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1961~)는 숫자 1이 광물이고, 2가 식물이라면서 「3은 동물이다. 두 개의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물은 땅도 사랑하고 하늘도 사랑한다. 하지만 어느 것에도 매여 있지 않다. 동물에게는 두려움 따위의 감정과 욕구가 있을 뿐이다. 두 개의 곡선은 두 개의 입이다. 하나가 물어뜯는 입이라면, 다른 하나는 입맞춤하는 입이다. 4는 인간이다. 이 숫자에는 시련과 선택의 갈림길을 뜻하는 교차점이 있다. 인간은 3과 5의 교차로에 있는 존재이다.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 현자가 될 수도 있고, 동물의 단계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 5는 깨달은 인간이다.
이 숫자(5)는 생김새가 2와 정반대이다. 위의 가로줄은 하늘에 매여 있음을 나타내고 아래의 곡선은 땅에 대한 사랑을 나타낸다. 이 단계에 도달한 존재는 현자이다. 그는 보통의 인간이 지니고 있는 동물성에서 벗어나 있다. 그는 세상사에 대해서 거리를 두며 본능이나 감정에 휩쓸려 행동하지 않는다. 그는 두려움과 욕망을 이겨낸 존재이다. 그는 다른 인간과 거리를 두면서도 인간과 지구를 사랑한다.(베르나르 베르베르, 상상력 사전, 열린책들, 2011년, 15-16쪽)」라고 풀이한다. 그에 의하면 숫자 4는 인간이고, 숫자 5는 인간 중에서도 깨달은 인간이다. 그렇지만 그 인간은 언제라도 숫자 3인 동물로 전락할 수 있는 인간이다.
그렇지만,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달리 인류의 역사 안에서, 특별히 교회는 숫자 3을 삼위일체이시며 완전이신 하느님과 하늘을 뜻하는 거룩한 수로, 그리고 숫자 4를 하느님께서 인간과 만물을 위에 마련해주신 땅을 가리키는 수로 알아들어 왔다. 이는 땅을 네모진 것으로 이해했으며 동서남북 사방四方으로 이해했던 것과도 잘 맞는다. 하느님께서 땅을 지으시고 그 땅이 푸른 싹을 돋아나게 하는 것을 보셨을 때,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창세 1,12) 하셨다는 것처럼 오토 베츠Otto Betz 역시 숫자 4를 ‘균형과 안정의 수’로 본다.(참조. <숫자의 비밀>) *「한자에서 원래는 네 개의 가로획으로 숫자 ‘넷’을 나타내었었는데, 이후 ‘나라 국囗’과 ‘여덟 팔八’로 구성되어 지금처럼 변했다. 사방으로 나누어(八) 펼쳐진 영역(囗)이라는 뜻을 담았는데, 옛날에는 땅이 네모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영삼, 한자어원사전, 도서출판3, 2014년, 395쪽)」
성경에서도 숫자 4는 땅과 인간의 세상에서 중요한 수이다. 에덴 동산에서 흘러나온 네 줄기 강(참조. 창세 2,10)에서부터 성경의 마지막 책인 묵시록의 네 가지 생물(묵시 4,6)에 이르기까지 숫자 4는 성경에 여러 번 등장한다. 광야에서 모세가 지었던 성막도 네 귀퉁이를 지닌 직사각형이었으며, 땅의 범주, 땅의 네 계절, 밤낮 하루에 이루어지는 4번의 조수, 네 가지 심판(예레 15,3 에제 14,21), 네 가지 바람(예레 49,36),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넷(잠언 30,18), 땅이 견디어내지 못할 일 넷(잠언 30,21)…… 등 성경의 숫자 넷은 사뭇 중요하다.
1. 네 번째 왕
숫자 넷을 떠올리면 네 가지 길이라기보다는 네 번째 길이라고 해야 더 맞을 이야기가 맨 먼저 떠오른다. 러시아 쪽에서 전해져 내려오던 전설을 1961년에 작품화했던 폴란드 태생이지만 독일어 작가로 알려지는 에드자르트 샤퍼Edzard Schaper(1908~1984년)의 <네 번째 왕에 관한 전설(원제: Die Legende vom vierten KÖnig)>이다. 동방박사 세 사람처럼 값진 선물을 준비하여 메시아 예수님을 만나러 먼 길을 떠났으나 안타깝고 어려운 여러 사람을 돕느라고 길이 늦어지고 준비했던 선물마저 나누어주어야 했던 알타반의 이야기이다. 그는 제때 도착하지 못하여 아기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한참 세월이 흘러서야 아기 예수님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으로 구세주를 만난다.
알타반이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은 다음과 같이 기록된다: 「가운데 세워진 그 십자가를 향하여, 자신의 시선을 더는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는 이제 고개를 꼿꼿이 세운 채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십자가에 가까워질수록 더 자주 걸음을 멈추어야 했지만, 30여 년 전에 하늘로부터 오시는 고귀한 존재의 탄생을 경배하기 위해 길을 나섰지만, 30년을 헤매면서도 결코 만나 볼 수 없었던 바로 그 지극한 분을, 보좌에 앉아 있는 그분을, 자신의 왕을,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를 막론하고 가장 위대하신 왕을 알타반은 더욱 확실히 그리고 더욱 마음 깊이 만나 보고 싶었다. 알타반은 가운데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분이 그분임을 확실하게 알았다.(네 번째 동방박사 알타반, 주도홍 옮김, 단열삼열, 2023년, 177쪽)」
2. 진리를 확인하는 네 길
어떤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진리인지 아닌지를 궁금해했던 인간은 철학적 사고 안에서 이를 확인하는 길이 넷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안다’ 혹은 ‘사실이다’, ‘확실하다’고 말할 때 타인이 동의할 수 있는 뒷받침의 근거들은 일반적으로 물증, 이성, 경험, 직관 넷이다.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 물증이 있을 때 이를 사실이라고 믿는다. 만져 보아 알고 보아서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오감五感을 통해서 물증은 관찰과 실험을 통해 얻어지는 증거요 evidence이다. 그렇다고 꼭 물증만으로 어떤 사실을 파악하고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물증이 없더라도 인간은 이성적·논리적 사고(reason, logic)를 통해 어떤 것에 관하여 우리의 고개를 끄덕이며 어떤 사실을 수긍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실은 물증이나 고개 끄덕여지는 논리가 없더라도 경험적 권위에 의해서 입증되기도 한다. 연세 지긋한 노인이 “그건 그렇다”라고 말할 때 이는 거부할 수 없고 토를 달 수 없는 사실이 된다. 물증, 논리, 경험적 권위 말고도 그 무엇을 들이대면서 딱히 주장할 근거가 없어도 남녀노소 누구를 막론하고 본능적으로 “알아차리는” 직관의 앎도 있다. “그냥 그렇게” 보고 느껴 아는 앎이다.
3. 깨달음에 이르는 네 가지 길
영적인 앎이나 자각은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삶을 바꾼다. 독일의 바이올린을 만드는 장인匠人 마틴 슐레스케Martin Schleske(1965년~)는 일상의 사건들을 유심히 관찰하다가 인식(깨달음)에 이르는 길에는 이성의 길, 경험의 길, 직관의 길, 영감의 길 네 가지가 있음을 발견했다면서 우리가 영적인 깨달음을 얻는 이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인식의 첫 번째 길은 이성입니다. 이성적인 사고는 자연의 법칙을 따르지요. 이 길의 바탕에는 삶의 법칙을 탐구하고, 존재의 질서를 궁구하고자 질문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 몸에서 이성적인 사고를 상징하는 곳은 머리입니다. 머리는 사물이나 현상의 관계를 꿰뚫어 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것이 이 길의 모토motto입니다.
인식의 두 번째 길은 경험입니다. 경험적 인식의 토대는 실험입니다. 따라서 이 길을 가려면 실망에 굴하지 않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실험에는 시행착오가 따르게 마련이니까요. 경험적 탐구를 상징하는 신체 부위는 손입니다. 손은 온갖 사물을 만져 보지요. 이 길의 모토는 “나는 탐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입니다.
인식의 세 번째 길은 직관입니다. 직관적 인식은 경험에서 나옵니다. 이 길에서는 자기를 잊고 세상에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인류가 만들어 온 풍요로운 경험의 보고와 무의식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련의 일들이 맞아떨어질 때 직관을 느낍니다. 직관적 인식을 상징하는 신체 부위는 배(腹)입니다. 이 길의 모토는 “나는 느낀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이지요.
인식의 네 번째 길은 영감입니다. 영감을 통한 인식은 은총을 따릅니다. 이 길은 받아들임의 길이며, 예지적인 사랑이 필요한 길입니다. 이 사랑은 묻고 듣는 가슴에 깃듭니다. 우리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듣고자 하는 마음에 영감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직관이 풍요로운 경험의 보고에서 나온다면, 영감은 가난한 마음에서 나옵니다. “받지 않으면, 내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하지요. 영감을 통한 인식을 상징하는 신체 부위는 가슴입니다. 그리고 “나는 받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것이 이 길의 모토입니다.
머리, 손, 배, 가슴은 하나의 몸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영감의 통로가 막히면 우리는 장애를 느끼고, 고통받습니다. 인식에 이르는 네 가지 길은 ‘듣는 사랑의 네 가지 방식’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나는 이 길들을 바이올린 제작 과정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바이올린을 만드는 일이 다른 일보다 특별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내가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사랑하는 영역이 곧 삶의 학교가 되니까요. 동시에 이 일은 내가 고통받는 영역이기도 합니다. 사랑과 고난은 모순이 아닙니다. 서로 반대쪽에 있는 개념일 뿐입니다. 나는 아름다움과 고통만이 인생의 진리를 가르쳐 준다고 확신합니다.(마틴 슐레스케, 바이올린과 순례자, 유영미 옮김, 니케북스, 2018년, 91-93쪽)」
4. 그리스도인의 행동(acts) 방식 네 가지
깨달음(인식)은 행동으로 이어져 삶의 내용이 될 때 비로소 의미가 있으며 빛을 발한다. 주로 영어권에서 교리 수업 등의 활용을 위해 ‘행동(act)’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복수형 ‘acts’를 이용하여 그리스도인의 행동이나 행동 방식을 풀이하려는 시도들이 있다. ‘acts’의 낱개 글자에 단어 하나씩을 붙여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의 행동을 알기 쉽게 설명하려는 시도이다.(※참조. 기도의 행동(ACTS) https://benjikim.com/?p=4692)
A(Adoration) – 찬미와 흠숭, 하느님께 흠숭을 드리고 찬미하는 것은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우치는 것, 하느님 앞에 나의 모습을 겸손하게 살피면서 내 인생의 모든 것이 그분의 주관하심에 달려 있음을 인정하는 것 / C(Confession) – 고백,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1요한 1,9) / T(Thanksgiving) – 감사, 하느님께서 나에게 해주신 모든 것 / S(Supplication) – 청원, 겸손하고 정직하게 하느님께 아뢰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