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man, bored and phone with texting on couch, tired and contact with scroll on social network. Girl, smartphone and click on mobile app at night, chat and annoyed on sofa in living room at apartment.
오늘날 사람들은 소식·사건·사고·정보를 주로 어디에서 접할까? 신문이나 라디오, TV일까?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실시하여 2025년 2월 3일에 발표한 ‘2024 언론수용자 조사’ 결과에 따르면 종이신문 뉴스 이용률은 9.6%, 라디오 뉴스 이용률은 6.6%로 매우 낮은 수준이며, 미디어별 뉴스 이용률에서 텔레비전과 인터넷이 각각 72.2%를 보인다. 이렇게 사람들은 전통 매체로부터 인터넷 기반 매체로 이동하고 있다. 미국의 조사들 역시 다수(80%대)에 달하는 성인이 자신의 주요 뉴스 및 공공 사건을 접하는 주된 출처가 디지털 플랫폼이라고 보고한다. 스크롤이 신문을 대체했고, 디지털 화면의 정보흐름이 저녁 뉴스를 대체했다. 특히 소셜 미디어는 단순한 배포 채널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이 걸러지는 렌즈이다. 사람들은 SNS 정보흐름의 논리, 곧 알고리즘적 사고를 일상으로 옮겨온다.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그를 알리는 소식과 그 소식을 접하는 우리의 놀라움과 논쟁, 비난과 반박이 순식간에 증폭된다. 인간의 끔찍한 죽음을 알리는 내용마저도 금세 어디론가 디지털 파편 속에 묻힌다. 정보의 흐름과 뉴스 목록, 그리고 우리의 감정과 반응이 디지털 공급망에 올라타면서 알고리즘이라는 렌즈가 작동한다. 이러한 렌즈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분노를 자극하고 눈길을 자극하면 할수록 더 멀리 가 닿을 것임을 이미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진보는 더욱 진보적일 수밖에 없고, 보수는 더욱 보수일 수밖에 없다는 듯이 서로 눈을 부라리게 된다. 쪼개지고 분열한다. 디지털 시스템은 우리가 무엇을 알고,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도록 만드는지까지도 개입한다. 진실과 사실이 아닌 확률로 우리의 관심을 재편하고 분류한다. 의미가 아닌 예측으로 널리 퍼지는 것만이 살아남는다. 알고리즘은 하나의 단순한 사실에서 출발하여 어느새 우리 기억 자체의 개념까지를 지배하려 든다.
이러한 영향은 우리의 일상이나 인간관계에서도 쉽게, 분명히 드러난다. 논쟁 뒤에 음 소거로 처리된 친구, 저마다 숟가락과 젓가락 대신 전화기 한 대씩을 손에 들고 하는 가족 식사, 의심으로 걸러진 인간관계들… 이들이 일상의 균열이 되고, 대화는 적대감으로, 경청은 조롱으로 대체되며, 침묵과 불신이라는 폭력으로 양극화된다. 여기에 이미 온라인 정보 생태계에서 비중을 빠르게 늘리고 있는 인공 지능이 가세하면서 한술 더 뜨게 된다. 진리가 아니라 진리처럼 들리는 것을 확률로 예측하는 기계의 뛰어난 계산이 왜곡을 확산한다. 이럴 때 사람은 사실이나 진리보다 ‘우리 편’을 더 신뢰한다. 그렇게 심화된 양극화는 인간의 분노가 아니라 분노를 증폭하는 시스템으로 유지된다.
신앙은 다른 길을 제시한다. 신앙은 현실을 데이터의 출력이 아닌 선물과 은총으로 보고, 인간을 정보 집약체가 아닌 하느님의 모상으로 본다. 신앙은 속도와 확률의 논리를 거슬러 저항하고, 느린 시선으로 보며,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것을 주시하고, 최적화될 수 없는 것에 정성을 쏟으며, 의미와 관계의 언어를 복원하려 애쓴다. 신앙인은 클릭과 말, 침묵의 순간마다, 반응하기 전에 ‘과연 이것이 참인가, 이것이 나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깊게 묻고 숙고한다. 신앙인의 말은 확신보다 절제, 분노보다 진실에 뿌리를 둔다. 신앙인은 경멸과 조롱 없는 진실, 구경거리를 만들지 않는 조용한 교정, 때로는 침묵이 말보다 더 큰 사랑임을 안다. 여기에 신앙인은 도덕적 선택과 실천, 그리고 윤리적 책임을 스스로 진다.
신앙인은 오늘날 기계 기술의 반대자도 아니고 비판론자도 아니다. 디지털 윤리의 비판자로서가 아니라 건축가로 참여하면서 기계 기술이 바로 갈 수 있는 길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를 위해 교육의 중요성과 진실한 교육자의 중요성도 놓치지 않는다. 신앙인은 오늘의 기계 기술을 숙명처럼 함께 살아간다. 그러나 그 안에서 부모의 마음으로 바른길을 기도한다.
아, 어렵다. 양극화된 디지털시대에서 사는 신앙인. 비판자가 아닌 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