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보다가 보면 노래, 무용, 연기, 연주, 낭독, 코미디, 마술, 스포츠 등등 헤아릴 수 없는 각양의 대중문화 분야에서 예능인들의 프로그램이 넘쳐난다. 세월이 가면서 이제는 누가 누구인지 구별도 못 할 만큼 유행 따라 표준화된 외모 속에서도 사람들은 스타들을 귀신같이 구별하고 알아본다. 그러한 스타들의 경우에 대부분 기획사라는 것이 뒤에 있어서 각종 미디어를 통하여 그들을 관리하고 산업화하며 시장화한다. 그렇게 청소년들에게는 스타들이 부러움과 동경의 대상이 되고 꿈이 된다. 그리고 자녀를 둔 부모들이 자녀들을 그러한 반열에 들게 하려고 온갖 비용과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암암리에 너도 알고 나도 안다는 듯이 묵인하면서 공공公共의 합의처럼 기획되어 조작된 인상을 지울 수 없는 연예인들의 삶은 곧잘 그리스도교적인 도덕적 가치와는 맞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기 일쑤이다. 그렇지만 소위 연예 산업을 폐기해야 한다거나 그리스도교적인 가치와 대척점에 있으므로 길이 다르다고 치부해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
돈 보스코라면 아마도 예능이 복음의 메시지에 사람들의 마음을 열도록 하는 잠재력을 지녔다고 거침없이 말할 것이다. 그림에서 보는 M.S. Pine이 쓴 <돈 보스코의 삶과 작품에 관한 스케치>라는 책(*이미지 출처-영문 아마존)에서 작가는 “연예 활동이 성인(돈 보스코)의 양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라고 쓴다. 작가는 돈 보스코의 어린 시절에 이웃들이 어머니 말가리타의 헛간으로 몰려들었고, 어머니는 마을 사람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는데, 어머니의 이러한 이야기들이 어린 요한 보스코의 재치와 유머를 동반한 여러 가지 재주로 보충·보완되었다고 증언하면서 돈 보스코의 어린 시절을 돈 보스코의 기록과는 약간 다른 각도에서 조명한다. 우리가 돈 보스코의 전기들에서 만나는 어린 시절의 마술과 곡예, 줄타기와 저글링과 같은 놀이를 돈 보스코가 동네 아이들과 즐겼다고 하는 바로 그 대목으로서 돈 보스코의 회상록에서 맨 첫 장에 돈 보스코 자신이 기술한 내용이다. 돈 보스코 자신의 기록에 의할 때, 그는 상당히 많은 분야에 다양한 재능을 가졌으며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고 청중이나 관객들의 반응도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돈 보스코의 재능은 훗날 사제가 된 뒤에 아이들 사이에서 복음의 아름다움을 전하기 위해 훌륭한 소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사로잡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예능은 사람들의 시선을 이끌고 호감을 주면서 그들이 자기 방어선을 낮추게 하고 마음을 열게 하면서 복음이 기쁨을 전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뿐만아니라 그 자체로 복음의 또 다른 언어가 된다.
***
『사람들은 내게 몇 살 때부터 청소년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느냐는 질문을 많이 했다. 나는 이미 10세 때부터 내 나이에 걸맞는 주일학교 비슷한 것을 했다. 나는 아주 어린 꼬마였지만, 친구들의 성향을 연구하고 있었다. 어떤 아이의 얼굴을 응시하면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때문에 친구들은 나를 많이 사랑하면서 동시에 두려워했다. 모두가 나를 심판이나 친구로 삼으려 했다. 한편 나는 가능한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고 악한 일은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놀다가 싸움이 생기면 내 보호를 받으려고 했고 나를 무척 사랑했다. 사실 내 키는 작디작았지만, 큰 이들도 두렵게 만드는 힘과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복잡한 문제나 일, 말다툼, 논쟁이 벌어지면 나를 심판관으로 세웠고, 내 결정에 따랐다.
그러나 그들을 내 주위로 끌어모으고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그들에게 들려주는 내 얘기였다. 강론이나 교리 시간에 들은 예화나 내가 읽은 〈프랑스 왕들〉, 〈불쌍한 용사〉, 〈베르톨로 베르톨리노〉 등은 내게 이야깃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나는 어렸기 때문에 내가 읽고 있는 것을 가까스로 이해했다. 그런데도 친구들은 나만 보면 내 이야기를 들으려고 우르르 몰려왔으며,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꽤 많이 모여들었다. 종종 나는 카스텔누오보를 오가는 길에 들판이나 풀밭에서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이곤 했다. 그들은 다소의 기억력밖에 지닌 것이 없는 보잘것없는 소년의 말을 듣고 싶어 했다. 나는 아는 것이 없었지만, ‘소경의 나라에서는 애꾸눈도 왕으로 추대된다.’라는 옛날 속담처럼, 그들에게는 내가 훌륭한 박사처럼 보였던 것이다.
겨울이 되면 사람들은 따뜻한 외양간에서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그곳에는 나이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이들이 모였다. 그들은 대여섯 시간 동안 꼼짝하지 않고 프랑스 왕족에 대한 낭송을 들으면서 저녁 시간을 즐겁게 보냈다. 꼬마 낭독자는 모든 이들이 볼 수 있도록 의자 위에 올라가서 책을 읽었다. 우리는 이야기 전후에 성호경을 긋고 성모송을 바쳤기 때문에 ‘강론을 들으러 가자.’라는 말이 퍼지기도 했다. 좋은 계절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특히 주일에는 동네 아이들만이 아니라 먼 곳에 사는 아이들도 적지 않게 모여들어 신경을 많이 써야 했다. 나는 이전에 배운 몇몇 놀이를 공연했다. 장날이나 전시회가 열리는 날에는 야바위꾼과 곡예사들을 보러 갔다. 나는 그들의 요술과 민첩한 동작을 유심히 살펴보고, 집에 돌아오면 그것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연습할 때마다 심하게 부딪치고 굴러떨어지고 뒹굴었으리라는 것은 상상이 가고도 남는 일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열한 살에 전문적인 곡예사처럼 요술 주머니 놀이도 하고 공중제비나 물구나무를 서서 걷기도 했으며 밧줄 위에서 걷고, 뛰고, 춤도 추었다. 주일 오후마다 쇼가 벌어졌다. 베키에는 여러 나무가 자라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내게 많은 도움을 준 아주 튼튼한 배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나는 배나무에 밧줄의 한쪽 끝을 매고 좀 떨어져 있는 다른 나무에 다른 끝을 매었다. 나무 옆에는 탁자와 요술 주머니를 갖다 놓았다. 땅바닥에는 맨몸 운동을 할 수 있도록 푹신한 것들을 깔았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면 구경꾼들은 시작을 기다리느라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면 나는 그들을 로사리오 기도에 초대했고 성가 한 곡을 부르게 했다. 그것이 끝나면 나는 의자 위로 올라가 강론을 했다. 아니, 아침 미사 때 들은 강론을 반복하거나 책에서 읽었거나 주워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강론이 끝나면 짧은 기도를 더 바치고 곧장 놀이로 들어갔다. 설교사는 곡예사로 변했다. 나는 공중제비를 하기도 하고 물구나무를 서서 걷기도 하며 재주도 넘었다. 그 후에 요술 놀이를 시작했다. 동전들을 삼킨 뒤에 그것을 구경꾼의 코끝에서 낚아챘다. 색구슬이나 달걀을 많아지게도 했고,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거나 닭을 죽여 토막을 낸 뒤에 즉시 살려서 기쁨의 노래를 부르게도 했다. 끝으로 나는 밧줄 위로 뛰어 올라가 길처럼 안전하게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춤도 추고 물구나무도 서고 공중회전도 했다. 몇 시간 후 피곤해지면 우리는 놀이를 마치고 짤막한 기도를 바친 뒤에 제각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한 사람들이나 나쁜 이야기를 한 사람들, 우리와 함께 기도하기를 거절한 사람들은 이 모임에서 제외했다.
혹자는 내게, ‘요술을 구경하러 가려면 입장권을 사야 하는데 그 돈을 어디서 구했느냐?’고 물을 것이다. 나는 갖가지 방법으로 돈을 마련했다. 축일에 어머니와 다른 사람들이 과자를 사 먹으라고 주는 얼마 안 되는 돈이나 심부름 값, 선물 등을 모으기도 했고, 덫이나 새장, 끈끈이와 올가미로 새를 멋지게 잡기도 했으며, 새 둥지를 뒤지는 데도 선수였던 나는 이런 것들을 모아서 시장에 내다 팔았다. 버섯을 따거나 염색 풀이나 약초를 캐다 팔기도 했다. 또 어떤 이는 내게, ‘당신의 어머니는 당신이 산만한 생활을 하고 요술 놀이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보고도 만족스럽게 여겼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여러분에게 말해 두지만, 어머니는 나를 무척 사랑했고, 나는 어머니를 한없이 신뢰했으므로 그분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모든 것을 살폈으며 내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셨다. 오히려 내게 무엇인가가 필요하면 그것을 마련해 주셨다. 내 친구들도 내가 놀이를 하는 데 무엇이든 필요하면 기꺼이 도와주었다.(E. 체리아 엮음, 돈 보스코의 회상, 김을순 옮김, 돈보스코미디어, 1998년 초판, 51-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