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시기를 마감하고 연중시기에 지내는 주님의 대축일들(삼위일체 대축일,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예수 성심 대축일) 중 하나인 삼위일체 대축일이다. 삼위일체 대축일에는 ‘한 하느님이시며 한 주님이시나, 한 위격으로 하나가 아니고 한 본체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사랑으로 하나이신 하느님을 기리며 찬미하고 감사하며 흠숭한다. 곧 ‘본성으로는 하나이시며 위엄으로는 같으심을 흠숭하오며, 영원하신 참하느님을 믿어 고백’하는 것이다.(오늘 고유 감사송) 동시에 오늘 축일에 교회는 성호경으로 시작하여 영광송으로 끝마쳐야 하는 그리스도인 고유의 삶을 묵상하고,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궁극적인 모범으로 삼아야 하는 거룩한 성삼위의 일치를 찬미하며, 삼위일체적인 삶을 살도록 결심한다.
삼위일체 대축일은 14세기 요한 22세 교황에 의해 로마 전례력에 들어오면서 그 축일을 본격적으로 지내게 되었다.
1.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오늘 축일을 위해 교회가 얼핏 보기에 성령에 대한 언급이 없이 성부와 성자만 명시되는 것 같은 오늘 복음의 대목을 선정한 것에 고개를 갸우뚱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복음의 대목을 유심히 읽으면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라는 구절에서 “하느님…사랑”이라는 이 부분에 『아드님과 결코 분리되실 수 없는(체사레아의 성 바실리오)』 “사랑”이신 성령께서 분명히 언급되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으로 이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을 안다. 하느님의 사랑이 바로 성부와 성자의 성령이시다.
이러한 계시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안에서 오랫동안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알아모시는 것으로 정착되었다. 초대교회의 나찌안즈의 그레고리오(329년경~390년)는 이를 두고 『구약은 아드님에 관해서 다소 모호하였지만 분명하게 하느님 아버지를 선포하였고, 신약은 아드님을 드러내었으며 아드님을 통하여 성령을 보게 했다. 따라서…그 성령께서는 이제 더욱 분명하게 우리가 성령 하느님을 알아모시게 한다.…그렇게 승천을 통하여 넘치도록 영광에 영광을 더하여 삼위일체이신 분의 아름다움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신다.(신학적 담화 31,26)』 한다.
하느님의 삼위일체란 우리가 말하는 그대로 딱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호칭하듯 반드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이름이 매겨져 있는 것도 아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복수複數의 공동체적인 사랑의 삶을 지칭하는 용어로 우리의 빈약한 어휘로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하느님의 통교이며,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우리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신비이다. 하느님의 삼위일체에 관해서 우리가 아무리 표현한다 해도 완전할 수는 없다.
계시가 드러난 이후 몇백 년이 흘러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해하려다가 바닷가에서 바다를 조그만 구덩이에 담아보겠다는 어린이를 만나 자신의 고민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일화로 유명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354년~ 430년)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Father the Lover, the Son the Beloved, and the Spirit the Love(사랑하시는 분, 사랑받으시는 분, 사랑하시고 사랑받으시는 분 사이의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계시가 드러난 지 천 년쯤이 흘러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1090~1153년)는 『입 맞추시는 분, 입맞춤을 받으시는 분, 그리고 입맞춤 자체이니 이 모두가 나뉠 수 없는 영원한 하나의 원圓 같으며 변할 수 없는 평화, 분리될 수 없는 사랑, 나뉠 수 없는 일치(‘아가雅歌서’에 관한 설교 8,2)』라고 정의한다.
오늘 복음의 대목은 “이스라엘의 스승”(요한 3,10)이요 유다인들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알려졌던 니코데모가 밤 중에 예수님을 만나 나누었던 대화(요한 3,1-21) 중 한 대목이다. 사실 이 대화는 이미 예수님을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요한 3,2)으로 알아모시고 믿는 니코데모에게 적잖이 당황스럽고 불편하였다. 질문하는 니코데모에게 예수님께서 답변을 주시는 형태이지만, 예수님의 긴 대답이 담긴 “내가 진실로…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육에서 태어난…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위로부터 태어나야…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땅에서 태어난 이…”(요한 3,5-8) 하는 대목에는 네 번째 복음의 저자인 요한의 깊은 묵상이 담겼다. 교회가 오늘 우리 전례에서 제시하는 요한복음 3,16-18절은 과연 단순히 예수님의 말씀일 뿐인지 아니면 요한 복음사가가 속했던 교회 공동체의 묵상인지 한번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이렇든 저렇든 예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요한 복음사가가 함께했던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이 말씀을 깊이 묵상했고, 이해하려 했으며, 그 말씀을 믿고 살아가고자 했던 삶을 담았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복음은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는 구절로 시작한다. 이 구절 직전에 있었던 바로 앞 구절은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4-15) 이다. 이 구절들은 서로가 서로를 설명한다. 세상 모든 인간이 사람의 아들을 믿고 그분께 의탁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인간과 이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야만 한다. 그와 같은 하느님의 사랑은 기원후 30년 4월 7일에, 마리아에게서 태어났으나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던 나자렛 예수로서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라는 증언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정확하고도 분명하게 이 지상의 역사와 구체적인 장소에서 드러난다. 그와 같은 분명한 사실 안에서 사람들은 하느님께로부터 보내져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외아드님을 통해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내어주기까지 얼마나 이 세상과 사람들을 사랑하셨는지를 보았다. 십자가의 그 시간, “예수님의 시간” 안에서 예수님의 영광, “끝까지” 세상과 인간을 사랑하신 그분의 영광이 드러난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요한 1,18)을 통하여 누구라도 상관없이 그 누구에게나 하느님의 사랑이 그렇게 드러난다. “예수님의 시간”, 외아드님께서 들어 올려진 시간, 그 시간은 모든 인간과 세기와 세대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보는”(즈카 12,10 요한 19,37 묵시 1,7) 바로 그 시간이다.
2. “영원한 생명”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선물이다. 이것이 바로 공짜로 얻는 선물이며, 자신을 내어주는 선물이고, 되물릴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선물이다. 무엇을 어떻게 해서 얻어지는 선물이 아니고 그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선물이며, 하느님의 미친 듯한 사랑으로 얻는 선물이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는 증언대로 감히 연약하고 죽어 없어질 인간이 되시고자 했던 하느님의 사랑으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렇게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 가운데 우리와 함께 우리의 삶과 투쟁,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는 우리의 목마름을 감히 나누고자 하셨던 분의 사랑이 이것이다. 하느님의 외아드님께서 육신을 취하시면서 그 아드님과 나뉠 수 없는 성령께서도 함께하셔야만 했으니 성부, 성자, 성령의 통교, 사랑 자체이신 분의 신비가 바로 여기에 있다.
3.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네 번째 복음은 “이제 이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쫓겨날 것이다.”(요한 12,31 참조. 요한 16,11;14,30) 하면서 다른 세상,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 악의 표징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오늘 복음의 대목에서 보는 “세상”은 인류, “하느님께서 보시니…좋았다.”(창세 1,4.10.12.18.21.25), “참 좋았다.”(창세 1,31) 하신 바로 그 세상이다. 하느님께서 미치도록 사랑하신 세상, 자신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신 세상, 스스로 발가벗김을 당하시고 모욕을 당하시며 조롱을 당하셔도 괜찮을 세상이다. 구원이란 죽음으로부터 결정적인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 이는 예수님을 사랑하여 그분께서 주시는 선물, 성령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이에게만 가능하다. 하느님께서 미치도록 사랑하신 이 선물의 목적은 심판에 있지 않고 오직 구원에만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류가 영원한 생명, 온전히 충만한 생명, 당신만이 주실 수 있는 그 생명을 알도록 원하신다.
그러나 그 선물 앞에서도 인간의 자유는 여전하다. 조건 없는 이 선물은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만이 관건이다. 받아들이는 이는 심판을 면하고 영원한 생명을 살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심판한다. 하느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아들이는 이와 거부하는 이에 따라 생명으로 들어가는 자와 생명의 샘으로부터 멀어져 죽음의 길로 들어서는 자가 결정된다. 오늘 복음의 대목은 분명 예수님께서 엄하고도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들리지만 이를 풀고 설명해서 알아들어야만 한다.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3,18)라는 구절을 인류의 역사 안에서 시대가 다르고 문화가 달라서 그분을 어떤 형태로든 만날 수 없었던 수많은 사람을 단죄하는 것으로 알아들으면 곤란하다. 이들도 형제자매들에 대한 사랑이라는 예수님 인성의 본질에서 같은 실존을 살았다면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 예수님의 생명과 사랑에 참여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지 못해도, 그리스도교의 신앙 안에서 그분의 이름을 고백하지 못해도,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과는 아주 동떨어진 삶이나 반대된 삶을 살고, 사랑을 모르는 삶을 사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한 3,18) 그를 위해서는 결코 영원한 생명이 없다.
삼위일체를 기념하는 이 대축일에 불가해한 하느님의 삼위일체에 관하여 모호한 생각을 하는 것보다는 아버지의 마음에서 태어나고 아드님 위에 세워졌으며 성령으로 모이게 된 교회 안에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해야 한다. 교회는 하느님의 마음과 삼위이신 하느님의 친교와 통교를 체험하는 곳이다.
우리도 삼위일체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하면서 사랑을 알아간다!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아니 설령 계신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아니시라면, 이 세상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남고 만다!(발타살Hans Urs von Balthasar, 1905~1988년)』 아멘!
Wolf Khan의 작품의 색감과 선의 조화가 삼위일체의 강렬함과 활기참을 한눈에 말해주는 것 같아요.
“삼위일체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하면서 사랑을 알아간다!”
지난주 글을 읽고 또 다시 이 글을 다시 찾아 읽는다. 마음과 몸으로 온전히 받아들이며 묵상하며…”그 선물 앞에서도 인간의 자유는 여전하다. 조건 없는 이 선물은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만이 관건이다. 받아들이는 이는 심판을 면하고 영원한 생명을 살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심판한다. 하느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아들이는 이와 거부하는 이에 따라 생명으로 들어가는 자와 생명의 샘으로부터 멀어져 죽음의 길로 들어서는 자가 결정된다.”… 태어남, 살아가는 시간들 그리고 죽음까지 다 주신 것을 감사할 수 있는 마음, 영원한 생명이란 선물을 받는 지속되는 은총, 사랑-믿음-구원이 삼위일체이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