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수요일(마태 6,1-6.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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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9)라는 말씀과 함께 재를 받으면서 사순시기를 시작합니다. 우리 이마에 받는 재는 우리를 흙으로 돌아가게 하면서 우리가 먼지이고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상기하도록 합니다. 우리는 약하고 부실하며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백 년이 가고 천 년이 가면서 우리는 왔다가 갑니다. 광대한 은하계와 우주 앞에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주의 먼지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먼지입니다. 주님께서는 “흙의 먼지”를 모아 당신 손에 드시고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셨습니다.”(창세 2,7) 그러므로 우리는 소중한 먼지이고 영원한 생명으로 운명지어진 먼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하늘을 쏟아부으신 먼지이며 하느님의 꿈을 담은 먼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희망이며 보물이고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재는 먼지에서 생명으로라는 우리 존재의 방향을 상기하게 합니다. 우리는 흙의 먼지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를 빚으시도록 할 때 우리는 놀라운 것이 됩니다. 그렇지만 종종, 특별히 외롭고 어려움에 부닥칠 때 우리는 먼지일 뿐인 우리 자신을 보곤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당신 눈에 우리의 미소함이 무한한 가치를 담고 있다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태어났음을 마음에 담읍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이러한 내용을 마음에 담읍시다. 사순절이 쓸데없는 강론이나 듣는 시기가 아니라 보잘것없는 우리 먼지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우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사순시기는 은총의 시기이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굽어보시고 이렇게 우리 삶이 변화되는 시기입니다. 우리는 먼지에서 생명으로 가기 위해 이 세상에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꿈과 우리의 희망이 (말 그대로) 먼지나 재가 되지 않도록 합시다. 뿌리치지 맙시다. “세상은 산산조각이 되어가고, 두려움은 점점 커가며, 우리 주변에 악이 횡행하고, 사회는 점점 덜 그리스도교적이 되어 가며…이를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하고 의문을 가질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우리 먼지를 영광으로 변화시키실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마에 받는 재가 우리 마음을 꿰뚫어 우리의 생각에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재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먼지를 추구하는 데에 우리 인생을 낭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합니다. 여기서 “나는 무엇을 위해 인생을 사는가?” 하는 질문이 우리의 마음에 생겨날 수 있습니다. 나의 인생이 세상의 부질없는 것만을 위한 것이라면 나는 하느님께서 내 인생 안에 이루신 것을 거부하면서 재요 먼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단지 돈을 벌고, 좋은 시간을 보내고자 하며, 조금 더 특권을 누리고, 승진하기만을 위해 살아간다면 나는 먼지를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내가 충분히 존중받지 못한다고 여기거나 마땅히 받아야 할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만 내가 불행하다면 나는 그저 먼지만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보내진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닙니다. 우리는 훨씬 더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훨씬 더 많은 것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꿈을 현실로 만들고 사랑하기 위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이마에 재를 얹는 것은 우리 마음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이고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하늘로 가는 우리 여권입니다. 우리의 지상 소유는 먼지처럼 흩어져 무용지물이 될 것이지만 우리가 우리 가족, 직장, 교회, 그리고 세상에서 나누는 사랑은 우리를 구원할 것이며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재는 생명에서 먼지로 가는 두 번째요 반대로 가는 길을 상기하여 줍니다. 우리 주변에서 우리는 죽음의 재를 봅니다. 삶이 재로 변하는 잔해들과 파괴, 그리고 전쟁 말입니다. 환영받지 못하는 무고한 사람들,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 버려진 노인들의 삶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계속해서 파괴하면서 먼지와 재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관계들 안에도 얼마나 많은 먼지가 있습니까! 우리의 가정들과 가족들, 우리의 다툼과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력, 사과하고 용서하며 다시 시작해보려고 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먼지들이 우리의 사랑과 인생을 더럽힙니다. 심지어 하느님의 집인 교회 안에서조차도 우리는 너무나 많은 먼지와 세속적인 재를 모아놓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내면을 봅시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위선이라는 재로 하느님의 불을 꺼버리는지! 위선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제거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더러운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애덕을 실천하고 기도하며 단식을 할 뿐만 아니라 이 모든 일을 겉치레나 이중성, 그리고 위선이 없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참조. 마태 6,2.5.16) 그렇지만 우리는 인정받으려고, 그럴듯하게 보이려고, 그리고 우리 자신의 에고를 만족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이 그렇게 자주 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얼마나 자주 우리의 마음 안에서 우리 자신을 노예로 만드는 그릇된 열정에 사로잡히고 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자주 이것을 설교하면서도 저것을 하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자주 속으로는 앙심을 품으면서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우리 자신을 꾸며대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내면에 얼마나 많은 이중성을 품고 있는지 모릅니다.…이 모든 것들이 사랑의 불을 꺼트리는 더러운 재입니다.

우리 마음을 더럽힌 재들을 씻어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느냐고요?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2코린 5,20)라고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과 화해”하라고 하시면서 그냥 요청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빕니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말에서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라고 번역했지만, 영어에서는 “be reconciled to God”라고 하듯이) 바오로 사도는 수동태를 사용하여 직역하면 ‘하느님과 화해가 되라’ 하십니다. 거룩함은 우리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함은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더럽히는 재는 우리 힘으로 제거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사랑하시는 예수님만이 치유하실 수 있으십니다. 사순시기는 치유의 시기입니다.

그러면 우리로서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부활절로 가는 여정에서 우리는 두 가지 여정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재로부터 생명으로, 연약한 인간성으로부터 우리를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인성으로 가는 여정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 앞에 멈춰 서서 그분을 바라보고 묵상하면서 “예수님, 당신께서 저를 사랑하시니 저를 변화하게 해 주소서.…예수님, 당신께서 저를 사랑하시니 저를 변화하게 해 주소서.”라고 반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한번 받고, 그 사랑 때문에 울 수 있으면 우리는 생명에서 다시는 재로 떨어지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다음 제2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화해성사 안에서 하느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느님 사랑의 불이 우리의 죄라는 재를 날려버리기 때문입니다. 고백 안에서 아버지의 포옹은 우리를 내면으로부터 새롭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합니다. 사랑받는 자녀로 살도록, 용서받고 치유된 죄인으로 살도록, 주님께서 우리 편에 서시어 동반해주시도록 우리가 하느님과 화해 되어지기를.

사랑받도록 우리를 내어놓읍시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을 드릴 수 있도록 합시다. 우리가 일어설 수 있게, 그래서 부활을 향해 걸어갈 수 있게 합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재에서 어떻게 일으키시는지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교황 프란치스코, 재의 수요일 강론, 산타 사비나 성당, 2020년 2월 26일-영문에서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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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14세 교황 성하의

2026년 사순 시기 담화

경청과 단식: 회개의 때인 사순 시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사순 시기는 교회가 모성적 돌봄의 마음으로, 하느님 신비를 다시 한번 우리 삶의 중심으로 삼도록 초대하는 때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믿음을 새롭게 하고 일상생활의 불안과 분심이 우리 마음을 잠식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회개로 향하는 모든 길은, 우리가 하느님 말씀의 자리를 마련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일 때 시작됩니다. 따라서 하느님 말씀의 선물과 우리가 그 말씀에 내어 드리는 환대의 자리, 그리고 그 말씀이 불러오는 변화는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사순 여정은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다짐을 새롭게 하며, 그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신비가 완성될 장소인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을 그분과 함께 걸어가는 기쁜 때입니다. 

경청

올해 저는 우선 경청을 통하여 말씀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성찰하고자 합니다. 기꺼이 경청하려는 자세는 다른 이와 관계를 시작하고자 하는 우리의 바람을 드러내는 첫 번째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불타는 떨기 속에서 당신 자신을 모세에게 계시하시면서 경청이 당신을 정의하는 특징 가운데 하나임을 몸소 일러 주십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탈출 3,7). 주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를 보내시어 종살이하던 당신 자녀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해방 이야기는 바로 억눌린 이들의 울부짖음을 귀여겨들으신 데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동참을 이끌어 내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당신 마음속 생각들을 우리와 나누십니다. 그러한 까닭에, 전례 안에서 이루어지는 말씀의 경청은 우리에게 현실 속 진실에도 귀 기울이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성경의 도움으로 우리는 저마다의 삶과 사회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목소리 가운데에서도 고통과 고난을 겪는 이들의 울부짖음을 알아듣고 이에 응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경청하고자 하는 열린 마음가짐을 기르려면, 하느님께서 당신처럼 경청하는 법을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가난한 이들의 처지는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 우리의 삶과 사회, 정치 경제 체제,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회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외침”(레오 14세, 교황 권고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Dilexi Te」, 2025.10.4.,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26, 제1판, 9항)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단식

사순 시기가 경청의 때라면, 단식은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우리 자신을 준비하는 구체적인 길입니다. 음식의 절제는 고대의 수덕(修德) 실천이었으며, 회개의 여정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단식은 바로 육체와 연관되기에 우리가 무엇에 ‘굶주리는지’ 그리고 우리가 생명 유지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더 잘 인식하게 해 줍니다. 더 나아가 단식은 우리가 정의에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을 생생히 느끼게 하고 안주하지 않게 하며 우리의 ‘욕구’를 인식하고 조절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러하기에 단식은 이웃을 위하여 기도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하도록 우리를 가르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영적 통찰을 통하여, 마음을 지키는 이 방식을 특징짓는 것, 곧 현재의 상황과 미래의 성취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을 이해하게 해 줍니다. 성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인간은 지상 삶의 여정 안에서 정의에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을 느끼게 되지만, 그 충족은 내세에 속합니다. 천사들은 이 빵, 이 양식으로 만족합니다. 반면에 인류는 이에 대한 굶주림을 느끼기에, 우리 모두는 갈망하면서 이에 이끌립니다. 이처럼 갈망하며 나아가는 것은 영혼을 확장시키고 그 능력을 키워 줍니다.”(성 아우구스티노, 「단식의 유익·De Utilitate Ieiunii」, 1, 1)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되는 단식은 우리의 욕구를 다스리고 정화하며 자유롭게 할 뿐만 아니라 이를 확장하여 하느님과 선행을 향하게 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진리에 따라 단식을 실천하고, 단식이 자만심으로 이어지는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면, 이를 믿음과 겸손 안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단식은 주님과 이루는 친교에 뿌리를 두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자기 자신을 살찌우지 못하는 이들은 올바르게 단식하지 않는 것이기”(베네딕토 16세, 수요 일반 알현 교리 교육, 2011.3.9) 때문입니다. 단식은 은총에 힘입어 죄와 악에서 돌아서겠다는 우리의 내적 다짐의 가시적 표지로서, 더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도와주는 또 다른 형태의 자기 절제를 수반해야 합니다. “절제만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강하고 참되게 만들기”(성 바오로 6세, 수요 일반 알현 교리 교육, 1978.2.8) 때문입니다.

저는 이러한 점에서 더욱 구체적이면서도 종종 간과되곤 하는 절제의 한 형태를 여러분에게 제안합니다. 곧, 우리 이웃을 불쾌하게 하고 상처 주는 말을 삼가는 것입니다. 같은 자리에 없어 자신을 변호할 수 없는 사람들을 향한 거친 말과 성급한 판단을 피하고 비방과 험담을 삼감으로써, 우리의 언어를 무장 해제하는 일부터 시작합시다. 우리의 가정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일터에서, 소셜 미디어에서, 정치적 담론에서, 매체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말을 헤아려 보고 친절과 존중을 기르도록 노력합시다. 이렇게 함으로써 증오의 말들은 희망과 평화의 말들로 대체될 것입니다.

함께

마지막으로, 사순 시기는 말씀 경청과 단식의 공동체적 측면을 강조합니다. 성경도 여러 방식으로 이 차원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느헤미야서는 백성들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새롭게 하려고 모여서 함께 율법서 봉독을 듣고 단식에 참여함으로써 신앙 고백과 하느님 경배를 준비하던 모습을 이야기합니다(느헤 9,1-3 참조). 

우리 본당, 가정, 교회 단체, 수도 공동체도 이와 마찬가지로 사순 시기 동안 공동의 여정에 나서도록 부름받습니다. 이 공동 여정에서는,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가난한 이들과 땅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는 것이 우리 공동체 삶의 일부가 되고, 단식이 진실한 참회의 바탕이 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회개는 개인의 양심만이 아니라 우리의 관계와 대화의 질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가 기꺼이 현실의 도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는 우리 교회 공동체들 안에서뿐만 아니라 정의와 화해에 대한 인류의 목마름과 관련해서도 무엇이 참으로 우리의 갈망을 이끄는지 깨닫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께 그리고 우리 가운데 가장 작은 이들에게 더욱 귀 기울이게 해 주는 사순 시기의 은총을 청합시다. 우리의 언어 사용도 아우르는 그러한 단식의 힘을 청합시다. 그리하여 상처 주는 말이 줄어들고 다른 이들의 목소리가 잘 들리는 더 넓은 자리를 만들어 나갑시다. 우리 공동체들이 고통받는 이들의 부르짖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리가 되고, 경청을 통하여 해방의 길들이 열리는 자리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준비된 마음과 열정으로 사랑의 문명을 건설하는 데에 이바지합시다. 

여러분 모두와 여러분의 사순 여정에 진심으로 저의 교황 강복을 보냅니다.

(바티칸에서,  2026년 2월 5일,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레오 14세 교황)

*출처: https://cbc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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