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이스카리옷은 스승이었던 예수님을 배반한 사도 열둘 중 하나이다. 히브리말로는 יהודה איש-קריות이라 쓰고 희랍어로는 Ἰούδας Ἰσκαριώτης이라 표기한다.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이름이 이름 그 자체의 뜻으로서 praised 곧 ‘찬미를 받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뜻이 실제 유다 이스카리옷의 삶과 연결하여 볼 때는 별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이름을 두고 몇 가지 해석이 있지만 ‘카리옷Kerioth 사람 유다’를 뜻한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카리옷은 유다 남쪽의 한 도시로서 히브리 말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크리욧”(아모 2,2, 여호 15,25)과 같은 곳일 것으로 추정한다. 열두 사도 중에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둘(유다 타대오, 유다 이스카리옷)인데, 서로 구별하기 위해 ‘이스카리옷’을 이름 뒤에 붙인다. 유다 이스카리옷에 관해서 신약성경은 소명, 배반, 죽음에 관한 언급 외에 다른 내용을 별로 자세하게 전하지는 않는다. 다른 사도들이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인 것과 달리 그가 남부 지역의 카리옷 출신이라는 점에서 구별될 수 있고 이 때문에 다른 사도들과 그의 관계에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사도로서 그가 부르심을 받게 된 배경이나 맥락에 관해 성경은 별로 전하지 않지만, 형제들 안에서 그가 “돈주머니”를 맡았다는 직무(요한 13,29)나 “은돈 서른 닢”에 스승을 팔아넘기기 위해 “수석 사제들”과 거래한 내용(참조. 마태 26,14-16), 그리고 그의 이름에 항상 “배반(팔아넘긴)”과 관련된 수식어가 붙는다는 점(참조. 마태 10,4;26,14 마르 3,19;14,10 루카 6,16 요한 12,4) 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너희 가운데 하나…돈주머니…향유”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 이스카리옷을 이미 알고 짐작하며 암시하시듯이 “너희 가운데 하나는 악마”(요한 6,70), “너희는 깨끗하다. 그러나 다 그렇지는 않다.”(요한 13,10),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내가 너희를 모두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요한 13,17-18),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요한 13,21)이라고 하신다. “너희 가운데 하나는 악마”라고 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배반자 유다 이스카리옷을 가리켜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요한 6,71)라고 하시면서 유다 이스카리옷의 아버지를 언급하기까지 하시는데 이는 다른 복음사가들이 전하지 않는 내용이다. 요한복음은 유다 이스카리옷이 “돈주머니”를 맡았던 내용도 독특하게 전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 있는 라자로의 집에 가셨을 때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렸을 때 유다 이스카리옷이 “삼백 데나리온” 값어치를 어찌 낭비하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지 않는가?” 하였다고 하면서 그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설하고,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요한 12,3-6)라고 상세한 설명까지 곁들인다. 마태오나 마르코는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이름을 거명하지 않고 “제자들”, “몇 사람”이라고만 기록하면서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반 기사(마태 26,14-15 마르 14,10-11) 바로 앞 대목에 향유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참조. 마태 26,6-13 마르 14,3-9)에서 향유를 두고 제자 중에서도 유다 이스카리옷이 그 향유에 대한 돈의 값어치를 두고 불평불만의 주축이 되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재물에 대한 사랑이 유다를 규범 바깥으로 이끈다. 돈을 가로채는 것과 배신하는 것 사이에는 미세한 단계만이 있을 뿐이다. 재물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재물을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언제나 타인을 배신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으며 이는 일종의 법칙이자 현실이 된다.
“사탄…처음부터 알고…누구”
유다 이스카리옷이 예수님을 팔아넘기려고 했을 때, 마태오나 마르코에 따라서 본다면 그는 능동적으로 자기가 먼저 나서서 주도적으로 수석 사제들에게 접근하는 것으로 묘사하는데, 루카는 같은 이야기를 전하면서 “사탄이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이스카리옷이라고 하는 유다에게 들어갔다. 그리하여 그는 수석 사제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예수님을 넘길 방도를 함께 의논하였다. 그들은 기뻐하며 그에게 돈을 주기로 합의를 보았다. 유다는 그것에 동의하고, 군중이 없을 때에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루카 22,3-6)라고 기록하면서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반이 사탄의 책동이었다고 밝혀준다. 이러한 필치는 요한복음에서도 “악마가 이미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불어넣었다.”(요한 13,2)라고 비슷하게 드러난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반을 미리 내다보셨음을 분명하게 밝히면서(요한 6,71-72)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요한 6,64) 하고 말해 준다. 요한 복음사가는 공관 복음사가들과 같이 최후의 만찬 때 유다 이스카리옷이 배반하는 것을 기록하면서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요한 13,21) 하면서 예수님의 직접적인 말씀을 통해 이를 분명히 한다. 예수님의 이러한 언급에 “제자들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요한 13,22) 하는데, 이어서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던”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를 시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여쭈어보게” 하였고,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대답하시고, “빵을 적신 다음 그것을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으며”,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고”, 그때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하셨는데도 “식탁에 함께 앉은 이들은 예수님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아무도 몰랐다.”라고 기록한다. 이에 관해서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주머니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예수님께서 그에게 축제에 필요한 것을 사라고 하셨거나, 또는 가난한 이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말씀하신 것이려니 생각하였다.” 한다.(요한 13,21-29) 유다 이스카리옷에 관한 이러한 세부 사항과 제자들의 반응은 요한 복음사가만이 전하는데, 배반자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반 예고나 제자들의 질문들은 공관복음에서도 공통으로 전한다.(마태 26장 마르 14장 루카 22장)
“저는 아니겠지요…큰 무리…누구를…나다…입맞춤”
마태오복음은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고 예수님께서 배반자를 예고하셨을 때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마태 26,23.25)라는 내용을 전한다. 네 복음서 모두 유다 이스카리웃이 스승 예수를 배반할 것이라는 예고가 있었다는 사실과 그 예고에 맞게 실제 배반을 했다는 사실에 동의하면서 유다 이스카리옷이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보낸 큰 무리”와 함께 “칼과 몽둥이를 들고” 유다 자신이 미리 잘 알고 있던 곳,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던 모처에 왔다(참조. 마태 26,47 마르 14,43 루카 22,47 요한 18,3)는 사실을 적시한다. 네 복음서가 이러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기는 하지만, 세밀한 부분에서는 다소 차이를 보이는 부분들도 있다. 예를 들어서 공관복음이 모두 배반자 유다가 예수님께 입을 맞추었다고 전하는데, 요한복음은 그러한 내용을 전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요한복음은 배반자 유다가 무리를 이끌고 예수님께 왔을 때 예수님께서 그 무리에게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으며 그 무리 중에 유다가 함께 있었고, 예수님께서 “나다.” 하고 대답하실 때 무리가 “뒷걸음치다가 땅에 넘어졌다.” 하는 내용을 전해준다. 마르코는 유다 이스카리옷이 같이 온 무리와 미리 입맞춤의 “신호”를 약속하고 “예수님께 다가가 ‘스승님!’ 하면서 입을 맞추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에 대해서 아무 대답을 하지 않으셨고, 곧바로 무리가 “예수님께 손을 대어 그분을 붙잡았다.”(마르 14,44-45) 한다.
마태오는 똑같은 장면에서 유다가 예수님께 입을 맞추자 예수님께서 “친구야, 네가 하러 온 일을 하여라.”(마태 26,50)라며 대답하셨다 하고, 루카는 유다가 “예수님께 입 맞추려고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유다야, 너는 입맞춤으로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느냐?’ 하고 말씀하셨다.”(루카 22,48) 한다. 마태오복음이 전하는 바에 따를 때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끝까지 “배신자”라고 부르지 않으시고 그를 “친구”라고 부르시며 그에게 입을 맞춘다. 이것이 바로 ‘유다에 관한 신비’이다.
“은돈 서른 닢…목을 매달아…피밭”
마태오 복음사가만이 유다 이스카리옷이 스승을 팔아넘긴 대가로 “은돈 서른 닢”을 수석 사제들로부터 받았으며(마태 26,14-16), 얼마 안 가 이러한 돈을 받은 것을 뉘우친 유다가 “나는 죄를 지었소.” 하며 돈을 돌려주려 하였고 그들이 “상관없다” 하며 “그것은 네 일이다.” 하고 뿌리치므로 “은돈을 성전 안에다 내던지고 물러가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라는 사실을 기록하면서 그 돈으로 수석 사제들이 당시 관습에 따라 “피 값이니 성전 금고에 넣어서는 안 되겠다” 하였고, “옹기장이 밭을 사서 이방인들의 묘지로 쓰기로 하였다”라고 밝히면서 돈에 관한 내용이 결국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지만, 오래된 즈카르야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예언(즈카 11,12-13)의 성취였다고 기록한다.(마태 27,5-10) 이처럼 마태오만이 배반자의 회개와 자살을 얘기하는데, 이에 관한 또 다른 부연 설명을 “유다는 부정한 삯으로 밭을 산 뒤, 거꾸로 떨어져 배가 터지고 내장이 모조리 쏟아졌습니다. 이 일이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에게 알려져, 그 밭이 그들의 지방 말로 ‘하켈 드마’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피밭’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시편에 ‘그의 처소가 황폐해지고 그 안에 사는 자 없게 하소서.’ 또 ‘그의 직책을 다른 이가 넘겨받게 하소서.’(시편 69,26;109,8)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사도 1,18-20)라는 베드로의 설교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일부 현대 학자들은 사도행전의 기록과 마태오의 기록이 다른 부분에 대하여 주목하기도 한다. 베드로 사도는 마치 유다 이스카리옷이 부정한 돈으로 밭을 샀다가 죽음에 이르렀다고 기록하지만, 마태오 복음사가는 유다가 “죄 없는 분을 팔아넘겨 죽게 만들었다.” 하면서 뉘우쳐 돈을 내팽개치고 나가서 목매달아 죽었으며 유다가 내팽개친 돈을 사제들이 수거하여 그 돈으로 밭을 산 것처럼 묘사하는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두 기록의 차이점을 조화롭게 연결하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반으로 얼마간의 부정한 돈이 형성되었고 유다가 죽은 상황에서 그 돈으로 구매된 그 “피밭”이라는 부동산이 직접이든 간접이든 유다의 명의였을 것으로 생각하면 해결이 된다. 베드로 사도가 다소 끔찍하게 과장하듯이 유다 이스카리옷의 죽음을 묘사한 부분에 대해서도 유다가 결국 끔찍한 죽음을 맞았다는 점에서는 일치하는 셈이다. 그러나 성체성사의 제정 때에 유다가 분명히 그 자리에 참석하였으며 다른 사도들과 소통을 하였는가 하는 점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고, 유다의 배반 때가 언제인지에 관해서는 확실하지 않으며, 유다의 배반 자체에 대한 다양한 묘사 역시 다소 앞뒤가 맞지 않고 모호한 부분들에서 여러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성경의 본문 자체를 심각하게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어느 정도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다. 하나의 예로서 유다의 배반 시점을 두고 어떤 이들은 베타니아의 향유 사건 후 갑작스러운 결정이었다고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유다의 배반이 수석 사제들을 비롯한 무리와의 긴 협상 과정이 있은 뒤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배반
이러한 본문의 차이점이나 세부적인 내용에 관한 의문에도 불구하고 유다 이스카리옷의 타락과 배반이라는 엄청난 도덕적 문제만큼은 분명하다. 궁극적으로 모든 죄는 신비이다. 과연 어떤 죄가 더 큰 죄이고 어떤 죄가 더 작은 죄이며, 분명하게 자기가 저지른 죄를 미리 알았는지 몰랐는지 하는 문제, 죄를 짓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 그 죄와 함께 하느님의 은총이 어디까지 개입하시는지 하는 문제들은 쉽게 답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다의 배반이라고 하는 죄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죄이면서 신비스럽게까지 보인다. 예수님의 제자로 선택받은 이, 메시아이신 스승 예수님을 따라 그분 곁에서 사도라는 특별한 은총을 누리게까지 된 이가 어떻게 그렇게 하찮은 돈 몇 푼에 유혹되어 배은망덕한 배신을 할 수 있었을까? 더구나 이 모든 것을 처음부터 알고 계셨으며 가늠하고 계셨을 주님, 완고하고 엄하신 분으로서만 아니라 죽음에 이르기까지, “끝까지”(요한 13,1) 제자들을 사랑하신 자애와 자비의 주님이셨음을 생각하면 유다의 배반은 더욱 이해하기가 어려운 문제가 된다. 이런 점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믿기지 않은 유다의 배반이므로 교회의 오랜 역사 안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유다의 배반을 두고 깊이 묵상하고 유다의 배반에 관한 동기나 과정을 더욱더 잘 이해해보려고 애를 써 왔음이 사실이었으며 이는 한편에서 아주 흥미로운 주제였던 것도 사실이다. 배신자는 배신을 당한 편이면서 배신하지 않고 헌신한 사람들 편으로부터 아주 극심한 미움을 받게 마련이므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처지에서는 배반자 유다를 아주 못된 배신자로 여기는 것이 당연했다. 이런 생각들은 성경에 나오는 텍스트상의 여러 어려움을 과장하거나 억지로 짜맞추기라도 하듯이 엮어보려 시도하기도 했으며, 급기야 유다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처음부터 못된 제자였으며 나쁜 제자였다는 식으로까지 표현하려고 하기도 했다. 그런 결과로서 외경의 복음에서는 유다가 어려서부터 사탄에 사로잡혀 있었고, 예수님으로부터 전혀 거룩한 영향을 받을 수 없었으며, 사도로서의 영적인 은총과 빛을 누릴 수 없었던 존재였다고까지 묘사하기도 했다.
선각자?…회개?…교회…성모님의 전구
이러한 내용은 특별히 이레네오, 테르툴리아노, 에피파니우스와 같은 성인들께서 초기 영지주의자靈知主義者들의 이단을 반박하는 대목들에서 역설적으로 잘 드러난다. 영지주의자들의 엉뚱한 이단적 견해들이 현대 작가들의 교묘한 필치 속에서 배반자 유다가 매우 현실적으로 깨어 있었던 제자였다거나 유다가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협조하느라 배반할 수밖에 없었다든지 하는 식으로 그럴듯하게 오늘날까지도 되살아나는 경우들도 있다. 이런 경우에 배반자 유다는 심지어 감사와 존경의 대상으로까지 여겨지기도 한다.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는 사람들은 배반자 유다가 다른 제자들처럼 현세적 왕국을 기대하면서 승리의 시기를 앞당기고자 미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견하지 못한 채 위기를 촉발했다거나 예수님의 체포로 사람들이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왕좌에 앉혀드릴 것을 기대했다는 식의 억지 논리를 펼치기도 하면서 그 증거로 유다는 자기가 생각했던 대로 판이 흘러가지 않고 의외로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죽음에 처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즉시 뉘우치고 회개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뉘우쳤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예수님이 맞으실 결과를 예견하지 못했다는 충분한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많은 살인자가 막상 실제로 살인을 저지르고 나서 후회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경우에도 가톨릭교회는 이런 식의 생각들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이런 식의 해석이나 생각들은 성경 본문에 관한 전통적인 해석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유다의 죄를 죄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또한 유다가 한때 참다운 제자였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견해에도 동조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유다를 열두 사도 중 하나로 선택하신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고, 이는 그가 은총으로 선택될 만큼의 좋은 자질은 지녔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알퐁소…와 같은 교부들에 따를 때, 심지어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에서조차도, 유다 이스카리옷은 분명 지옥에 있는 존재이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운명을 살아야만 했던 유다 이스카리옷의 저주가 부러운 것도 아니고 수많은 성인의 확언에 감히 반대할 논리나 근거가 있지도 않다. 그렇지만 다소 이상한 표현으로 들릴 수 있지만, 오리게네스는 마태오복음 주석에서 불쌍한 영혼인 유다가 목을 맸던 것이 다른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의 용서를 청하기 위해서였다고 기록하고, 니짜의 성 그레고리오 역시 그에게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견해를 피력하며, 아토스의 성 실로안은 아직까지도 우리가 유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만 한다고 말씀하신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는 그분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것을 보고 뉘우치고서는……”(참조. 마태 27,3-5) 하는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 주님께서 유다를 사도요 당신의 동료로 삼으신 선택과 함께 유다의 영원한 암흑의 운명을 둘러싼 신비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무한히 자비하시고 의로우신 하느님을 대신하여 유다의 행동과 태도, 그리고 그의 운명을 판단하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닙니다.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마태 26,24) 하는 말씀과 함께 주님 선택의 신비 역시 그대로 남습니다.』 하신다.
분명 우리는 영혼의 영원한 파멸에 관한 해석을 경계해야 한다. 성화와 성덕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은 전적으로 이를 옹호한다. 영혼의 단죄를 밝히는 빛은 없지만, 영혼의 복락을 비추는 은총과 계시의 빛은 찬란하다. 교회는 구속救贖과 구원救援을 본질로 선포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아직 크라코프의 추기경이자 대주교였을 때 바오로 6세 교황으로부터 로마 교황청의 사순 피정을 지도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모순의 표징’이라는 표제로 ‘마지막 것들-죽음, 심판, 천국, 지옥’이라는 일련의 강의를 진행했다. ‘지옥’에 관한 강의 때 그는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우리에게 아직 하달되지 않은 어떤 다른 명령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계시로부터 우리가 얻은 전통적인 가르침은 현재 우리가 가진 이 모든 것일 뿐이라고 역설했다.
성 비오 5세께서 미사 경문을 간소화하시기 전까지는 미사 경본에 구원이 의심되는 이들의 구원을 위하여 드리는 기도문들이 아직 담겨있었고, 그러한 기도로 그들이 구원을 얻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받아야 할 고통이 다소 경감될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가 있었는데, 이런 내용이 꼭 연옥에 관한 내용만도 아니었다. 이러한 내용은 지옥이라는 것이 자비하신 하느님 앞에서는 당치도 않다면서 지옥 같은 것은 존재할 리가 없다는 식의 무조건 보편적 구원론이라는 오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어떤 면에서 우리에게 적이 안심과 희망을 준다. 지옥에 떨어진 자라 할지라도 구원될 수 있다는 얘기를 가장 대담하고도 줄기차게 강조했던 성인은 아마도 알퐁소 리구리오였을 것이다. 성인께서는 <마리아의 영광들The Glories of Mary>에서 큰 죄를 지었음에도 성모님의 일생에 도움을 주고 헌신하였던 영혼들이 지옥에서 구함을 받았다는 사실의 예를 거듭하여 강조한다. 이러한 영혼들은 죽었다가 다시 생명을 얻어 회개하고 천국에 가기 위해 다시 죽는 것처럼 묘사된다. 그보다 앞서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회개의 은총을 얻기 위해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가 죽게 된 이야기를 강론하면서 큰 소동이 발생하자 속기사들에게 이런 내용을 기록하라고까지 하였다. 얀세니즘이라고 하는 이단에 속한 이들은 알퐁소의 가르침이 지옥에 관한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비난했다. 그렇지만 성 알퐁소께서는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반포하신 현재의 <가톨릭교회교리서>나 <희망의 문턱을 넘어서>라는 저서의 가르침과 분명 일치하는 내용을 말씀하셨을 뿐이다.
유다 이스카리옷이 지옥에 떨어졌느냐 아니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앞에 엄연히 존재하게 된 주님의 자비로운 구원의 현실성이다. 유다는 “뉘우쳤다”면서 “죄를 지었다”라고 인정하지만 즉시 주님께 가서 용서를 청하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을 배반한 유다는 죄인이 틀림없다. 베드로 사도 역시 주님을 부인하고 배반했지만, 그는 참된 통회로 회복한다. 그는 당신을 사랑하느냐는 물어오시는 주님 앞에서 거듭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 21,15-17) 하고 대답한다. 주님 앞에 아무리 큰 죽을죄를 짓는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주님의 자비를 믿어 구하며, 특별히 주님의 어머니이자 죄인들의 피난처이신 성모님의 전구를 빌어 구하면 우리를 용서해주실 것이다. 죄를 지었다 싶으면 한시라도 바삐 그분께 돌아가 그분의 자비를 청해야 한다. 매주 주일 미사의 전례 안에서 우리는 매번 온 우주의 창조보다도 더 위대한 하느님의 업적이 죽을 죄인 하나를 구해 내시는 것이라며 하느님을 찬미한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이 기나긴 교회의 역사와 삶 안에서 고백성사를 통해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안다. 전능하신 하느님의 능력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사실 앞에서 그 하느님의 능력이 우리의 무덤 너머에서도 능히 가능할 것임을 믿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요한 비안네 성인께서 다리 난간에서 강으로 뛰어내려 자살한 영혼에게도 다리와 강물이라는 사이가 있다고 말씀하셨듯이 인간의 마지막 숨과 숨 사이 그 찰나에도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은 가능하다.
은총, 주님과의 우정도 잃을 수 있어…끝까지 열려있는 회개의 가능성
배반자 유다의 못된 점을 일부러 과장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원래부터 나쁘고 사악했으며 좋은 점은 애초에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되면 그의 배반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간과해버리거나 그의 배반에서 얻을 수 있는 가르침을 놓칠 수가 있다. 성인들의 모범을 보면서 성인들이 수많은 인간적인 연약함 속에 살아가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존재이거나 별세계의 존재로 생각하면 안 되듯이 말이다. 그런 식으로 배반자 유다를 그 어떤 선함도 없는 존재이거나 은총이 파고들 여지가 아예 없는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안 된다. 그의 배반을 보면서 우리는 사도라는 큰 은총을 받고 예수님과 밀접한 우정을 나누는 신분이라 할지라도 믿음이 없고 불충실한 사람에게는 어떨 때 그 모든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가르침을 얻는다. 그리고 배반이라는 크나큰 죄에 결코 떨어져서는 안 되지만 작은 죄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생명을 잃는 아주 큰 죄까지도 지을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유다 이스카리옷이 뉘우쳤다고 하는 장면을 두고서도 예수님께서 당신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으나”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29-30)라는 장면을 떠올리며 유다가 그릇된 희망으로 자신을 속이지나 않았는지 염려한다. 배신자의 죽음 앞에서 최악의 상황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이유가 너무나도 많지만, 성경은 주님께서 진정한 회개의 가능성을 항상 열어놓고 계신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이미지 출처-catholic.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