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강림 대축일로 주님의 영광스러운 부활 시기를 마감한 교회는 연중 시기에 들어서자마자 우리 신앙의 요체라고 할 수 있는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신비와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의 신비를 지난 두 주일에 걸쳐 기념하였다. 이제 오늘 연중 제11주일을 기점으로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제34주일)까지 올해 주일과 겹치는 축일이거나 교회의 자상한 배려로 기념해야 하는 날들(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연중 제12주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연중 제18주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연중 제24주일-선택 가능,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연중 제29주일)을 제외하고는 계속 ‘작은 부활절’이라고 할 수 있는 연중 주일을 ‘가’해의 복음인 마태오복음을 따라 지내게 될 것이다.
오늘 전례의 복음은 『말씀에서나 행동에서나 절대적 권능을 지니신 그분께서(마태 4,12-9,34) ‘기쁜 소식’을 선포하라고 제자들을 보내신다.(마태 9,35-10,42)-주석성경, 신약성경-마태오복음서 입문, 35쪽)』라는 대목에 위치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많은 죄인이나 가난한 이들과 어울리셨고,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셨으며, 사회의 기득권이 되어 있던 종교지도자들을 중심으로 거부와 반대를 받으시기에 이르신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마태 9,35)
1. “가엾은 마음…주인님께 일꾼들을”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9,36) 같은 문장을 옛 공동번역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라고 옮긴다. “가엾은 마음이 들고”와 “불쌍한 마음이 드는”으로 번역되는 말마디는 ‘에스플랑크니스데(ἐσπλαγχνίσθη)’라는 중요한 말마디이다. 예수님의 마음이자 하느님의 마음을 표현하는 말마디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내장內臟을 뜻하는 ‘스플랑크논(σπλάγχνον)’이라는 말에서 온다. 애절하게 숨이 막히듯이 애끓고 애끊는 상황으로(‘애끊다’는 ‘몹시 슬퍼서 창자가 끊어질 듯하다.’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고, ‘애끓다’는 ‘몹시 답답하거나 안타까워 속이 끓는 듯하다.’라는 뜻-국립국어원) 속이 떨리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이 아픔을 느끼는 안타까운 마음의 상태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람들을 ‘보신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보시듯이 그렇게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보는 것이 제자 된 자로서의 출발점이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목자 없는 양들처럼…”이라 하신다. 목자와 양은 구약시대로부터 성경에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 간의 관계를 묘사하는 전형적인 비유이다.(참조. 민수 27,17 2역대 18,16 에제 34,5 등)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시달리고 기가 꺾인” 사람들을 보시면서 “목자”를 청하라 하시지 않고, 제자들에게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 하신다. 무엇보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라는 대목에 멈출 필요가 있다. 오늘날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진정으로 “수확할 것이 많다”라고 생각하는 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하느님 나라의 곳간에 알곡으로 거두어들여야 할 추수가 제대로 성소의 부족과 이미 부르심을 받은 이들의 태만으로 들판에 그대로 버려지고 있지나 않은지 노심초사 조바심을 내는 교회인지를 돌아보면 안타까운 측면이 있기도 하다. 수확할 것이 많지만, 다 거두어들이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교회는 사목적 열정이라 부른다. 아울러 목자와 양들의 관계를 자칫 소유주와 소유물로 생각하거나, 성직자를 목자로 신자들을 양들로 묘사하면서 일부 목자들이 계급적인 신분으로 오해하고 착각한 나머지 하느님의 양 떼를 돌보지 않으면서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에제 34,3) 거짓 삯꾼 목자들을 내다보신 것일까? “일꾼”을 청하라 하시고, 그 청을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하라고 하신다. 제자의 신분은 “주인님”을 주인님으로 알아모시는 것이 먼저이고, 그리고 그 주인님께 청하는 기도가 먼저이다. 그러한 자신의 주제 파악과 기도가 없는 소위 목자의 행위는 주변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는 사기詐欺이다.
2.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사도들”
“일꾼들을 청하라” 하신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마태 10,1) 야곱의 열두 아들처럼,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처럼 완전한 수 ‘열둘’로 새로운 이스라엘을 건설하기 위해 제자들을 “가까이 부르신다.” 제자의 소명은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기 전 “먼저 우리를 사랑”(1요한 4,19)하신 하느님처럼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르기 전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를 부르심으로 시작한다. 제자들을 부르신 주님께서 “권한(엑수시아, ἐξουσία, power to act, authority)을 주신다.” 예수님께서 “주신” 권한이고 ‘받은’ 권한이다. 위임된 권한이다. 그러나 이 “권한”은 사회적 영향력이나 정치적인 ‘권력’이 아니라 책임과 의무가 뒤따르는 품위를 겸손하게 살아내고 증거해야 하는 일이다. 우쭐대는 경거망동으로 권위를 부여하신 분의 품위와 권위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여하신 권한은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으로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기” 위함이다. 제자들의 권위는 “병자와 허약한 이들(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발휘될 때만 진정한 힘이 된다. 이것이 교회의 힘이다.
이어서 마태오복음에서 처음 “열두 사도의 이름”이 공식적으로 거명된다. 복음서에서 “사도(아포스톨로스, ἀποστόλος, a messenger, one who is sent for~, 예수님께서 이루신 사명의 사절使節, 심부름꾼, 임무를 위임받아 파견된 자)”라는 말마디도 처음 등장한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大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바르톨로메오를 예수님께 소개한-요한 1,45)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나타나엘-요한 1,45-50), (쌍둥이라고 알려지며-요한 11,16;20,24;21,2 의심이 많았다고 알려지는-요한 20,24-29)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小 야고보)와 타대오(유다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마태 10,2-4) 열둘 중 처음 제자들로 부르심을 받은 듯이 기록하는 처음에 거명된 넷은 어부들(참조. 마태 4,18-22)이다. 이름들 앞에 ‘~의 아들’이라는 관습적 표현을 제외하고 다른 형태의 수식어가 붙은 경우는 “세리”, “열혈당원”, “예수님을 팔아넘긴”이다. 마태오가 마태오복음을 기록했다는 전제 아래에서 본다면 마태오는 ‘공공公共의 적敵’으로 손가락질을 받던 직업의 칭호를 자신의 이름 앞에 ‘굳이’ 적어서 자신처럼 사악하고 나쁜 녀석도 예수님의 한없는 자비로 사도 중 하나가 되었음을 남겨놓는다. “열혈당원”은 로마 식민 통치에 무력투쟁으로 저항한(로마의 문자나 언어 및 세금 납부 거부 등) 독립운동 단체로 알려진 종교적 당파의 일원이라는 것이다.
베드로가 맨 먼저 기록되는 사도들의 명단으로부터 살펴보는 예수 제자들의 인적 구성은 다양하다. 모두 남성으로만 구성된 “사도” 중에는 그리스 식의 이름을 쓰는 세 명이 있음을 볼 때 유다인과 그리스인이 섞여 있으며, 어부라도 가난한 어부(베드로와 안드레아)가 있는가 하면 괜찮게 사는 어부(야고보와 요한)가 있고, 로마 통치의 앞잡이가 된 세리도 있으며, 이에 무력으로라도 맞서려는 열혈당 소속도 있다. 베드로처럼 예수를 배신하였으나 뉘우친 제자도 있고 결국 스승을 배신하고 자살한 유다도 있다. 세속적인 권력에 눈이 어두워 다른 사도들의 빈축을 샀던 제베대오의 아들들(마태 20,20-24)도 있다. 이렇게만 보더라도 예수님께서 직접 구성하신 첫 공동체인 열두 사도는 면면이 다양하고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달라도 너무 다른 이들을 “하늘 나라”라는 공통의 사명으로 결합하게 하시고 일치하게 하신다. 의심 많고 나약한 사도들이었으며 끝까지 예수님을 자기 식대로만 이해하려 들었던 사도들이었지만, 그래도 사도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힘으로 함께 살았고 마침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전승에 따를 때) 모두 순교로 주님을 증거하고 증언한 것으로 알려진다.
3. “분부…거저 주어라”
사도들을 선발하신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믿고)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이미 내가 한 그대로, 보여준 그대로 너희도)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온갖 내적·외적인 병으로 신음하며)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영적으로)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환영받지 못하는)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세상 사람들을 갖은 유혹으로 현혹하는)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5-8) “사도”라는 이름대로 예수님께서 “보내신다.” 제자들이 탐탁지 않고 미덥지 않더라도 담대하게 ‘믿고’ 보내신다. 예수님의 “분부” 내용은 이미 당신께서 제자들 앞에 보여 주시고 살아내신 그대로의 행적이고, 모두 간결한 명령문이다. 이것이 제자들이 살아야 할 선교 사명이고 섬김의 사명이다. ‘가지 말고, 들어가지 말며, (길 잃은 양들에게) 가고, 선포하며, 고쳐 주고, 일으켜 주며, 깨끗하게 해 주고, 쫓아내며, 거저 주어라’라는 9개의 동사動詞들만 단순하게 열거해도 예수님의 분부는 분명하다.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만 할 것으로 구별할 수 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피해야 하고 가지 말아야 할’ 길이다. 제자로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선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말로 하는 알림만이 아니라 자신이 믿어 그 믿음대로 사는 선포일 때에만 진실한 선포이다.
사도들을 파견하시며 분부하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너희가 거저 주어라.”(마태 10,8)라는 말씀으로 끝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조건 없이 베푸는 삶”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9년 6월 11일 산타 마르타의 집에서 행한 아침 강론에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구원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무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결제를 요구하지 않으시고 무료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이들에게 행해야 합니다. 바로 이 하느님의 조건 없는 베푸심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일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느님의 모든 선물이 대가 없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문제는 “마음이 위축되고 닫혀” “대가 없이 주어지는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과는 흥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과는 거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저 베풀어야 합니다. 여러분도 거저 베푸십시오. 이는 특별히 “교회의 사목자들인 우리를 위한 말씀”이니, “은총을 판매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장사하는 사목자들을 볼 때는 “(마음이) 매우 아픕니다.” “저는 이런 일을 하겠습니다만, 이런 일은 비용이 좀 들어갑니다. 이것은 아주 (비쌉니다) …”라는 식은 안 됩니다. 주님의 은총은 거저 베풀어진 것이고 “여러분은 이 은총을 거저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성생활을 하면서 항상 대가를 지불하는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주님과 이야기할 때조차도 말입니다. 마치 우리가 주님께 뇌물을 주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상원리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일은 좋지 않습니다! 그런 길은 좋지 않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저에게 이런 일을 해 주신다면, 저도 당신을 위해 이 일을 하겠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을 활짝 열어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주님의) 조건 없는 베푸심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이러한 무상성의 관계는 그리스도교적 증언에 있어서나 그리스도인의 섬김에 있어서나, 혹은 하느님 백성의 목자들이 사목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나 타인과 관계를 맺는 데에 도움을 줍니다.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앞으로 나아갑니다. 선포하십시오.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십시오. 여러분이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십시오. 하느님께서 조건 없이 주신 은총, 거저 주어진 은총, 그분께서 주시려는 은총, 바로 거기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의 마음에 도달할 수 있도록, 우리의 성덕의 길은 마음을 활짝 여는 것입니다.(바티칸 뉴스 한국어판에서 인용)』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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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바오로 성인은 묻습니다.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1코린 4,7) 바로 인간 생명은 선물이기 때문에 개인의 소유물이나 재산으로 평가 절하될 수 없습니다. 특히 “생명나무”(창세 3,24)를 조작하도록 인간을 유혹하는 의학과 생명 공학의 발전에 비추어 볼 때 더욱 그러합니다.
오늘날 버리는 문화와 무관심의 문화에서, ‘내어 줌’은 개인주의와 사회 분열에 대항하는 가장 적절한 패러다임이 됩니다. 또한 이 ‘내어 줌’은 민족들과 문화들 사이에 새로운 관계와 다양한 형태의 인간적 협력을 촉진합니다. 대화는 내어 줌의 전제 조건입니다. 대화는 인간 성장과 발전을 가능하게 하여 사회에서 권력 행사의 기존 관행을 타파할 수 있게 합니다. ‘내어 줌’은 단순히 선물을 주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재산이나 물건의 이전이 아니라 자기 증여를 의미합니다. ‘내어 줌’은 무상으로 자신을 내어 주는 것과 관계를 맺고자 하는 열망을 포함하기에 선물을 주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는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러한 상호 인정이 사회관계의 기초가 됩니다. ‘내어 줌’은 성자의 강생과 성령의 강림으로 정점에 이른 하느님의 사랑을 반영합니다.
우리 각자는 가난하고 부족하고 모자랍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살아가는 데에는 부모님의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또한 삶의 모든 단계에서,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다른 이의 도움에 의지합니다. 우리는 타인이나 어떤 상황 앞에서 ‘피조물’로서 우리가 지닌 한계를 언제나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진실을 솔직히 인정할 때, 우리는 겸손해지고 삶의 중요한 미덕인 연대를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9년 2월 11일 제27차 세계 병자의 날 담화에서)』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요?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