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의 전례 복음은 통상 요한 2,13-22을 취한다. 이른바 ‘성전 정화 사건’으로 알려지는 대목이다. 이 복음의 내용은 다소 차이가 있으나 이례적으로 공관복음을 넘어 4 복음서가 공통으로 전한다.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에 교회는, ① 예수님의 부활로 이루어진 ‘예수님’이라는 성전 ② 주님만의 집이어야 할 살아있는 성전인 우리 ③ 성전에서 드려야 할 참다운 제물에 대하여 묵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뒷부분에 아를의 성 체사리우스 주교(활동 시기: 468/470~542년) 말씀인 고유 성무일도 독서기도 제2독서를 수록하였다. 2024년도에 봉헌 1700주년을 맞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기리는 이유와 유래 등에 관하여는 다음 링크를 참조할 것: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241023500040
1. “내 아버지의 집”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요한 2,13)로 복음은 시작한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 “파스카 축제”를 세 번 지내신 것으로 기록한다.(요한 2,13;6,4;11,55)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하는데, 예루살렘 도시가 해발 760m쯤이고 갈릴래아 호수가 해저 200m쯤이므로, 실제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 예수님께서는 해방절을 맞아 순례차 예루살렘으로 가신 것으로 보인다.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요한 2,14)라고 하는데, 여기 “성전”은 성전 마당에서도 외부에 속한 구역인 이른바 ‘이방인 마당’이겠다. 명절엔 이곳에 여러 장사꾼과 환전상이 대성황을 이뤘다. 순례자들이 성전에 바칠 제물과 성전세를 마련해야 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열거된 짐승들은 제물로 바치는 것들이다. 그리고 성전세는 유다 돈으로만 바쳐야 하기 때문에, 유다 밖에서 사용되는 로마 돈을 바꾸는 환전상들도 필요하였다.(마태 17,27 참조) 순례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물을 직접 가지고 오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은 현지 예루살렘에서 구입하였고, 성전세를 내야 하였는데 여러 지역에서 몰려들었으므로 성전세를 납부하기 위해 환전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의 의도가 드러난다. “내 아버지의 집”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이미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에서도 있었던 표현이다. 곧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분명하게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인식하고 계셨다.(요한5,17.19 참조) 따라서 성전 정화를 예수님의 메시아적인 행위로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곧잘 ‘예수님의 아버지 집’을 마치 ‘우리들의 집’인 것처럼 여기고 우리 마음대로 어질러놓고 더럽히기도 한다. 예언자는 일찍이 “너희는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으로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고, 너희 자신도 모르는 다른 신들을 따라간다. 그러면서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 안에 들어와 내 앞에 서서,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이런 역겨운 짓들이나 하는 주제에! 너희에게는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이 강도들의 소굴로 보이느냐? 나도 이제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예레7,9-11)라고 개탄한다.
우리들의 인생 안에서 하느님께로 향한 사랑이 자리 잡아야 할 곳에 죄, 교만,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으면, 그곳에서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하시는 주님이시다. 예수께서는 근본적으로 성전에서 그와 같은 형태로 행해지던 제사가 의미 없다 하신다. 얼른 보아 제물을 놓고 하는 제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이 사건을 해석할 수도 있는데, 단순히 양심의 가책을 덜어내는 제례 의식과 무관하게 하느님께서 즐겨 받으실 제물은 올바른 행실과 삶의 전환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이 사건을 해석해야 한다. 올바른 생활과 행위 없이 단지 제의를 통해 하느님의 은혜를 사고파는 곳으로 만들지 말라는 뜻으로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하신다. 구약 전례의 중심이요 예배의 중심주제인 안식일에 관한 논쟁이 시간에 관한 논쟁이요 사건이라면, 성전 정화 사건은 공간에 관한 논쟁이요 사건이라 할 것이다.
시공時空을 넘어서고 새로운 시공의 창조자이신 예수님, 예수님 자신이 참된 예배의 중심이요 표징이시다. 예수님은 배고픈 이에게 빵을 주는 자선과 측은한 이들을 그저 고쳐주는 것으로 당신 일생을 살고자 하지 않으셨다. 즉 단순한 사회사업가나 자선가가 되고 싶지는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제사를 완전히 파기하고 신약의 제사, 곧 예수님 스스로 제관이요 제단이며 제물이 되시는 새로운 제사의 제정을 꾀하셨다. 사회 근본구조의 변경과 그 구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의 변화를 도모하고자 하셨다. 그래서 이와 같은 행위는 기득권층인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 그리고 원로 사제들과 같은 이들에게는 대단한 위협이 되었고 결국 예수님 죽음의 이유가 되기에 이른다.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요한 2,17) 제자들이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불태우고”(시편 69,10)라는 성경 말씀을 생각함으로써 이 상황의 의미를 이해했다는 것이다. 즉, 제자들이 하느님의 집에 대한 예수님의 열정이 위험한 결과, 곧 죽음을 초래할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이 행동이 메시아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수난의 한 예고로 본다.(시편에 과거로 되어 있는 동사를 미래형으로 바꾼 점, 그리고 복음서 전체의 맥락이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2. “무슨 표징을 보여줄 수 있소?”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요한 2,18) 앞 절에서 제자들은 이해했는데, 반면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성전 일에 간섭하시려면 어떤 기적적인 행동으로 당신의 권한을 확증해 보이셔야만 한다고 요구한다.(마태 12,38;16,1 마르 8,11 루카 11,16.29-30 참조) 이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이 요구하는 표징이다. 이들의 표징 요구는 유다 지도자들이 “무슨 권한으로”(마르 11,28) 하며 예수의 권한을 문제 삼던 유다 지도자들의 물음과 유사하다.(마르 11,27-33 참조)
3.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
이에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하신다. -유다인들이 요구한 표징 요구에 동문서답하듯이 제시하신 표징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대답은 듣는 이에 따라 오해를 일으킬 수도 있는 계시 말씀이다.(요한 3,3;4,10.32 등 참조) 허물어야 할 옛 성전과 예수님으로 다시 지어야 할 새로운 성전에 대하여 묵상해야 한다. 성경은 누누이 예수님과 함께 지어야 할 성전을 역설한다: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이십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선택된 값진 돌이십니다. 여러분도 살아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1베드 2,4-6)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 2,20-21) “나는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고 나에게 기도하는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리라. 그들의 번제물과 희생 제물들은 나의 제단 위에서 기꺼이 받아들여지리니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이사 56,7)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우리 가운데 당신 장막을 드리우셨다.”(요한 1,14)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요한 2,20) 성전 정화 사건이 예수님 공생활 초기의 사건이라고 추정하게 하는 구절이다.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그것을 크게 증축하고 개축한 임금의 이름을 따서 ‘헤로데 성전’이라고도 불린다. 이 공사는 기원전 20/19년에 시작되었으므로, 요한복음서 저자가 기술한 바에 따르면 46년 후인 복음의 예수님 활동이 27/28년이 된다. 이때 성전 건축 공사가 끝나지는 않았지만, 주요 부분들은 이미 지어져 있었다.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2,21) “당신 몸”, 곧 예수님의 몸이 성전이라고 요한복음 저자가 설명한 셈이다.(묵시 21,22 1코린 12,12 참조) 요한 복음사가의 이러한 설명으로 19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계시 말씀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키는 것으로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즉, 예수님께서는 당신 몸을 (죽음으로) 허물도록 자유롭게 내어주시지만, “사흘 안에 다시 세우신다.(부활하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 자신에게 부여된 죽고 부활할 자유나 권능도 아울러 시사된다.(요한 10,18 참조) 예수님의 “몸”이 “성전”, 곧 예배드리는 장소(요한 1,51 참조)이므로 “영과 진리 안에서”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이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안에서 시작한다.(요한 4,23 참조)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영과 진리 안에서”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중심이요(요한 4,21-22), 하느님 현존의 장소이며(요한 1,14), 생명수가 넘쳐흐르는 영적 성전이다.(요한 7,37-39;19,34)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요한 2,22) “되살아나신 뒤에야”는 ‘예수 부활 후 성령을 받고나서야(요한 14,26 참조)’로 대치될 수 있다. “되살아나다”가 그리스 말 본문에서는 19절과 20절의 “다시 세우다”와 같은 동사이다. 앞의 것은 타동사의 의미를 지닌 능동태, 뒤의 것은 자동사의 의미를 지닌 수동태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 중에 하신 일과 말씀을 제자들이 완전히 이해하게 되는 것은, 그분의 부활과 성령의 은총 덕분이다.(요한 12,16;14,26;15,26 루카24,45 참조) 예수님의 참 성전은 오랜 작업으로 이루어진 구약의 성전을 허물고 예수님의 부활로 이루어진 신약의 성전이다.
예수의 몸이 곧 성전, 곧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장소(요한 1,51)이므로 영과 진리 안에서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이 예수와 함께 예수 안에서 시작된다.(요한 4,23) 부활한 그리스도의 몸은 영과 진리 안에서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중심이요(요한 4,21-22), 하느님 현존의 장소이며, 생명수가 넘쳐흐르는 영적 성전이다.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요한 4,21-23) 하셨다.
오늘 제1독서는 이 성전이 “바닷물이 되살아나게 하는 물,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나게 하는 물, 모든 것이 살아나게 하는 물, 잎도 시들지 않고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게 하는 물”이 흐르는, 바로 예수라는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참조. 에제키엘 47,8.12),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요한 19,34)이 흐르는 성전을 노래한다. 우리 주님께서는 과연 예루살렘도 아니고, 인간들의 손으로 지어진 벽돌과 돌멩이에 갇혀계시는 주님이 아니신 것이니, 대사제이신 예수님의 몸으로 봉헌된 예수님의 희생 제사 안에서만 이루어질 참다운 예배가 우리가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이다.
우리 자신도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성전이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를 두고 루카와 바오로 사도는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는 살지 않으십니다.”(사도 17,24)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7)라고 설파한다. 원래 악마가 살고 있던 곳에 주님 세례의 은총이 악마를 쫓아내시고 당신이 거하실 장소로 만드신 것이다. 그 성전에서 우리가 드려야 할 참다운 제물은 “나는 향백나무 궁에 사는데, 하느님의 궤는 천막에 머무르고 있소”(2사무 7,2)라는 다윗 임금과 예언자 나탄의 이야기에서 들려주는 말씀으로 되돌아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마태 23,23) 하셨고,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 12,33) 하셨다.
*성경은 참다운 제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들을 들려준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1사무 15,22)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 너희가 나의 얼굴을 보러 올 때 내 뜰을 짓밟으라고 누가 너희에게 시키더냐?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나의 영은 너희의 초하룻날 행사들과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그것들은 나에게 짐이 되어 짊어지기에 나는 지쳤다.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너희에게 나는 너희 앞에서 내 눈을 가려버리리라.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한다 할지라도 나는 들어주지 않으리라. 너희의 손은 피로 가득하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이사 1,11-17)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호세 6,6)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말라3,3) “예루살렘과 유다에 있는 모든 솥도 만군의 주님께 성별된 것이 되어, 제물을 바치려는 이들이 모두 와서, 그 솥들을 가져다가 고기를 삶을 것이다. 그날에는 만군의 주님의 집 안에 더 이상 장사꾼들이 없을 것이다”(즈카 14,21) “나는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고 나에게 기도하는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리라. 그들의 번제물과 희생 제물들은 나의 제단 위에서 기꺼이 받아들여지리니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이사56,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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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로써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 즐거움과 기쁨 가운데 이 대성당의 축성 기념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참되고 살아 있는 성전은 우리 자신이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교 백성들은 거기에서 영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머니로 여겨지는 성전의 축일을 지내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처음 태어날 때 우리는 하느님의 분노의 그릇이었지만 다시 태어날 때에 자비의 그릇이 될 은혜를 받았습니다. 첫 출생은 우리를 죽음에로 이끌고 두 번째 출생은 생명에로 되불러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세례받기 전에는 우리 모두가 마귀의 신전이었지만 세례를 받은 후 그리스도의 성전이 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우리 영혼의 구원에 대해 좀 깊이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참되고 살아 있는 성전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세워진 성전이나” 나무와 돌로 만들어진 집에서 “거하지 않고” 특히 만물의 창조자께서 당신 손으로 또 당신의 유사성에 따라 지어내신 영혼 안에 거처하십니다. 위대한 바오로 사도는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그 성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어 우리 마음에서 마귀를 쫓아내고 우리 안에 당신 성전을 마련해 주신 만큼, 우리의 이 성전은 주님의 도우심으로 또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우리의 악행으로 인해 아무런 훼손도 입지 말아야 합니다.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께 해를 입힙니다. 먼저 말씀 드린 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시기 전 우리는 마귀의 신전이었습니다. 그 후에 하느님의 집이 될 영광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친히 우리를 당신의 거처로 만들어 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가 이 성당의 축성 기념일을 기쁨 속에 지내고 싶다면 우리의 악한 행실로 하느님의 살아 있는 우리의 이 성전을 파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 알아들을 수 있게끔 한마디 하겠습니다. 우리가 성전에 올 때마다 그 성전이 청결하기를 바라는 바대로 우리 영혼도 그처럼 청결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 성전의 청결을 보존하고 싶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을 죄의 오물로 더럽히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이 성전이 광채로 빛나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면 하느님께서도 여러분 영혼에 암흑이 끼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은 주님의 말씀대로 그 성전 안에 선한 행위의 광채가 빛나고 하늘에 계신 분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대성전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영혼에 들어가고 싶어 하십니다. 주 친히 이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거처하고 그들과 함께 걸어가리라.”(아를르의 성 체사리우스 주교의 강론에서, Sermo 229,1-3: CCL 104,905-908; 고유 성무일도 독서기도 제2독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