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2주일은 일명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서 ‘가’ ‘나’ ‘다’해 모두 복음이 같다. 그러나 독서는 해마다 바뀐다. ‘부활 후 첫 번째 주일’이라 하지 않고 ‘부활 제2주일’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부활 시기는 부활절 다음 일곱 번째 주일인 성령강림 대축일에 끝난다. 그러나 매 주일을 ‘작은 부활절’로 거행할 것이다.(*이미지 출처-ilblogdienzobianchi.it)
오늘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이라 하게 된 것은 직접적으로 성녀 마리아 파우스티나(St. Faustina Kowalska, 1905~1938년)와 관련이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2000년 4월 30일 부활 제2주일에 폴란드 출신의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의 시성식을 거행하면서 부활 제2주일마다 하느님의 자비를 기릴 것을 당부함에 따라 교회는 2001년 부활 제2주일부터 하느님의 자비를 기리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 안에서는 훨씬 더 소급되어 성 아우구스티누스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부활 제2주일 전까지 이어지는 ‘부활 팔일 축제’를 ‘자비와 용서의 날들(the days of mercy and pardon)’이라 불렀다.
‘하느님의 자비 주일’이라 하는 것이 오늘의 복음 내용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굳이 ‘하느님의 자비 주일’을 오늘의 복음과 연관시키자면 당신의 옆구리를 토마스에게 보여주시는 장면을 통하여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하느님의 자비가 온 인류를 풍성하게 적시게 되었음을 기억할 수 있다. 오늘 복음의 전반부라고 할 수 있는 요한 20,19-23의 부분은 ‘가’ ‘나’ ‘다’ 모든 해의 성령 강림 대축일의 복음이기도 하다.
1.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콜로 1,18)이 되셨습니다.”(1코린 15,20)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특징이요 근본이며 우리 그리스도인이 모든 인간에게 마땅히 전해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희망의 말씀인 이 부활에 관한 선포 말씀을 잘 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내면 깊숙이 한 구석에서 이 선포에 대하여 못 들은체하고 싶어 하는 저항이 있다는 것도 잘 안다. 더구나 우리 부활의 보증이요 담보인 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어야만 한다고 스스로 되뇌면서 얼마나 나름대로 애를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저항은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부활 성야로부터 8일간을 기념하는 ‘부활 팔일 축제’(The Easter Octave)를 지내고 나서 맞는 부활 제2주일, 전통적으로 이른바 ‘토마스의 주일’이라고도 불리는 오늘의 복음에서 우리는 그러한 내용을 잘 확인하게 된다. 토마스는 우리 모두를 대표하며, 동시에 우리의 마음에 ‘불신을 버리고 믿는 이가 되어라!’하고 말하면서 부활 신앙에 도달하게 되는 여정을 알려준다.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요한 20,19) 뿔뿔이 흩어지고 혼비백산하여 두려움 속에 꽁꽁 문을 닫아걸어놓은 제자들 한가운데에 하느님의 자녀들을 모으시는 주님께서 서신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평화(평안, 안녕)”를 빌어주신다.
두려움에 싸여있던 제자들이었지만, 함께 모여 있었다는 이유만으로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신다. 부활하신 주님의 공동체는 주님께서 가운데에 서시는 공동체뿐이다. 우리가 단순히 생각하듯이 죽었던 세포의 재생이나 시신屍身의 소생이 아닌 부활하신 육신의 모습으로 “모두 잠가 놓은 문” 너머로 오신다.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필리 3,21)으로,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으시는 모습으로, “물질적인 몸”이 아니라 “영적인 몸”(1코린 15,44.46)으로, 그러나 “끝없는” 사랑 때문에 죽음의 고통을 겪으셨던 흔적이 담긴 모습으로 제자들 가운데에 서신다. 수난과 죽음의 흔적이지만, 이제는 “끝까지 사랑”(요한 13,1)하셨던 극단의 사랑의 흔적, 영광의 흔적을 지니신 채 오신다. 일단 그 자리에 토마스는 함께 있지 않았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주셨다.”(요한 20,20) 당신의 삶 전체를 요약하는 말씀과 몸짓이다. 당신 몸의 상처, 당신 수난의 지울 수 없는 흔적, “끝까지 사랑”으로 살아내신 사랑의 표징을 보여주신다. 제자들에게 건네신 “평화”, 곧 ‘샬롬’은 충만하여 차고 넘치는 생명이다.
2. “나도 너희를 보낸다”
생명을 건네신 주님께서는 이어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하시면서 분명한 책임을 부여하며 제자들을 파견하신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하신 분께서 ‘내가 아버지에 관해서 말해주었으니 이제 너희가 나에 관해서 말해야 한다!’ 하시듯이 제자들을 파견하신다. 그리고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며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하고 말씀하신다. 부활하신 분께서 죄를 용서하는 성령의 힘으로 제자들을 다시 창조하신다. 그러나 제자들이 얻게 된 그 성령의 힘이 그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므로 “누구의 죄든지”라고 하시면서 세상 모든 이의 죄 사함을 위한 선물임을 덧붙여 밝히신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을 알아 모셨고, 그분을 따랐으며, 그분을 믿었던 제자들은 이제 진리의 증인으로, 하느님께 충성을 다하여 사람들을 사랑하신 주님과 똑같은 생애를 바치기 위해 온 세상으로 파견을 받는다. 그 파견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는 사실을 삶으로 살아내야 하는 파견이었다. 이 파견과 사명 수행을 위해 제자들은 다시 창조되고, 성령에 잠겨야 했으며,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고…내 영을 넣어주겠다.” 하신 것처럼 “새 마음과 새 영”을 받아야만 했다.(에제 36,26-27)
수도자들은 매일 아침 기도에서 즈카르야의 노래를 부르면서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루카 1,77) 되새긴다. 그래서 성령을 받는 것은 구원을 받는 것, 곧 단순히 용서하시는 주님의 행위로써 만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잊으시고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시는 주님의 행위를 하는 것이다. “용서”는 하느님의 자비, 깊고도 무한한 하느님 사랑의 공현이니 우리를 해방하시고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며 우리 스스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새로운 창조물이 되게 하시는 하느님의 행위이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그저 화해성사의 근거나 기원 정도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죄로부터 벗어나 해방을 누리는 자비의 능력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다. 열한 제자와 함께 위층 다락방에는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분의 형제들”(사도 1,13-14), 그리고 남녀 제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사도 2,1) 하기 때문이다.
3.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숨”과 “용서”의 체험을 했던 제자들이 처음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그 자리에 없었던 토마스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25) 한다. 제자들이 토마스에게 했던 이 말은 주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충만한 표현이다.
복음을 읽는 오늘날의 그 누구도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듯이 토마스도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참조. 요한 20,24) 토마스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25) 하고 전해주는 다른 형제들의 말들이 정신 나간 소리로 들렸으며 “헛소리처럼 여겨졌다.”(루카 24,11) 그래서 그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라고 말한다.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직접 만져보면서 주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바라고 부활에 관한 가시적인 증거를 원한다. 그의 태도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부활 신앙을 제대로 사는 법을 알고나 있는지 진지하게 묻게 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매주 당신의 날에 당신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모으시고,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며, 당신을 끝없이 새로이 봉헌하시고, 당신의 생명을 나눠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정말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일까?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요한 20,26)라고 한다. 이미 주님의 날 정기적인 전례의 거행이 이루어지고 있던 “여드레 뒤”이다. 공동체가 다른 이들도 불러서 “한데 모여서”(1코린 11,20) 있는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도 함께 하시면서 당신을 드러내신다. “한데 모여서”라고 할 때 이 어휘는 장소적인 개념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와 하나가 되어주시는 것을 드러내는 말이다. 그렇게 토마스도 이제는 부활하시어 살아계시는 주님을 만나 그분과 “함께 있었다.” 토마스를 만나 그와 함께 계시는 주님께서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하신다. 토마스는 주님을 뵐 필요는 있었으나 굳이 그분의 상처에 손까지 대 볼 필요는 없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비로이 토마스의 불신을 걷어 주고자 하셨으나 토마스는 자신의 불신과 의심에도 불구하고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면서 엎어져 한없는 감동 속에서 차마 고개마저 들지 못하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을 고백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지금의 나를 포함하여 그 자리에 있지 않은 모든 이에게 다 같이 해당하는 제4복음서의 마지막 축복으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요한 11,16;20,24;21,2)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고, 믿고 싶은 것만을 믿는 토마스의 다른 “쌍둥이”는 어쩌면 우리 자신이다. 라자로의 부활을 앞둔 상황에서도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하며 죽음만을 보았던 토마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하시면서 주님께서 “자리를 마련”하시겠다 할 때도 “주님,…어떻게 그 길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요한 14,2-5 참조) 하면서 길을 모르겠다고 하던 토마스처럼, 형제자매들의 증언을 신뢰해야 함에도 보고 싶은 것이나 보는 것만을 믿는 우리는 모두 토마스의 쌍둥이다.
앞서 토마스에게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하고 말씀하셨듯이 주님께서 “보아라” 하셨으니 우리는 주님의 날에 “한데 모여” 성경에 담긴 하느님의 말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중심이신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눈으로 예수님을 본다.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진 믿음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교회의 믿음이다. 이것이 우리가 교회 안에서 살도록 부름을 받은 우리의 믿음이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아버지께로 건너가 아버지의 왕국에서 얻게 될 영원한 생명으로 넘어가는 우리의 파스카, 곧 부활에 이르기까지 매일매일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우리의 믿음이다. 아멘!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고, 믿고 싶은 것만을 믿는… 우리 자신이다~’
묵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