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교회는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지낸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이루어진 성체성사의 제정과 그 은총을 기념하는 날이다. 원래 성목요일에 성체성사의 제정을 기념하지만, 성주간의 성목요일이므로 이어지는 성금요일의 엄숙함을 피하여 온전한 기쁨으로 성체와 성혈을 찬양할 수 있도록 오늘 대축일을 별도로 지낸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만찬인 성체성사는 신앙생활의 원천이자 정점이다. 성체 성혈 대축일은 이러한 성체성사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이를 생활 속에서 실천할 것을 다짐하는 날이다.(가톨릭교회의 보편 교회력은 성령 강림 대축일로 부활 시기를 마감하고, 삼위일체 대축일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주일 전례에서 지낸 다음 일상의 연중시기 주일로 돌아간다.)
이 축일은 로마 교회와는 다른 형태로 성체성사에 대한 해석이 난무하는 것을 염려하여 13세기에 설립되어 신학적이고도 교의적인 가르침을 담았다. 이러한 내용을 잘 보존한 전례문에 따라 우리는 성체성사의 신비에 관한 중요한 가르침을 깨우치고, 그리스도께서 “끝까지 사랑”(요한 13,1)하신 모든 인간을 위해 당신 몸을 내어주시고 당신 피를 흘리셨음을 찬미한다.
복음에는 성체성사와 관련하여 대단히 깊고도 구체적인 내용을 여러 곳에서 알려준다. 그 중 카나의 혼인 잔치(요한 2,1-11), 물이 술로 변하는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을 통하여 포도주가 예수님의 피로 변하는 성체성사의 “예형”을 보여주고, 빵을 많게 하신 기적(요한 6,1-15)을 통하여서는 모든 이가 풍요로움을 체험하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보게 되는 성체성사의 “내용”을 알려주며, 최후의 만찬(요한 13-15장)을 통하여서는 성체성사의 “제정과 본질”을 깨닫게 하여주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만나 함께 빵을 나눌 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 모심(루카 24,13-35)을 통하여서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마련하신 성체성사의 “첫 번째 거행”을 알게 해 준다.
요한 복음사가는 우리가 오늘 듣는 성체성사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과 함께 자신의 복음 전체를 성체성사에 관한 축으로 꿰뚫으면서 복음의 중요 분기점으로 삼는다. 복음의 첫머리에 둔 카나의 혼인 잔치 – 도래한 하느님 나라의 잔치. 메시아를 맞는 혼인 잔치와 믿음의 시작 ;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한 2,11) / 복음의 전개 부분에 둔 성체성사 담화 – 빵 기적,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 생명의 빵, 영원한 생명 ;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나는 생명의 빵이다.…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33.35.48.54.68) / 복음의 중앙인 13장 – 최후의 만찬을 통한 성체성사의 설정과 그 의미, 끝까지 가는 사랑의 의미, 정화와 치유의 씻김, 세상을 밟았던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심, 그리고 배반 ;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요한 13,12.18.26.30) / 복음의 마지막에 둔 티베리아 호숫가의 아침 식사 – 실망과 우울, 좌절과 낙담 앞에서 조용하고 아름다운 호숫가의 아침 식사,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 ;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9.12.15)
요한 복음사가에 따른 오늘 복음의 대목은 요한복음 6장으로서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신 기적 이야기의 뒷부분이다. 이른바 ‘성체성사에 관한 담론’의 마지막 부분이다.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설명하여 주시고,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시는 형식으로 기술되어 있다. 불과 몇 줄이 안 되는 대목이지만 결코 놓칠 수 없고 붉은 밑줄을 그어야만 할 의미심장한 다섯 마디의 말마디들이 반복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 “먹다(8회)”, “마시다/음료(4회)”, “살(6회)”, “피(4회)”, “생명/살다(9회)”
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복음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요한 6,51 참조. 요한 6,48)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당신이 뭔가 특별하다거나 위대하고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 일상에서 살기 위해 먹어야 하고 벌어야 하며 가난할 때는 구걸하기까지 해야 하는 겸손한 실체로 자신을 말씀하신다. 별 볼 일 없는 빵이지만 살기 위해서는 누구나 먹어야 하고 “반드시 필요한” 생명의 상징으로서 당신을 드러내신다.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필수적이면서도 단순하고 겸손한 실체로서 우리에게 선물이 되는 당신을 계시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빵, 생명의 빵, 사람에게서 오지 않고 살아 있는 빵, 인간이 줄 수 없고 하느님이신 위로부터 오는 빵으로서 당신을 계시하신다. 하느님과의 통교인 영원한 생명을 위한 빵, 영원히 하느님과 함께하여 그분의 사랑에 참여하는 빵을 말씀하신다. 요한복음은 이 빵을 예수님의 “살flesh”이라고 하고 공관복음은 “몸body”이라 한다. 이는 성경의 언어에서 단순히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신체를 뜻하지 않고 살아 있는 생명체요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전체성totality을 뜻한다.
이 말씀들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이므로 설명해야 하는 말씀이라기보다는 묵상하고 관상해야 하는 말씀이다. 우리가 죽음을 향해 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생물학적인 삶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참되고 충만한 삶을 살기 원한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당신 자신인 빵을 먹어야만 한다. ‘빵집’을 뜻하는 베들레헴이라는 곳에서 태어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그분 생애의 모든 행동과 말씀, 모든 것이 항상 이제와 같이 영원히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요한 1,18)이시므로 우리가 원하고 찾기만 하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생명이 단지 하느님으로서의 생명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태어나시고 연약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신으로 사셨던 그분의 인간으로서의 삶도 포함한다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어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 사셨던 그분의 삶 역시도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소진하셨던 생명의 빵으로서의 삶이었다.
2.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에서 당신 몸과 피를 사람들에게 주시겠다고 하시고 그래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하셨을 때, 그에 대해 유다인들이 보였던 반응을 복음은 비교적 상세히 전한다.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41절) (서로 간에) “말다툼이 벌어졌다”(52절)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60절) (제자들마저) “투덜거렸다…귀에 거슬렸다”(61절)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66절)
오늘날도 많은 이가 성체성사 앞에서 성체 안에서의 그리스도는 단지 상징 내지는 비유, 효력 면에서 실재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우리 신자들은 성체성사 안에 그리스도께서 실재적實在的으로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몸!’ 하는 사제 앞에 ‘아멘!’을 응답한다. 어쩌면 성체성사는 이론으로 설명해야 하는 어떤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신앙으로 길게 가서 도달해야 하는 ‘목적지’이다. 성체성사 앞에서 겸손하게 우리의 믿음과 불신, 확실과 불확실 사이의 골, 그리고 그 어려움을 고백하는 것이야말로 이 신비의 무한한 풍요를 발견해가는 첫걸음이다.
우리 사이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두고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는 혼란과 불편이 있을 수 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미친 소리’라는 반응에 예수님께서는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두려워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듯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 하고 강하게 말씀하신다. 이 말씀 뒤에 곧바로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하는 반응이 뒤따를 것을 아시면서도 말씀하신다.
3.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영원히 살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습 그대로 영원히 모든 사람을 위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요한 6,54)이어야만 한다고 말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한 영입니다.”(1요한 4,2) 하는 말씀처럼 “사람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을 고백하지 않는 믿음은 헛된 믿음이고 그릇된 믿음이다. 바로 이 부분에 그리스도교의 독특함이 있다. 즉 하느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당신을 계시하셨고, 당신의 인성을 알리고자 하셨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고 이것이 하느님께서 인간의 몸을 취하신 육화이며 인간화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여느 보통 남녀 인간들처럼 연약하고 가난한 사람의 몸으로 인간의 관계 안에 들어와 사셨다. “아드님”이신 그분께서는 구체적인 인간의 역사 안에서 온전한 인간으로 그렇게 사셨다. 그러면서도 그분께서는 자신의 삶을 사랑의 걸작이 되도록 하셨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의 삶을 사는 삶이다. 그분의 그 “사랑”은 당신 몸소 몸으로 살아내셨던 사랑, 최후의 만찬에서 결정적이고도 최종적으로 신신당부하시면서 “새 계명…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15,12) 하신 그 사랑,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사랑의 실천만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하는 말씀대로 예수님의 제자인지 아닌지를 식별하는 유일한 기준이 된다.
우리 앞에서 쪼개어진 빵, 우리가 마시는 포도주 안에서 우리가 성사의 은총으로 산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시면 그 빵과 그 포도주가 곧 그리스도의 몸과 피임을 우리는 알게 된다. 우리가 그 빵과 그 포도주를 먹고 마셔서 그 빵과 포도주가 우리 몸에 들어오면 생물학적 신진대사가 아닌 영적이며 성사적인 신진대사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 이것이 우리가 흠숭하는 위대한 신비이다.
『성체성사는 믿음의 성사, 일치의 성사,사랑(애덕)의 성사(성 아우구스티누스)』이다. 성체성사는 믿음의 학교, 일치의 학교, 사랑의 학교이다. ‘빵집’을 뜻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어 인간 역사의 고랑에 밀알이 되시고, 부서지시며, 양식이 되시고, 생명의 빵이 되신 예수님이시다. 우리도 빵이 되고 『밥이 되어(김수환 추기경)』 서로를 먹이며 사랑해야 한다. 성체성사는 의식의 거행, 현재의 재현,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우리의 이야기로 만드는 현장이다. 영성체를 하는 우리 각자의 생명도 ‘들려지고, 축복되어지고, 쪼개어지고, 나뉘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생명도 그분의 생명이 된다.(참조. “주 예수님께서는…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1코린 11,23-24)
『성체성사는 자비와 일치를 가르치는 하나의 학교입니다. 그리스도의 빵으로 양육되는 사람은 오늘날 나날의 빵을 강탈당한 사람 앞에서 무관심하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매우 많은 부모들이 자신들과 그 아이들을 위한 매일의 빵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국제 공동체가 해결하기 힘든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기도할 뿐 아니라 어느 누구도 생명을 위해 필요한 것들에 부족함을 느끼지 않도록, 주님의 모범을 따라 인간의 발전과 나눔에 관한 수많은 계획을 갖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많게 하는 모든 방법에 헌신합니다.(교황 베네딕토 16세, 2008년 5월 25일 삼종기도에서 행하신 훈화에서)』
예수님 안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요한 1,14) 예수님의 살이 우리의 음식인 “살아 있는 빵”(요한 6,51)이 되셨다. 우리의 음식인 그 빵, 예수님 당신의 온 생애와 죽음, 그리고 부활로 우리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8) 아멘!(*이미지-pinterest.com)
“매일 일상에서 살기 위해 먹어야 하고 벌어야 하며 가난할 때는 구걸하기까지 해야 하는 겸손한 실체로 자신을 말씀하신다.” 묵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