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지식

가을 꽃꽂이 by M.Y. Lee

“앎·지식”은 교육, 학습, 경험 등을 통해 얻은 무엇인가에 관한 앎이다. 그런데 지식에는 실제로 알지 못하면서도 알고 있는 듯 착각하거나 ‘~척’하는 건너편의 지식, 남에게 팔아 돈을 벌기 위한 지식, 누군가를 조종하거나 통제하기 위해 무기가 되는 지식 등이 있다.(*참고. 김건중, 지식답지 않은 지식, 경향신문, 2006년 9월 15일) 이들은 성경의 언어로 “사이비 지식의 속된 망언과 반론들”(1티모 6,20; ψευδωνύμου γνώσεως 프슈도뉘무 그노세우스)로서 타인의 삶에 걸림돌이 되는 지식일 때가 많다. 예수님께서도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52) 하시면서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을 나무라시고 한탄하셨다.

바오로 사도 역시 이를 경계한다. 사도는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고 일어서는 모든 오만”(2코린 10,5)을 경고하면서 “지식 때문에 멸망하게”(1코린 8,11) 될까를 두려워했다. 바오로 사도에게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필리 3,8 참조.콜로 2,2 2코린 2,14)만이 중요했으며 “하느님을 아는 지식”(콜로 1,10 2코린 10,5)과 “하느님의 뜻을 아는 지식”(콜로 1,9)이 지식다운 지식이었고, “참지식”(콜로 3,10)이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8)라고 힘주어 말한다.

영어에서는 곧잘 knowledge라고 두루 번역하곤 하지만 성경에서 ‘앎’이나 ‘지식’을 가리키는 말은 여러 가지가 있다. 각 단어는 ‘앎’의 깊이, 방식, 혹은 맥락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다.

체험적 지식: ‘기노스코(γινώσκω, ginōskō)’라는 말은 경험적·인격적인 앎이며 점진적인 앎이다. 단순한 정보의 습득이 아니라 관계와 체험을 통해 얻어지는 인격적 앎이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체험적으로 알아가는 앎에 해당한다.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8,32) 하실 때의 깨달음에 가깝다.

직시적直視的 : ‘오이다(οἶδα, oida 혹은 에이데나이eidenai)는 직시적이고 즉각적인 앎이다. ‘보다(에이돈 εἶδον, to see)’라는 어근을 지니므로 ‘보아서 아는 것’이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마태 25,12)에서처럼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이미 아시는 경우에 자주 사용된다.

깊은 지식: ‘에피그뇨시스(ἐπίγνωσις, epignōsis)’는 완전하고 충만하게 아는 것이다. ἐπί + γνῶσις라는 갈래로 말이 구성되어 있으므로 앎에 앎이 더하여 깊이 아는 것을 가리킨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지식에 이르게 됩니다.”(콜로 3,10)에서처럼 ‘이르게 되는 지식’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적·변화적 앎을 뜻한다.

일반지식: ‘그뇨시스(γνῶσις, gnōsis)’는 우리가 통상 아는 일반적인 지식이다. “‘우리 모두 지식이 있다.’는 것을 우리도 압니다. 그러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1코린 8,1) 할 때의 지식으로서 철학적·지적인 앎이다. 참된 신앙의 지식이나 그릇된 영지주의적인 왜곡된 지식을 포함한다.

이해·마음: 노에오(νοέω, noeō) 혹은 ‘노우스(νοῦς, nous)’는 이해하고 생각하여 마음으로 아는 것이다.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거나 그분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게 되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로마 1,21)에서처럼 지식의 주체인 인간 내면을 강조할 때를 가리킨다.

지혜·이해력·분별력: ‘소피아(σοφία, sophia)’ 혹은 ‘쉬네시스(σύνεσις, synesis)’나 ‘프로네시스(φρόνησις, phronēsis, 지혜의 실천적 적용)’는 우리말로 곧잘 지혜나 지적 능력, 이해력, 분별력으로 묘사되면서 앎의 결과나 방식과 연결되어 있다. 1코린 1-3장(특별히 1코린 1,19-25) 에서 많은 예들을 볼 수 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1코린 8,1)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자칫하면 앎·지식은 사랑의 길에 걸림돌이 된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더 풍부해져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필리 1,9)라는 말씀처럼 나의 지식다운 지식이 깊어져야 한다. 주님께서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요한 10,14-15) 하셨으니, 내가 하느님을 아는 것이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는 것에 가까워지고, 하느님 아버지와 아드님께서 서로를 아시는 것에 감히 가까워지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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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thought on “앎·지식

  1. 제가 알고 있는 지식이 분명 하느님의 말씀을 읽어 얻은 지식은 아닙니다. 인간적 지식들로 가득하지요. 하지만 지식을 찾아 헤매던 이유를 가만 생각해보니, 저는 분명 사랑한 대상이 있었습니다. (부끄러워 한 번도 인정한 적은 없지만) 그를 알기 위해서, 그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해서, 더 나은 길로 나아가는 방법을 찾아주고 싶어서 … 오래 치열한 시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 궁극적으로 이런 노력이 절대자 앞에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성경은 읽지 않으면서 말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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