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탄 대축일을 두고 로마인들은 원래 ‘festum solis invicti’, 즉 ‘정복되지 않은 태양의 축일’이라 불렀다. 다시 말하면, 이제 동지를 갓 지내고 다시 태양이 더 커지는 날들의 시작 시기를 기념하였던 것이다. 죽은듯싶었던 나무들도 이제 다시 생명을 향하여 새로운 잎들을 준비할 것이다. 그렇게 구유 위의 아기 예수님께서는 세상 만물에 생명을 다시 주실 분이시다.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이다. 예수님의 탄생 장면은 바로 앞 대목에서 서술한 세례자 요한의 출생에 관한 루카 1,57-66과 짝을 이루어 대비를 보인다. 요한의 출생이 할례나 작명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에 예수님의 탄생은 무엇보다도 탄생 그 자체가 중심을 이룬다. 그리고 사제의 집안에서 많은 친척과 친지에 둘러싸여 유복하게 태어나는 요한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초라하게 태어나시고 찾아오는 이도 목동들이다. 그러나 천사들은 그분께서 하느님께 올리시는 영광과 사람들에게 가져다주시는 평화를 선포한다.
예수님의 탄생은 전설이나 신화가 아니며, 구체적인 인간의 역사와 시공간에 펼쳐진 실재의 구원사이다. ‘로마의 평화(Pax Romana)’로 세상의 구원자 행세를 하려 했던 아우구스투스 황제 앞에 ‘하느님의 평화(Pax Divina)’를 펼치실 예수님이 탄생하신다. 조용하지만 강력한 방식으로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신 약속을 이루신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신다. ※ 뒷부분에 교황 프란치스코의 2019년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강론의 번역문이 있음)
1.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
복음은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 칙령이 내려, 온 세상이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다.”(루카 2,1)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실제 당시 황제의 이름은 ‘옥타비아누스’이다. 여기 ‘아우구스투스’는 존자라는 뜻의 존칭이다. 여기 “그 무렵”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무렵인바, 옥타비아누스 때로서 BC 29년부터 AD 14년까지의 통치 기간 중 어느 때일 것이다. 복음사가는 “칙령”이나 “황제”를 들먹이며 예수님의 탄생이 지닌 세계사적 의의를 강조한다. 실제로 옥타비아누스가 세금을 거두어들일 목적으로 제국의 일부에 호적 등록령을 내린 적이 있지만, 제국 전체에 그런 적은 없다. 호적 등록 대신에 인구조사라고 옮기기도 하는데, 이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목적에서 시행되었다.
“첫 번째 호적 등록은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실시되었다.”(루카 2,2) 퀴리니우스는 시리아의 총독으로서 기원전 12년부터 이스라엘까지 다스렸는데, 그가 이스라엘을 로마 속령으로 만들기 위하여 처음으로 호적 등록을 실시한 것은 AD 6~7년이다. 즉 헤로데 대왕이 기원전 4년에 예리코에서 죽은 지 10년 만이다. 예수님께서 헤로데 대왕 생존 시에 탄생하셨다면(루카 1,5. 마태 2,19), 역사상 퀴리니우스의 호적 등록령과는 무관하다. 퀴리니우스가 실제로 헤로데가 죽기 전에 이미 호적 등록을 시작하였는지, 루카가 나중에 실행된 호적 등록을 앞당겨 이야기하는지, 이 구절로는 판단하기 어렵다. 아무튼, 루카는 역사 전체를 위하여 예수님의 탄생의 의의를 밝히려 하지만, 예수님의 탄생 연도를 정확히 나타내지는 않는다. 실제로 예수님의 탄생 연도는 학자들 간에 이론이 있지만 대개 기원전 7년에서 4년 사이로 잡는 경향이 있다.
“모두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본향으로 갔다.”(루카 2,3) 각자 자기의 거주지에서 호적 등록을 한 사례가 있었지만 소위 “본향”, 조상들의 거주지(본적지)로 가서 등록한 사례는 예외적이다. 고대 문헌에 따르면 예외적으로 이집트에서 그렇게 실시한 적이 있기는 하다. 아무튼, 1-3절은 역사적 사실로 보아 허구인 셈이다. 루카는 아마도 마리아가 나자렛에서 베들레헴이라는 변두리 작은 읍내로 옮겨가서 예수를 낳은 연유를 설명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갔다.”(루카 2,4)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1사무 16장)이다. 다윗의 후예인 메시아가 여기서 탄생한다는 설이 유다인들 사이에 퍼졌다.(미카 5,1-2 요한 7,42) 요셉이 다윗 가문에 속했기 때문에(루카 1,27), 그의 양아들 역시 다윗의 후예로 통할 수 있었다.(로마 1,3) 구약성경에서 “다윗 고을(=다윗 성/성읍)”은 통상 예루살렘을 가리킨다.(2사무 5,7.9;6,10.12 이사 22,9)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의 권세에 귀속되어 당신의 탄생지를 옮기시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황제의 권세마저도 이용하시어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시는 출발로 삼으신다. 마리아께서는 해산할 몸을 이끌고 긴 여행을 하신다.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루카 2,5) 유다교에서 약혼은 혼인과 동일한 법적 효력을 갖는다.(신명 20,7;22,23-27) 약혼 기간에 약혼녀와 그의 소유물은 이미 약혼자에게 속하고 약혼녀의 부정不貞은 간음으로 간주되었다.(참조. 루카 1,27)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 첫아들을 낳았다.”(루카 2,6) “첫아들”은 ‘하느님의 차지’인 아들이라는 뜻으로서 마리아에게 다른 아들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밝히려는 것이 아니라, “첫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해야 한다는 율법과 관련된 묘사로서 이 구절을 근거로 둘째 아들이나 셋째 아들이 있었다는 주장을 하기는 어렵다. 이스라엘에서 외아들이든 장남이든 아들을 처음으로 얻으면 하느님의 차지로 간주했다. 하느님 차지인 첫아들을 부모가 사서 기른다는 뜻으로 부모는 첫아들이 나면 한 달 안에 성전비용으로 5세겔(20데나리온)을 바쳤다.(출애 13,2.12-13.15;34,19 민수 3,12-13;18,15-16) 이때 부모나 아기가 예루살렘 성전에 갈 필요 없이 어디서든 제관에게 값을 치르기만 하면 되었다. 루카는 2,22-23에서 바로 이 관습에 대하여 말한다.
2.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루카 2,7)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는 동작은 마리아가 아이를 낳은 후 손수 조치를 했다는 것인데, 이는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다는 뜻이다. 위대한 메시아가 비천하게 탄생하셨다는 것이다. 적어도 위인들이 태어날 때부터 범상치 않았다는 뜻이 있겠다고도 할 수 있다. 모세도 왕골 상자 속에 담겨 갈대 사이에 숨겨져 있었다.(탈출 2,3)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탄생은 당신의 권능이나 영광을 아무것도 암시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과 권능을 오로지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을 섬기는 데 사용하실 것이다.
“여관”이란 그리스 말로 루카 22,11과 마르 14,14에 나오는 “방”과 같은 말이다. “여관”은 예수님의 탄생이라는 거룩한 신비를 맞을 의로운 공간이 아니었다. 예수님께서는 별이 반짝이는 고독과 적막 속에서 탄생하셨다. 요셉 일행은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구걸하듯이 머물 곳을 찾아야만 했다. 요셉 일행이 베들레헴에 얼마 동안 어떻게 머물렀는지는 알 길이 없다. 루카는 그들이 외로웠고 가난했음을 밝히려고만 할 뿐이다.
토마스 머톤은 “여관에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는 대목을 두고 ‘초대받지 못한 주님’이라 하면서 그렇게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방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집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주님께서도 마땅히 그러하셔야만 했다고 표현한다.(아이들의 성탄제에서 방을 구하느라 쩔쩔매는 마리아와 요셉의 안타까움, 그리고 여관의 벨보이가 나중에 자기의 조그만 방을 내어주는 반전 속에서 우리도 예수님을 위하여 공간과 방을 마련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내용은 연극에 자주 사용되는 소재이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2)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가 바로 “표징”이다. 미소한 것이 위대한 것의 표징이요, 약한 것이 권세의 표징이 되며, 가난한 것이 부유함의 표징이다. 하느님의 척도와 인간의 척도가 다르다. 천사들을 통하여 목자들에게 먼저 말씀하신 하느님의 요청은 그 “표징”을 받아들이고 믿어 인정하라는 것뿐이었다. “평화”는 그로 인하여 얻어지는 선물이었다.
“포대기”는 빛 자체이신 분의 빛이 우리의 눈을 멀게 하지 않도록 자신을 숨기신 하느님의 숨바꼭질을 위한 표징으로서 마침내 무덤에 누우실 때 그분의 몸을 다시 감싸게 될 것이다. “포대기”를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을 쌌던 “아마포”와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요한 20,7)이나 예수님을 조롱할 때 그분의 얼굴을 가린 천(마르 14,65), 무덤에 묻힌 라자로의 얼굴을 감싼 수건(요한 11,44), 십자가의 행로에서 만난 베로니카의 수건 등과 연결하여 묵상하는 것도 유익한 일이다. “구유”는 가난의 표징이며 동시에 하느님을 거부한 인간들의 거부의 표징이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 구유는 동물들의 먹이통이다. 주님께서는 세상 모든 이를 먹이실 “생명의 빵”이 되시어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성탄의 메시지는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요 ‘가난한 이들에게로 향한 희망’이며, 이에 대한 ‘세상 만물과 인간들의 기쁨’으로 요약될 수 있다.
3.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루카 2,8)
여기서 “들”은 인간이 세파에 시달리며 험난하게 살아가는 세상이고, “밤”은 죄로 어두워진 인간들의 세상일 수 있다. “목자들”은 남의 풀밭에 짐승을 몰고 가서 풀을 뜯기거나 자기 주인 몰래 양과 염소의 젖이나 양털을 내다 팔기도 했기 때문에 직업상 죄인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이들은 또한 가축들과 외딴 시골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회당의 집회에 참석하거나 안식일 법을 지킬 수 없는 처지의 사람들이다. 바로 이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예수님을 뵙게 된다.
다윗 임금도 베들레헴 부근의 들판에서 양떼를 치다가(1사무 17,15) 왕직에 부름을 받고(1사무 17,28.34-35 2사무 7,8 시편 78,70-72), 기름부음을 받았다.
“목자들”은 당시 가난하고 무식하며 무시당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부자들이나 소위 현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을 목자들이 만나게 된다. “목자들”은 떠돌이 유랑민들이라는 점에서 오늘날 유럽 사회에서 ‘집시’ 쯤에 해당이 될 것이다. 지금 주님께 찾아온 목자들처럼 훗날에도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 것”(루카 15,1)이다. 이렇게 당신의 첫 모습을 목자들에게 허락하신 주님께서 만일 오늘날 태어나신다면 과연 누구에게 당신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이고자 하실까?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루카 2,9) “주님의 천사”는 하느님 자기 자신의 나타나심을 가리키는 한 가지 표현이다. “주님의 영광”은 성서에서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신비가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킨다.(로마 3,23) 루카는 예수님께서 종말에 “주님의 영광”에 싸여 다시 오시리라고 말한다.(루카 9,26;21,27) 그러나 부활 때와(루카 24,26) 그 이전의 거룩한 변모 때에(루카 9,32) 이미 그분의 “영광”이 드러난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루카 2,10) “기쁨이 될 소식”은 곧 “복음”이다. “복음”이라는 낱말은 그리스도교에서 바오로 사도가 처음으로 사용하는 어휘다. 주로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에 관한 전갈을 뜻한다. 여기에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이라는 뜻도 해당된다.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는 주체도 되시고 복음의 내용 자체가 되시기도 한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복음”이 세례자 요한의 활동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마르 1,1)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오늘”은 구원의 때가 시작되는 시간이다. 이 문장에는 예수님에 관한 3가지 존칭이 모두 담겨있다. 즉 “구원자”, “주”, “그리스도”이다. “구원자”와 “주”라는 칭호는 당시 로마 황제에게만 부여되는 칭호였다. 루카는 이를 예수님께 적용한다. 루카 복음에는 이밖에도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루카 1,32 등) “사람의 아들”(루카 5,24 등) “스승님”(루카 5,5 등) 등의 존칭이 나온다. 그리스말 구약성서에서는 “구원자”라는 칭호를 대부분 하느님께만 적용하고(신명 32,15 1사무 10,19 시편 24,5;27,1.9;62,2.7;65,6;79,9;95,1 루카 1,47 1티모 1,1), 더러 ‘이스라엘의 판관들’에게도 붙인다.(판관 3,9.15;12,3 느헤 9,27) 복음서에서 “구원자”라는 칭호는 여기와 요한4,42에만 보인다. 그러나 이 칭호가 파생한 동사는 병자들과 관련하여 여러 번 쓰인다.(예. 마르 3,4;5,23.28.34;6,56;10,52;15,31 등) “주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루카만이 사용하는데, 그는 이로써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곧 메시아이심을 말하면서, 동시에 그분께서 지니신 왕권의 신적 성격을 부각시킨다. 한편, “스승님”이라는 존칭은 루카 복음에만 6회 나온다. 이들 중 가장 빈번하게(무려 42회) 등장하는 존칭은 “주(퀴리오스)”이다. “주님”은 메시아 임금으로서 주님이시고, 구원자로서 주님이시며, 부활하신 분으로서 주님이시고, 교회의 스승으로서 주님이시다. 반면에 “구원자”라는 존칭은 드물게 사용되고 아주 늦게야 교회의 용어로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공관복음 가운데 루카만이 “구원”이라는 낱말을 사용한다. “구원자”라는 존칭이 유다계 그리스도교보다는 이방계 그리스도교계에서 더 많이 사용된 것은 확실하다.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3-14) 여기 천사들의 환호는 루카 19,38에 나오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 제자들의 환호와 그 형식이 같다. 아마도 이는 예루살렘 모 교회에서 부른 노래의 부분일 가능성이 크다.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은 ‘선의의 사람들’, 즉 하느님께서 선의로 돌보시는 사람들이다. 하느님에게서 특권을 받은 사람들이다. 인간의 선의가 아니라 하느님의 선의인 점에 주목할 것이다.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선택된 백성일 수도 있고, 보편주의적 전망에서 하느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는 모든 인간이 될 수도 있다.(참조. 루카 3,6) 하느님께서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는 1열왕 22,19 시편 148,2에서도 비슷한 표현을 볼 수 있다. “평화”는 성서에서 생명이 충만함을 가리킨다.(참조. 1열왕 5,26) 그리고 이는 메시아 시대에 베풀어지는 은혜 그 자체이다.(이사 9,5-6 미카 5,4) 루카는 바로 이 주제를 줄곧 강조한다. 죄로 갈라졌던 하늘과 땅을 은총이 다시 결합하실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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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조건 없이 오시며, 받기 위해 주는 논리를 따르지 않습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이사 9,1). 제1독서의 이 예언이 복음에서 실현되었습니다. 고장에서 목자들이 밤에도 양 떼를 돌보고 있을 때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습니다”(루카 2,9). 어둠이 내린 땅에 하늘에서 빛이 나타났습니다. 어둠을 비추는 이 빛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티토 2,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티토 2,11) 하느님의 은총이 오늘 밤 이 세상을 감쌌습니다.
이 은총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삶을 변화시키고, 역사를 새롭게 하며, 악에서 해방시키고, 평화와 기쁨을 심어주는 사랑입니다. 오늘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드러났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우리의 사랑을 받으시려 작아지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포옹할 수 있도록 아기가 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은총’이라고 말하는가?” 그것은 완전히 거저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하기 위함입니다. 이 세상은 모든 것이 ‘받기 위해 주는 논리’에 반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거저 오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흥정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을 누릴 수 있기 위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결코 그 사랑에 보답할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오늘 밤 우리는 우리가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작아지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우리 일로 분주할 때도 그분께서는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성탄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심지어 가장 나쁜 사람들까지도 계속해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그분께서는 오늘 저에게, 여러분에게, 우리 각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언제나 너를 사랑할 것이다. 너는 내 눈에 소중하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올바르게 생각하고 잘 행동하기 때문에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그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여러분에게 달린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릇된 생각을 할 수 있고, 온갖 잘못을 저지를 수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가 착하면 하느님께서 선하시다고, 우리가 악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벌하신다고 생각하는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온갖 죄 안에서도 우리를 계속 사랑하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변하지 않으며 변덕스럽지 않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충실하고 오래 참습니다. 우리가 성탄절에 찾은 선물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절대적 무상성, 절대적 자애심을 놀라움으로 발견합니다. 그분의 영광은 우리를 현란하게 하지 않으며, 그분의 현존은 우리를 겁주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사랑의 풍요로움으로 우리의 마음을 얻으시려 완전한 가난에서 태어났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은총은 아름다움과 동의어입니다. 오늘 밤,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아름다움 안에서 우리의 아름다움도 재발견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행복하거나 슬프거나, 우리는 하느님의 눈에 아름답게 보입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는 지울 수 없고 해칠 수 없는 아름다움이, 곧 우리 존재의 핵심인 억누를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오늘 하느님께서 우리 인성을 사랑으로 취하시어 당신 것으로 삼으시고, 영원한 “혼인으로” 맺으십니다. 우리에게 이 아름다움을 일깨워주십니다.
진정 오늘 밤 목자들에게 선포된 “큰 기쁨”은 사실 “온 백성의 것”입니다. 분명 성인(聖人)들이 아니었던 그 목자들처럼, 우리 역시 연약함과 허물들을 지니고 그곳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목자들을 부르신 것처럼 우리도 부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삶의 어두운 밤에 목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루카 2,10). 용기를 내십시오. 신뢰를 잃지 말고,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것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늘밤 사랑이 두려움을 이겼고, 새로운 희망이 나타났습니다. 하느님의 온화한 빛이 인간의 교만의 어둠을 이겼습니다. 인류여,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을 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 은총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한 가지만 하면 됩니다. 이 은총을 받는 것뿐입니다. 하느님을 찾으러 나서기 전에, 우리를 먼저 찾으시는 그분께서 우리를 찾을 수 있도록 내어 맡깁시다.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그분의 은총에서 시작합시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구세주이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의 온유한 사랑(tenerezza)이 우리를 감쌀 수 있도록 우리를 내어 맡깁시다. 그분께서 사랑하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지 않을 아무런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잘못되든, 교회가 잘못되어 돌아가든, 세상의 일이 잘 되지않든 간에, 더 이상 변명거리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부차적인 것들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열광적인 사랑 앞에서, 온전히 온유하고 친밀감 있는 사랑 앞에서는, 우리가 어떤 변명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탄을 맞이하며 던질 물음은 이것입니다: “나는 하느님께 사랑받기 위해 나 자신을 내어 맡기고 있는가? 나를 구원하러 오시는 그분의 사랑에 나 자신을 내어 맡기는가?”
이토록 위대한 선물은 감사를 받아 마땅합니다. 이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은 감사할 줄 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감사를 소홀히 하며 살아갑니다. 오늘은 감사하다고 말하기 위해, 감실과 성탄 구유와 여물통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좋은 날입니다. 선물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그런 다음 예수님과 같은 선물이 됩시다. 선물이 된다는 것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남들을 바꾸려 들지 않고, 우리의 삶을 선물로 내어 놓으며, 우리 자신을 바꾸기 시작할 때, 우리가 변하고, 교회가 변하고, 역사가 변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밤 우리에게 그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군가를 강요하거나 말의 힘으로 역사를 바꾸지 않으셨으며, 당신 생명의 선물로 세상을 바꾸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기까지 기다리지 않으셨으며,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거저 주셨습니다. 우리도 이웃에게 선을 행하기 위해 그들이 좋은 사람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맙시다. 교회를 사랑하기 위해 교회가 완벽해지길 기다리지 맙시다. 다른 이들을 섬기기 위해 다른 이들이 우리를 존중하길 기다리지 맙시다. 우리가 시작합시다. 이것이 바로 은총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거룩함(성덕)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 무상성을 지키는 일입니다.
한 아름다운 전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목자들은 다양한 예물을 들고 마구간으로 달려갔습니다. 저마다 자신이 갖고 있던 것을 가지고 갔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노동의 결실을, 어떤 이들은 귀중한 물건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들이 관대함으로 (자신들의 예물을 아기 예수님께) 바칠 때,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목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가난했기에 아무것도 바칠 게 없었습니다. 다른 이들이 서로 다투어 예물을 바칠 때, 그는 창피해하면서 한쪽 구석에 서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요셉 성인과 성모님은 너무 많은 선물을 받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특히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던 성모님은 더욱 그러했습니다. 성모님은 그 목자가 빈손으로 서 있는 모습을 보고, 그를 가까이 불렀습니다. 그런 다음, 아기 예수님을 그의 팔에 안겨주었습니다. 그 목자는 자신의 손에 아기 예수님을 받은 후, 자신에게 합당치 않은 것을 받았다는 것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물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목자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습니다. 항상 텅 비어 있던 자신의 손은 이제 하느님의 요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부끄러움을 떨쳐내고, 다른 이들에게 아기 예수님을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큰 선물을 자신만을 위해 간직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만일 여러분의 손이 텅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고, 여러분의 마음에 사랑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그렇다면 오늘 밤은 여러분을 위한 밤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비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이 은총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성탄의 빛이 여러분 안에 빛날 것입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9년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번역문 출처. 바티칸 뉴스, 한국어판)
그냥 사랑주시는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아주 오래만에
부끄럽지만 판공성사를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전
마ㅡ음이 더욱 넉넉해지면서
내게 오신 은총의 축복을 음미했습니다.
1년동안 성당 열심히 다닌
저를 칭찬해주었습니다.
동지가 끝났으니 또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이지요.
전 또 사랑의 화신이 되어 움직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기 예수님을 받는 빈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