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6주일 ‘다’해(루카 16,19-31)

지난 주일 ‘약은 집사의 비유’(루카 16,1-8)에 이어서 루카복음 제16장에 자리한 ‘부富의 사용’에 관한 두 번째 비유 ‘부자와 가난한 라자로의 비유’를 오늘 복음으로 듣는다.

1. “어떤 부자라자로라는 가난한 이

비유는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루카 16,19)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어떤 부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고 대신 그의 사치와 그에 따른 행동으로 정의된다. 부자는 과시해야만 하고 남들이 봐주어야만 한다. 이는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별로 변한 것이 없다. “어떤 부자”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부자가 그만한 부를 어떻게 이루었는지 비유는 밝혀주지 않는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과 상속에 의한 것이었는지, 젊은 시절에 고생하여 일군 부였는지, 우연히 어떤 복권에라도 당첨이 되었는지 모른다. 부자가 대문 앞의 라자로에게 어떤 몹쓸 짓을 하였는지도 비유는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부자가 입은 “자주색 옷”은 겉옷이요 “고운 아마포 옷”은 속옷이다. 값비싼 천들이다. 현대말로 수입 명품이다. 이를 본 다른 이들의 시새움이 부자의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그렇게 사는 것도 모자라 다른 이의 인정, 시기와 질투까지도 누린다. 권력과 부를 가진 이들은 ‘명품’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려 들고, 밖으로 드러내려는 속성을 지닌다. 교회 안에서도 부자와 가진 자들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면서도 자기들이 지닌 부와 권력을 겉으로 과시하며 드러내고 싶어 한다. 그들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서라고 하며 감히 왕의 색으로 알려지는(참조. 요한 19,2) “자주색”으로 자신을 치장하기도 한다.

대부분 사람은 일생에 불과 몇 번 정도 특별한 기회에 하는 잔치를 비유의 부자는 “날마다” 즐겼다고 복음은 말한다. 부자의 잔치는 나눔이나 가난한 사람의 초대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자신의 특권과 특혜를 누리는 것뿐이었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루카 16,20-21) 복음의 부자는 자기 집 대문 앞에 누워있는 가난한 이에게 율법이요 토라가 명하는 자선이나 애덕 행위를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 부자의 가장 큰 문제요 병病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교황 프란치스코는 이 구절을 두고 『…비유는 그 부자가 나쁜 사람이었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나름대로 종교적인 사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매일 기도까지 읊조릴 정도였거나, 아니면 1년에 적어도 몇 차례 성전에 나가 아주 큼지막한 봉헌물을 내놓았을지도 모릅니다. 정신 나간 성직자들이 이에 동조하고 그를 성전의 특별한 자리에 모셨을지도 모릅니다.…부자가 밖에 나갈 때는 도무지 밖을 보지 못하고 또 밖에서 안을 보지 못하도록 썬팅을 아주 진하게 한 자동차를 탔을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그의 영혼의 눈이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고 흐려졌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자기 인생만을 보았고, 밖에, 라자로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여기 부자는 나쁜 사람이었다기보다 오히려 아픈 사람이었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세속성, 속된 마음, 혹은 ‘세욕世慾’이라는 병에 걸린 것입니다. 이런 세욕은 영혼을 변형시킵니다. 현실에 대한 양심을 잃게 만듭니다. 그런 이들은 그들이 나름대로 만든 자기들만의 조작된 세계에 삽니다. 세욕은 영혼을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이것 때문에 그 부자는 현실을 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세욕은 ‘이기심’입니다.(2015년 3월 5일 아침 미사)』

세속적으로만 부자인 사람의 대문 앞에 또 다른 사람 하나가 “누워있었다.” 종기로 뒤덮인 불결한 물건처럼 내팽개쳐져 있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음식을 구걸하는 거지 노릇도 못 하고 그냥 버려져 있었다. 그 부잣집 앞을 오가는 그 어떤 사람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지만, 어떤 면에서는 인간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는 “개들”만이 지나치지 못하고 다가와 라자로의 험상궂은 종기와 상처를 안쓰럽게 핥는다.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부자가 먹다가 떨어트리거나 길바닥에 던지는 음식 부스러기라도(참조. 마르 7,28 마태 15,27) 받아먹을 수 있을까 하고 “간절히 바랐다.” 라자로는 병들고, 굶주리고, 고립되고, 버려졌고, 감히 다른 이의 눈길 한 번조차 얻을 수 없었다. 몹시 심약했던 그는 하느님께, 혹은 다른 이에게 도와 달라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고 욕설을 내뱉을 힘마저 없었다. 그의 이름을 ‘라자로’라고 하는데, 예수님의 비유나 예화에 등장하는 인물에게 이름이 붙여진 유일한 경우이다. 복음은 그에게 “라자로”, ‘하느님께서 도우러 오신다’는 뜻을 담은 ‘엘아자르(히브리말, אֶלְעָזָר, ‘El`azar)’였다고 알려준다. 하느님의 구원 약속이 보장된 이름이었다.

2. “아브라함 곁부자도 죽어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루카 16,22) 죽음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예외 없이 찾아오게 마련이어서 라자로도 죽고 부자도 죽었다. “사람은 영화 속에 오래 가지 못하여 도살되는 짐승과 같다.…영화 속에 있으면서도 지각없는 사람은 도살되는 짐승과 같다.”(시편 49,13.21)라는 시편의 지혜로운 말씀을 몰랐거나 아예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부자는 “가난한 이들이 먹게 하고, 거기에서 남는 것은 들짐승이 먹게 해야 한다.”(탈출 23,11) 하거나, 수확 때 남김없이 거두어들이지 말고 “가난한 이와 이방인을 위하여 남겨 두어야 한다.”(레위 19,10. 참조. 레위 19,15.18절) 또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이사 58,7 참조. 예레 22,16 등) 하는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들을 개의치 않고 살았다. 그는 타인에 대한 책임이나 나눔에 대한 책임 의식이 전혀 없었다. “불의한 재물로(라도)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 하며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바에 따를 때 의 진짜 이름은 ‘나눔’인데도 복음의 부자는 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라자로가 죽었을 때 그는 가난하고 버려진 노숙자였기 때문에 장례식을 치르기는커녕 아마도 그저 시립 시체 안치소에서 일하는 사람이 나와 시신을 수거해갔을 뿐이었다. 그래서 “천사들이” 버려진 그를 맞아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마태 8,11 참조. 루카 13,28)이라 한 그대로이다. 그렇게 라자로의 죽음을 묘사한 복음은 부자가 죽었던 경우를 두고는 “죽어 묻혔다” 하면서 간결하게 죽었다는 사실만 명시한다.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루카 16,23) 모든 이에게 죽음의 모습은 같지만 죽음 이후의 상황은 전혀 다른 반대의 상황으로 전개된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2코린 4,18) 하는 말씀처럼 지상에서의 한시적인 삶이 지나가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삶이 다가온다. 가난했던 라자로는 의인들이 있는 곳인 아브라함의 곁에 있고 부자는 “고통”의 “저승”에 있다. 인간이 죽으면 마지막 심판을 통해 곧바로 축복과 저주로 갈리는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 라자로는 하느님과 함께, 그리고 하느님께서 의롭다고 하신 이들과 함께 영원한 통교에 들어가고, 부자는 고통받는 저승에 들어가 하느님과 함께 하는 기쁨에서 제외된다.

3. “저에게 자비를큰 구렁이 가로놓여모세와 예언자들

부자는 라자로에게서 “멀리” 있으면서 “눈을 들어” 라자로가 아브라함의 사랑받는 아들처럼 그의 품에 있는 것을 본다. 부자는 가난한 이들이 이승에서 고통받는 처지에 있는 것과 같은 저승의 상황에 부닥치게 된다. 그에게는 지상에서 누렸던 특권이 끝났고, 그가 지녔던 그 어떤 부富도 그와 함께 가져갈 수가 없었다. 인생에서 간청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았던 그가 이제 세 번이나 간청한다.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루카 16,24) 한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첫 번째 부자의 간청이다. “소리를 질러” 도움을 청하고, 자신은 해 본 적이 없는 사랑의 몸짓을 다른 이에게 청한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루카 16,25-26) 지상의 삶과 그 삶에 임하는 사람의 태도가 죽음 이후의 삶을 어떻게 결정짓는가를 알려주는 말씀이다. 니싸의 성 그레고리오(335?~395년)는 『‘큰 구렁’이란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는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사는 동안에 우리가 지녔던 판단들』이라고 설파하신 적이 있다. 지상의 삶은 이미 심판이며 그 심판으로 구원과 영원한 벌이 갈린다.(참조. 마태 25,31-46) 그렇게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행복하여라!” 하신 참행복과 부자들에게 “불행하여라!” 하신 불행(참조. 루카 6,20-26)이 온전하게 완성된다. 이쪽과 저쪽을 나눠 분리하고 서로 넘나들 수 없는 “큰 구렁”이다. 결정은 영원하고 그 누구도 뒤바꾸거나 번복할 수 없으며 나의 오늘로 결정되는 내일이다. 저마다 자기의구렁을 오늘 나의 인생 안에서 스스로 파기 시작한다.

예수님의 비유는 여기에서 끝날 법도 했다. 그렇지만 어조가 바뀌면서 비유는 계속된다. 첫 번째 간청과 그에 대한 답을 들은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주십시오.’”(루카 16,27-28) 부자의 두 번째 간청에는 자기를 위한 내용이 없고 아직 지상에 남아 있는 자기 가족이 자기처럼 되지 않도록 미리 경고라도 해 달라는 내용이 담겼다. 성 예로니모(347~420년)는 “다섯 형제”를 두고 인간의 오감五感,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져보는 것에서 오는 쾌락으로 풀이한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이라 한 대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참조. 로마 4,16-18)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루카 16,29) 하면서 성경에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충분하고도 분명한 답이 있다고 부자의 두 번째 간청을 거절한다. 성경에 답이 있으니 성경을 들어야 한다. 곧 성경을 통해 하느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그 뜻을 헤아려 내 인생 안에 구체적으로 실현하며 순종해야만 한다.

두 번째로 거절당한 부자는 포기하지 않고 세 번째로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루카 16,30) 이에 아브라함은 더는 말을 주고받을 필요가 없다는 듯한 어조로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 하고 말한다. 비유는 그렇게 끝난다. 성경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단호하고도 결정적이며 분명한 말씀이지만, 오늘날까지도 많은 그리스도인은 성경만으로는 뭔가가 충분하지 않으며 진실한 믿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특별한 기적이라도 있어야만 한다는 듯이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느끼거나 다른 사족을 붙이고 싶어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루카 24,44) 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믿기 위해서 성경을 들어야 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믿기 위해서 성경을 들어야 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미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에게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루카 24,26-27)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1코린 15,3-4)라고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안에서 이루어진 일과 그분의 부활을 증거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그분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보아라.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루카 24, 5ㄴ-7)라는 말씀을 알아듣고 구약 성경의 말씀을 제대로 듣는다면, 진정 그분의 부활을 믿는 신앙에 이르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우리 가운데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존재 자체를 모두가 서로 알아차리지 못하게 교묘하게 숨기는 재주를 지니면서 오늘날 풍요로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를 뒤흔들어 댄다. 거리에는 아직도 거지가 있지만 우리는 그들의 실제적인 불쌍한 처지를 여러 가지 핑계나 변명으로 회피한다. 우리 사회에는 이방인처럼 낯선 이들, 이민자들, 멸시받는 이들이 있지만 우리는 우리가 누리는 풍요와 부를 그들과 나눌 필요가 없다는 전제 아래 그들은 그런 것을 누릴 자격이 없다는 식의 온갖 미사여구를 생산해 내기도 한다. 우리는 그 가난한 이들이 『세상의 죄를 거행하는 성사聖事(죠반니 모이올리Giovanni Moioli, 1931~1984년)』로서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고, 우리가 지닌 불의를 여실히 드러내 주는 표징들로서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는 사실을 고백해야만 한다. 우리가 그 가난한 이들을 그리스도의 성사요 표징으로서 생각할 때 가끔은 우리가 우리의 부스러기를 나누어주거나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내심 우리와는 멀리 떨어져 있기를 바란다. 그렇지만 심판 날에 하느님께서 그 가난한 이들의 편에 계시는 것, 그리고 우리가 마땅히 우리 차지일 것으로 생각하는 예수님의 “행복하여라!” 하신 그 “행복”이 그들의 것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복음의 끝에서 우리는 궁핍한 형제를 듣고, 성경을 듣는 연습을 둘 다 성실히 해야 한다는 권고를 받는다. 이 두 가지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지금 여기에서 행하는 이 두 가지의 실행 여부가 장차 우리의 심판일 것임을 잊지 말라는 초대를 받는다. 아멘!

One thought on “연중 제26주일 ‘다’해(루카 16,19-31)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