 단일 민족인데 함께 살아가야 하지 않는가 하고, 어떤 이는 우리 남한만으로는 5천만도 안 되니 남북한이 합해져야만 경제적으로 힘 있고 뭔가 할 수 있는 나라가 된다고 한다. 사람들에게 통일이 되지 않는 이유를 물으면, 어떤 이는 북한 사람들이 못 되서 그런다고 하고, 어떤 이는 주변 강국들이 훼방을 놓아서 그런다고 한다. 어떤 이는 통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만약에 통일이 되면 남한의 부동산 투기꾼들이 1주일 이내로 북한 여기저기 온 천지에 말뚝을 박아놓을 것이라 한다. 70년 가까이 계속되는 남북의 분단을 보면, 북한은 자기들의 체제 유지와 권력의 세습을 위해 분단을 이용하고, 남한은 남한 대로 정권 유지와 권력 유지를 위해 분단을 이용하고, 주변 강국들은 자기들의 이권과 이해관계를 위해 분단을 이용한다고 한다.
기성세대들이 어릴 때 암기하여 배우도록 했던 6.25 전쟁을 기념하는 노래(박두진 작사, 김동진 작곡)를 1절만 보면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후렴)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이다. 도대체 원수는 누구이고 적은 누구인가?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하신 분이 우리 주님이시다. 분단의 무덤을 만들었던 이념의 헛됨도 사라지고, 서로의 모습을 왜곡시켜 바라보게 하였던 체제 경쟁의 부질없음도 이미 드러나지 않았는가? 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분단의 역사는 나와 너의 형제적 관계를 근원적으로 파괴하였다. 나와 너의 형제적 관계가 파괴된 곳에 하느님의 모상과 공동체적 삶의 의미가 온전히 남아있을 수 없다. 반세기가 훨씬 넘는 동안 서로를 빛과 어둠의 적대적 관계로 파악해온 남북한 관계는 그 자체가 민족적 참회의 대상이다.
사실 인간들의 일치,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청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기도하라 하시고, 그 자리에 “내가 함께” 한다고 하신다. 마지막 만찬을 위해 제자들과 모인 자리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1-23)”라고 간곡히 기도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 되지 못하는 사람들의 불의不義 속에 자신을 바치셨다. 『예수님 자신이 동족의 증오와 시기와 오해를 한 몸에 받으시고 사형 판결을 불러올 억울한 누명을 쓰셨다. 그분은 오로지 동족과 인류를 사랑하고 구원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바쳤지만, 아무도 이를 이해하거나 지지하지 않고 삐뚤어진 눈으로 바라보면서 박해하였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예수님께 이 삐뚤어지고 완고한 백성의 종이 되라 하셨다. 올바르고 아름다운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악하고 편협한 이들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기를 원하셨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십자가는 그 자체가 불행이요, 고통이며, 죽음이고, 절망이며 암흑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십자가를 사랑으로써 구원과 생명의 원천이 되게 하셨고,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게 하셨다. 이같이 우리 자신이 우리를 못 박는 그 분단의 십자가, 우리에게 고통과 좌절, 죽음과 절망을 가져오는 그 분단의 십자가를 참으로 용서와 사랑으로 극복한다면, 이것은 우리 민족의 통일뿐 아니라 온 세상 평화의 표본이 된다.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십자가상의 예수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처럼 살려고 해야 한다.(과거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자료집’에서 발췌)』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원미사를 드린다는 것은, ① 우리 안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아집과 반목, 대립과 갈등의 역사를 지닌 우리의 아픔을 되새기고, 그것이 인간 본성 안에 자리 잡은 이기적인 욕심의 발로였음을 깨우치고 ② 그 치유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또한 나의 일상 안에서 이웃과 상호 간의 일치와 화해를 도모하기 위해 내가 해야 할 바를 생각하기 위함이다. ③ 그리고 남북통일을 위해 구체적으로 우리의 기도와 정성을 모으기 위함이다.
기도 : 주님, 이 한반도에 용서와 화해의 성령을 보내주시어 미움과 적대감의 소용돌이를 몰아내어 주소서. 남북한의 지도자들이 정치 권력과 명예욕에서 벗어나 백성들의 생명과 평화를 더 존중할 줄 아는 겸손한 지도자가 되게 하소서. 주님의 영이 이 나라를 다스리시어 인간 이하의 삶을 강요당하는 북쪽의 형제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소서. 이 민족이 공허한 이념의 포로가 되어 대적하고 규탄하는 어리석음에서 해방되어, 주님의 한 자녀로서 용서하고 화합하여 서로의 상처를 감싸 안을 수 있는 형제가 되게 하소서. 아멘!(강우일 주교,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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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제78항>
평화의 본질
78. 평화는 단순히 전쟁의 부재만이 아니며, 오로지 적대 세력의 균형 유지로 전락될 수도 없고, 전제적 지배에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올바로 또 정확히 말하자면, 평화는 “정의의 작품”(이사 32,17 참조)이다. 인간 사회의 창설자이신 하느님께서 심어놓으신 그 질서의 열매, 또 언제나 더 완전한 정의를 갈망하는 인간들이 행동으로 실천하여야 할 사회 질서의 열매가 바로 평화이다. 인류의 공동선은 그 근본 원리에서는 영원법의 지배를 받지만, 공동선이 구체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평화는 결코 한 번에 영구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꾸준히 이룩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더욱이 인간의 의지는 나약하고 죄로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평화를 이룩하려면 각자의 야욕을 끊임없이 다스리며 정당한 권위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개인의 행복이 안전하게 보호받고 사람들이 신뢰로써 정신과 재능의 자산을 서로 나누지 않는다면, 지상에서 이 평화를 얻을 수 없다. 다른 사람들과 민족들 그리고 그들의 존엄을 존중하려는 확고한 의지와 형제애의 성실한 실천이 평화 건설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다. 이렇게 평화는 정의가 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가는 사랑의 열매도 된다.
지상의 평화는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생겨나며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그리스도의 평화의 모습이며 결실이다. 강생하신 성자께서는 평화의 임금님으로서 당신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하느님과 화해시키시고 한 백성, 한 몸 안에서 모든 사람의 일치를 회복시키셨으며, 당신 육신 안에서 미움을 죽이시고(에페 2,16; 콜로 1,20-22 참조), 부활하시어 영광을 받으시고, 사랑의 성령을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부어 주셨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실천하며(에페 4,15 참조) 참으로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과 힘을 합쳐 평화를 간구하고 건설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똑같은 정신으로, 권리 주장에서 폭력 행위를 거부하고, 또한 다른 사람이나 공동체의 권리와 의무를 침해하지 않는 가운데, 약자에게도 주어지는 방위 수단에 의지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치하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죄인이므로, 전쟁의 위험이 인간을 위협하고 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러하겠지만, 인간이 사랑으로 결합되어 죄를 극복하는 그만큼 폭력도 극복할 것이다. 그때에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다. “백성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이사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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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피해 현황 통계(국방부군사편찬 연구소-국가기록원)
한국군 전사 137,899 부상 450,742 실종/포로 32,838(도합 621,479)
유엔군 전사 40,670 부상 104,680 실종/포로 9,931(도합 154,881)
북한군 전사 508,797 실종/포로 98,599(한국전란 4년지)
중공군 전사 148,600 부상 798,400 실종/포로 25,600
민간인 사망(남한) 244,663 학살/부상/납치/행불 746,305(내무부통계연감)
민간인 사망(북한) 282,000 학살/부상/납치/행불 796,000(1953년 북한의 공식발표)』
한국군 사망자 13만 8천여 명, 그중 2만 9,000여 명의 유해가 수습되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지만, 10만 9,000명의 유해가 우리 산하에 아직 남아있다. 아직도 찾지 못한 전사자를 찾기 위해 오늘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장병들은 깊은 산골짜기와 능선을 걷는다, 320만 명이 피란길에 나서야 했고, 피란 중에 흩어진 이산가족은 당시 남북한 인구 3천 300만 명의 3분의 1 이상인 1000만 명에 달했으며, 이중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 10만여 명, 남편을 잃은 전쟁미망인은 30만 명에 달했다. 6.25 전쟁은 사회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큰 피해를 남겼다. 남한의 경우 일반 공업 시설의 40%, 북한은 전력의 74%, 연료 공업 89%, 화학공업의 70%가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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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는 2023년 6월 17일부터 25일까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9일 기도를 바쳐왔으며, 매일의 지향과 묵상은 다음과 같다.
6월 17일(토):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회심을 위하여
6월 18일(일): 세계 정치 지도자들을 위하여
6월 19일(월): 한반도의 비핵화와 핵무기가 없는 세계를 위하여
6월 20일(화): 경제제재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6월 21일(수): 한반도의 복음화를 위하여
6월 22일(목): 이산가족과 탈북민들을 위하여
6월 23일(금):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6월 24일(토): 평화의 일꾼들을 위하여
6월 25일(일): 한반도에서 전쟁이 완전히 끝나고 평화가 실현될 수 있도록
“아무도 이를 이해하거나 지지하지 않고 삐뚤어진 눈으로 바라보면서 박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