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절규(The Scream)’ by 에드바르 뭉크

고통은 두 가지 얼굴로 다가온다.

하나는 몸을 찢는 외상의 고통,

다른 하나는 마음을 가르는 내상의 고통이다.

몸의 고통은 눈으로 볼 수 있다. 깁스에 싸인 다리, 붕대에 감긴 손, 그 상처는 시간의 손길을 통해 서서히 아물어간다. 사람은 그 고통을 받아들이며,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위안을 붙든다. 그러나 마음의 고통은 다르다. 보이지 않기에 더 깊고, 말해지지 않기에 더 외롭다. 밤마다 상처를 헤집으며 자신을 확인하고, 한없이 쏟아지는 기억의 비에 젖는다. 잊고 싶어 취해도 보지만, 그 몽롱함 속에서 더 선명해지는 것은 잃어버린 것의 그림자뿐이다. 그때, 주변 사람의 위로는 종종 너무 가볍다. “언젠가 다시 만날 것입니다.”라는 말이 사실이어도, 그 말을 듣는 이가 “오늘만큼은 그 말을 견딜 수 없습니다.”라고 반응할지 모른다.

큰 고통 앞에서는 말이 무력하다. 그리고 곁에 있는 이들도 무력해진다. 무엇을 해도 닿지 않는 듯한 침묵의 강가에서는 다만 함께 서 있을 뿐이다. 그때 필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머묾이다. “괜찮다”는 위로보다 그의 침묵 곁에 함께 머무는 일. 그의 눈물 옆에서 나도 잠잠히 눈을 감는 일. 그것이 사랑의 가장 소극적 형태일지라도, 자비의 가장 깊은 언어일 수는 있다. 그 침묵 속에서도 우리는 작게 기도할 수 있다. “주님, 그의 고통이 제 마음에도 닿게 하소서.

저의 무력함이 당신의 자비가 되는 통로가 되게 하소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홀로 말없이 앉아 있어야 하니 그분께서 그에게 짐을 지우셨기 때문이네. 그는 제 입을 먼지 속에 박아야 하네. 어쩌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지.”(애가 3,28-29) 그렇게 먼지 속에 입을 박은 이에게 희망의 숨결이 닿기를. 그리고 그 곁에서 기다리는 우리에게도 그 희망의 은총이 스며들기를. 공감의 은총, 시간의 은총, 희망의 은총이다. 은총은 섭리이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노래했다. “고통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져야 하는 그 무게를 땅의 무게에 돌려주십시오. 산도 무겁고, 바다도 무겁습니다.”(영문 번역 <Sonnets to Orpheus>에서 인용: Don’t be afraid to suffer-take your heaviness and give it back to the earth’s own weight; the mountains are heavy, the oceans are heavy.)

그렇다. 고통은 우리를 땅으로 데려가고, 땅은 다시 우리를 하늘로 밀어 올린다. 고통의 무게를 땅에 돌려줄 수 있을 때, 우리의 영혼은 그제야 가볍게 떠오른다. 그때 고통은 더 이상 우리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우리를 품는 대지의 품, 우리를 새롭게 잉태하는 무거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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