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10월

9월은 가을의 문턱이다. 9월이 들어서면서 도무지 떠날 것 같지 않던 여름이 물러나고 있다는 것을 심리적 안도감으로 느꼈다. 9월은 영어로 끝이 ‘~ber’로 이어지는 달들(September, October, November, December)의 시작을 알렸다. 어린 시절 영어를 배우면서, 가을을 autumn이라 하기도 하고 fall이라 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느꼈던 묘한 이중성처럼, 가을은 본디 두 얼굴을 지닌 계절이다. 한 해의 절반이 꺾여 중반을 넘어가는 시점이자, 추수와 수확의 때이며, 나뭇잎이 떨어지는 계절이자 열매가 익는 계절이다. 엘리엇(T.S. Eliot)이 4월을 ‘가장 잔인한(크루얼리스트, the cruelest) 달’이라고 불렀다면, 9월이 열어주는 가을 문 뒤에서 맞이하는 본격적인 가을의 한 가운데, ‘가장 멋진(쿠울리스트, the coolest) 달’은 단연 10월이다.

우리나라의 10월은 대부분 사람에게 가장 싫지 않은 달이다. 습기를 털어낸 맑고 시원한 바람이 피부에 닿고, 긴 팔 셔츠의 깃도 부담스럽지 않게 세울 수 있다. 하늘, 멀리 선명하게 보이는 산들, 물들어가는 단풍, 형형색색의 얇고 가벼운 스웨터와 후드티, 커피 냄새, 나무에 달려 익어가는 열매들, 누런 들판, 인도에 수북이 쌓이는 은행잎, 감사제인 추석……. 참 좋은 10월은 왔는가 싶은데 후딱 지나가 버리고 말, 짧은 달이어서 아쉽고도 분주한 달이다.

그렇게 가을이어도 봄의 희망은 만개滿開를 넘어 여름의 무성함이었을 것이다. 가을이 아무리 낭만과 멋을 입어도 가을은 시듦이고 덧없음이다. 가을은 부재, 쇠퇴, 죽음, 음산, 음울, 그리고 슬픔을 거느린다. 낙엽은 눈을 들 때 곧바로 잎이 없는 마른 가지들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도 가을은 하데스에게 납치된 페르세포네가 저승으로 끌려가는 시간이었으며, 딸을 잃고 울며 식음을 전폐한 채 딸을 찾아 애통해하던 어머니 데메테르의 슬픈 시간이다. 짧은 가을은 춥고 긴 겨울로 금세 이어진다.

그렇게 슬픈 가을이어도, 엘리엇이 <네 개의 4중주(The Four Quartets)>에서 “나의 끝 안에 나의 시작이 있다.(In my end is my beginning.)”라고 노래했듯이 사람들은 기어이 그 안에서 희망을 그리며 노래한다. 십자가가 끝이 아니고 부활이듯이 죽음 안에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있다. 위대한 역설의 정점, 가을의 끝, 본격적인 겨울의 복판에는 따뜻한 ‘성탄’이 있다. 체스터톤G.K. Chesterton이 굳이 말하지 않았더라도 베들레헴 조그만 유다 시골 동네의 누추한 동굴에서 온 우주가 완전히 뒤집힌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가을의 끝자락이자 겨울의 시작에 다시 한번 「안티폰O-Antiphon http://benjikim.com/?p=7559」을 장엄하게 노래한다.

그렇게 10월의 시작이 온다. 괜스레 일어나 시를 한 편 읽어야만 할 것 같은 시월의 새벽, 고요한 창가에 앉으면 바람은 기도의 음절이 되고, 낙엽은 성가의 곡조가 된다.

***

시월 새벽(류시화)

1 시월이 왔다 그리고 새벽이 문지방을 넘어와 차가운 손으로 이마를 만진다 언제까지 잠들어 있을 것이냐고 개똥쥐빠귀들이 나무를 흔든다

2 시월이 왔다 여러 해 만에 평온한 느낌 같은 것이 안개처럼 감싼다 산모퉁이에선 인부들이 새 무덤을 파고 죽은 자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3 나는 누구인가 저 서늘한 그늘 속에서 어린 동물의 눈처럼 나를 응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디 그것을 따라가 볼까

4 또다시 시월이 왔다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침묵이 눈을 감으면 밝아지는 빛이 여기에 있다

5 잎사귀들은 흙 위에 얼굴을 묻고 이슬 얹혀 팽팽해진 거미줄들 한때는 냉정하게 마음을 먹으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다 그럴수록 눈물이 많아졌다 이슬 얹힌 거미줄처럼 내 온 존재에 눈물이 가득 걸렸던 적이 있었다

6 시월 새벽, 새 한 마리 가시덤불에 떨어져 죽다 어떤 새는 죽을 때 가시덤불에 몸을 던져 마지막 울음을 토해내고 죽는다지만 이 이름 없는 새는 죽으면서 무슨 울음을 울었을까

7 시월이 왔다 구름들은 빨리 지나가고 곤충들에게는 더 많은 식량이 필요하리라 곧 모든 것이 얼고 나는 얼음에 갇힌 불꽃을 보리라

3 thoughts on “가을, 10월

  1. 가을, 무덤 , 침묵, 눈물, 어둠에 갇힌 불꽃. 참으로 숙고의 계절이 왔음을 신부님이 알림하시는 듯 합니다. 깊이 감사 😊

  2. 가을.

    계절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또 가을이군요.
    안 올 것 같더니만
    괜히 분주해집니다. 추수할 것 찾으러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시
    음미해보며
    새로운 달 시월을 맞이합니다.

Matthew Kim에 답글 남기기 응답 취소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