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루카 9,23-26)

※ 여러 단편 자료를 수집하여 영적 독서 자료로 ‘강해’를 대신합니다. 2025년은 다산 정약용 선생을 중심으로 정리하였습니다. 이에 보충하여 <정재원(정약용 선생의 부친)을 중심으로 한 가족도와 초대 교회 신앙삼각지>라는 글도 https://benjikim.com/?p=6144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24년 대축일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중심으로, 2023년 대축일은 성 정하상 바오로를 중심으로 정리하였으며 아래 링크에서 이를 각각 확인할 수 있음도 알려드립니다. https://benjikim.com/?p=11529(2024년) / https://benjikim.com/?p=5710(2023년)

※ 더 읽기: 오늘날의 순교 https://benjikim.com/?p=15424

연중 제25주일 (루카 16,1-13)의 전례를 지내는 곳에서는  https://benjikim.com/?p=15430에서 자료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순교자 성월

103위 중 33위가 9월에 순교하셨다. 김대건 신부님은 9월 16일 한강 백사장에서, 그리고 정하상바오로는 9월 22일 서소문 밖에서 치명하셨다. 1839년 9월 21일에는 앵베르 범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등이 서소문 밖에서 군문 효수를 당하셨다.

『9월은 한평생 주님만을 따르다 치명한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을 되돌아보는 달이다. 세계 교회가 그렇듯이, 한국 천주교회도 순교자들이 흘린 피와 땀으로 일구어진 신앙 공동체이다. 1984년 5월 6일 여의도 광장에서 시성된 103위 순교 성인들뿐 아니라, 성인으로 선포되지 않은 수많은 이름 없는 순교자들의 공로 또한 오늘의 한국 천주교회를 있게 한 위대한 신앙 유산이다.

교회는 치명자를 순교자로 인정하는 데에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첫째, 실제로 타인에 의한 죽음이어야 한다. 둘째, 그 죽음이 ‘신앙을 미워하는 자들’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셋째, 온전한 자유의사로 죽음에 임해야 한다. 주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으면 이러한 죽음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순교는 전적으로 주님의 은총의 이끄심으로만 가능하다.

한국 교회에서 순교자 성월이 시작된 것은, 1925년 7월 5일 로마에서 거행된 ‘조선 순교자 79위 시복식’이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8월, 한국 교회는 9월 26일을 ‘한국 치명 복자 79위 첨례’로 지정했다. 이날이 79위 복자들이 가장 많이 순교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9월은 ‘복자 성월’로 자리 잡았고,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1984년 103위 ‘순교 성인 시성’에 맞추어 복자 성월을 ‘순교자 성월’로 바꾸었다. 그뿐만 아니라, 현재 한국 교회는 ‘조선 왕조 치하의 순교자와 증거자’ 125위를 시복 청원하고 있으며, 2차로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의 자료를 발굴 조사하고 있고, ‘한국 교회의 근현대 신앙의 증인들’에 관한 자료들도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

순교는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순교자들은 평소 일상생활 안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며 살았기에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수 있었다. 지금의 한국 교회는 바로 그러한 순교 정신의 토대 위에 세워진 신앙 공동체이다. 순교 정신에 가까이 가려면 먼저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 매일의 기도와 선행에 충실하며, 이 땅에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데 일꾼이 되어야 하고, 영적 공부에도 힘을 기울여야 한다. 주님께서 은총으로 이끌어 주셨기에, 순교자들은 기쁘고 떳떳한 마음으로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 있었다.(2010년 9월 매일미사)』

2. 다산 정약용 일가와 관련한 몇 가지 순교사 단편

# 정약현(1751~1821년)→정약전(1758~1816년)→정약종(1760~1801년)→정약용(1762~1836년) 4형제 순이다.

『정약용 선생의 아버지 정재원(丁載遠, 1730~1792년)에게는 세 부인 사이에 모두 5남 5녀의 10남매가 있었다. 큰아들 약현(若鉉)은 24세로 요절한 의령 남씨(1729~1752) 소생이며, 둘째 부인 해남 윤씨(1728~1770)에게서는 약전, 약종, 약용과 이승훈에게 시집간 누이 등이 있었다. 윤씨가 세상을 뜬 후 김화현의 처녀 황씨를 첩으로 삼았으나 요절해 버리자 1773년 다산이 12살 되던 해에 서울에서 20세의 김씨(1754~1813)를 데려왔다. 이분이 정약용 선생이 장가들 때까지 손수 부스럼이나 종기를 치료해 주고 친어머니처럼 보살펴준 서모 김씨로 형제 중에서 정약용 선생과 특별히 정이 돈독하였다.

김씨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김의택(金宜澤)의 딸로서 슬하에 삼녀 일남(약황)을 두었는데 큰딸은 채제공의 서자인 채홍근(蔡弘謹)에게 다음은 나주 목사를 지낸 이인섭의 서자 이중식(李重植)에게 시집갔다.

정약용 선생의 집안은 혼맥으로 이익 계열의 학통을 계승하였는데 이는 자연스럽게 정약용 선생 일가가 천주교와 관련을 맺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 정약용 선생에게 천주학을 가르쳐주었을 뿐만 아니라 학문적·인간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끼쳤던 광암(曠菴) 이벽(李檗, 1754~1786)은 정약용 선생의 맏형인 정약현의 처남이니 정약용 선생과는 사돈 간이다. 정약용 선생에게 하나밖에 없는 누이는 조선 최초의 영세 교인인 만천(蔓川) 이승훈(李承薰, 1756~1801)에게 시집갔고 정약용 선생 자신은 이승훈의 누이를 며느리로 맞아들이니 이승훈은 정약용 선생에게 매부이자 사돈지간이 된다. 한편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종손인 이가환(李家煥)은 이승훈의 숙부가 된다.

또 백서(帛書)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黃嗣永, 1775~1801)은 정약용 선생의 조카사위이다. 16세 때 진사시에 장원급제한 수재인 황사영이 정약용 선생의 맏형인 약현의 딸(丁命蓮)에게 장가들었다. 황사영은 중국인 신부 주문모에게서 세례를 받고 알렉산드로라는 교명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열일곱 어린 나이에 진사에 합격해 임금의 사랑을 받았지만, 천주교에 심취해 서울에서 교리서를 등사하며 나이 많은 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1801년 신유사옥(辛酉邪獄)때 수배되었지만, 토굴에서 지내며 흰 명주에 조선교회의 박해상황을 알리고 서양 제국의 구원을 요청하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북경에 있는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어 그해 11월 능지처참을 당한다. 이때 황사영의 어머니와 부인은 각각 거제도와 제주도로 쫓겨가 종살이를 해야 했고 세 살짜리 아들까지 추자도에 버려졌다. 이로 인해 경상도 장기에 유배되어 있던 정약용 선생은 서울로 압송되어 취조를 받았으나 관련 사실이 드러나지 않아 극형은 면하였고, 형 약전은 흑산도로 자신은 강진으로 유배되는 신세가 되었다.

정약용 선생이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의 연(緣)뿐 아니라 지기(知己)까지 되어준 유일한 사람으로 말할 정도로 학문적으로나 인간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고 깊게 교류하였던 손암(巽菴) 약전(若銓)은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흑산도로 유배되었다가 끝내 해배 되지 못하고 그의 나이 59세인 1816년 유배지에서 죽었다. 1801년 11월 하순 귀양길에 나주 율정점(栗亭店)에서 눈물로 헤어진 후 16년 동안 한 번 보지 못하고 죽은 형을 다산은 형의 묘지명에서 정밀한 지식과 식견을 펼치지 못하고 먼 바닷속 풀집에서 귀양 살다 죽었다고 가슴 아파하였다.

정약용 선생의 손위 형인 정약종은 1801년 신유사옥 때 옥사하였다. 1795년 이승훈과 함께 청나라 신부 주문모를 맞아들여 최초의 전도회장으로 천주교 전도에 힘쓰다 4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형 약전과 막내(정약용)이 천주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하며 나라의 엄혹한 탄압에도 끝까지 배교하지 않은 약종의 아들 철상(哲祥), 하상(夏祥), 딸 정혜(貞惠) 역시 천주교로 인해 요절하였다.(남양주 홈페이지, 정약용 선생의 형제와 집안)』

『(다산의 바로 윗형) 정약종의 처형 장면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형장으로 끌려가는 그의 표정에 두려운 빛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도중에 목이 마르다며 그가 물을 청했다. 곁에서 나무라자, 그는 자신이 물을 청하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모범을 본받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목을 베기 직전, 그가 돌연 큰 소리로 외쳤다. “스스로 존재하시고, 무한히 흠숭하올 천지만물의 주재자이신 이가 그대들을 창조하셨고 지켜주십니다. 모두 회개하여 본분으로 돌아오십시오. 어리석게 멸시와 조소를 하지 마시오. 당신들이 수치와 모욕으로 생각하는 것이 내게는 영원한 영광이 될 것입니다.”

형리가 더 말을 잇지 못하게 그의 입을 막고, 나무토막 위에 머리를 대도록 했다. 정약종은 놀랍게도 올려다보며 눕더니 천주가 계신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죽겠다고 선언했다. 사형수가 제 목으로 떨어지는 칼날을 똑바로 보면서 죽겠다고 말한 것이다. 생전 처음 겪는 일이어서, 칼을 잡은 망나니가 오히려 넋이 나갔다. 두려워 칼을 내려치지 못하는 그를 곁에서 윽박지르자, 쳐든 망나니의 칼날이 마지못해 내려왔다.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그 칼에 정약종의 목은 절반밖에 끊어지지 않았다.

정약종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았다.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가슴으로 쿨럭쿨럭 흘러내렸다. 그는 크게 성호경을 긋더니 다시 하늘을 보고 누었다. 두 번째 칼날이 다시 지나고 나서야 신체와 목이 분리되었다. 그의 나이 42세였다.(한국일보, 정민, 다산독본, 66회)』

『1801년 2월 29일에 도성을 떠난 다산은 3월 2일 유배길에 충주의 하담(荷潭) 선영을 들러 성묘했다. 잡초로 뒤엉킨 부친의 묘소 앞에서 다산은 소리 죽여 신음하듯 울었다. “아버지,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요? 셋째 형님은 목이 잘려 죽었고, 사위 이승훈도 한날 불귀의 객이 되었습니다. 둘째 형님은 전라도의 신지도로 정배되어 성묘조차 못 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저 혼자 무참합니다. 열심히 산다며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끝이 날 줄 왜 몰랐던 걸까요?” 회한과 슬픔이 존재의 밑바닥으로부터 끓어 올라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나졸이 길을 재촉했다. 들르게 해 준 것만 해도 길을 한참 돌아온 셈이었다. 다산은 다시 무덤에 절을 올렸다. 이때의 심경이 시 한 수로 남았다. 제목이 ‘하담의 작별(荷潭別)’이다.

아버님 아십니까 모르십니까?父兮知不知

어머님 아십니까 모르십니까?母兮知不知

집안이 온통 모두 뒤엎어져서家門欻傾覆

지금에 죽고 삶이 이러합니다.死生今如斯

남은 목숨 비록 보전한대도殘喘雖得保

큰 바탕은 이미 다 망가졌지요.大質嗟已虧

자식 낳고 부모님 기뻐하셨고兒生父母悅

품고 길러 부지런히 살피셨지요. 育鞠勤携持

마땅히 하늘 은혜 갚으렸더니謂當報天顯

이렇게 내쳐질 줄 뜻했으리까. 豈意招芟夷

세상 사람 다시는 자식 낳고서幾令世間人

기뻐하지 못하게 하고 말았네.不復賀生兒

다산이 유배지인 장기에 도착한 것은 3월 9일이었다.(한국일보, 정민, 다산독본, 67회)』

*다산은 유배 중에 1만 3,384자의 깨알 글씨로 된 소위 황사영의 백서사건이 터져 9월 26일 황사영의 은거지가 밝혀짐에 따라 둘째 형과 함께 다시 서울로 압송된다. 두 달여만인 11월에 결정적인 유배형을 받아 형은 흑산도로, 자신은 강진으로 유배된다. 이승에서의 둘의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다산은 그렇게 강진 유배 전부터 계산하여 40세부터 57세(1818년)까지 18년의 유배 생활을 했고, 해배 되기 두 해 전(1816년) 흑산도에 계시던 형님을 잃었다.

『다산은 10월 20일 밤에 체포되어 27일 옥중에 들어갔다가, 11월 5일에 강진 유배가 결정되었다. 다산은 감옥에서 ‘옥중에서 소동파의 서대시 운에 화답하여(獄中和東坡西臺詩韻 옥중화동파서대시운)’란 시를 썼다. 긴 시라 뒷부분의 한 대목만 읽어 본다.

밤기운 하늘 바람 모든 것이 서글픈데 夜氣天風兩慘悽(야기천풍량참처)

호두각(虎頭閣)엔 무서리에 달빛이 낮게 떴다. 虎頭霜重月華低(호두상중월화저)

옥리가 추구(芻狗)를 우습게 봄 알았지만已知獄吏輕芻狗(이지옥리경추구)

대관(臺官) 흡사 목계(木鷄) 같음 오래도록 웃는도다. 長笑臺官似木鷄(장소대관사목계)

* 臺官대관 : 사헌부(司憲府)의 대사헌(大司憲) 이하(以下) 지평(持平)까지의 벼슬아치

다산이 갇혀 있던 의금부의 추국장은 추녀 끝의 기와가 범의 머리처럼 생겼대서 호두각(虎頭閣)으로 불렸다. 매서운 겨울 추위 속에 밤기운은 뼈에 저미고 바람은 매서웠다. 범이 아가리를 쩍 벌린 모양의 기와 너머로 갈고리 모양의 상현달이 낮게 걸렸다. 추구(芻狗)는 제사 때 개 모양으로 풀을 엮어서 만든 물건이다. 제사가 끝나면 내다 버리므로 쓸모를 잃고 버림받은 천한 물건을 비유하는 말로 흔히 쓴다. 옥리는 이미 다산이 재기 불능의 상태인 줄을 알아채고 함부로 마구 대했던 듯하다.

11월 9일 무렵 다산 형제는 유배지로 출발했다. 길이 하담 쪽과는 방향이 달라 다시 부친의 묘소를 들르지는 못했다. 이날 밤 두 사람은 동작 나루를 건넜다. ‘밤에 동작 나루를 지나며(夜過銅雀渡)’란 시를 통해 당시의 정황이 드러난다. 남대문을 나서 청파역을 지날 때쯤 해서는 날이 완전히 저물었다. 달빛도 희미해서 길이 자꾸 지워졌다. 배를 타기 위해 백사장을 지나는데 말발굽이 모래에 묻히면서 서걱대는 소리를 냈다. 삭풍이 휘몰아쳐 마음이 더욱 황황했다. 배를 탔지만, 상앗대가 얼어붙고, 사공은 추운 날씨에 손이 곱아 노를 젓기 어려울 정도였다. 강을 건너다가 도성 쪽을 돌아보니 남산의 검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살아서 이 강을 다시 건너올 수 있을까. 형제는 말없이 남산 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놀란 기러기(驚雁)’는 다음 날 과천에 와서 간밤의 풍경을 떠올리며 지은 시다.

동작 나루 서편으로 갈고리 같은 달에銅雀津西月似鉤(동작진서월사구)

한 쌍 놀란 기러기가 모래톱을 건너간다.一雙驚雁度沙洲(일쌍경안도사주)

오늘 밤 갈대숲 눈 속에서 함께 자곤今宵共宿蘆中雪(금소공숙로중설)

내일이면 머리 돌려 제가끔 날아가리.明日分飛各轉頭(명일분비각전두)

금강을 건너, 11월 21일에 나주 북쪽의 율정(栗亭)에 당도해 묵었다. 내일 아침이면 형제는 작별해야 했다. 여기서 길이 갈렸다. 다산은 그 막막한 심정을 ‘율정의 이별(栗亭別)’이란 작품에 담았다.

띠집 주막 새벽 등불 가물가물 사위는데茅店曉燈靑欲滅(모점효등청욕멸)

일어 앉아 샛별 보곤 장차 이별 참담하다. 起視明星慘將別(기시명성참장별)

맥맥히 입 다물어 둘이 다 말이 없고脉脉嘿嘿兩無言(맥맥묵묵량무언)

굳이 목청 가다듬다 오열이 되고 만다. 强欲轉喉成嗚咽(강욕전후성오인)

흑산도 아득하다 바다 하늘 닿았건만黑山超超海連空(흑산초초해련공)

그대는 어이하여 이 속으로 드시는고.君胡爲乎入此中(군호위호입차중)

고래는 이빨이 마치 산과 같아서鯨鯢齒如山(경예치여산)

배조차 삼켰다가 다시금 도로 뱉네.呑舟還復噀(탄주환복손)

지네는 크기가 쥐엄나무 꼬투리 같고蜈蚣之大如皁莢(오공지대여조협)

독사는 등나무 넝쿨마냥 얽혔다지. 蝮蛇之紏如藤蔓(복사지두여등만)

예전 내가 장기읍에 있을 적 생각하니憶我在鬐邑(억아재기읍)

밤낮으로 강진 쪽만 바라다 보았었네. 日夜望康津(일야망강진)

생각 날개 펼치다가 청해에서 뚝 끊기면思張六翮截靑海(사장륙핵절청해)

그 물의 가운데서 이 사람을 떠올렸지. 于水中央見伊人(우수중앙견이인)

이제 나 높이 옮겨 교목으로 옮겨가도今我高遷就喬木(금아고천취교목)

진주를 빼버린 채 빈 상자만 산 격일세, 如脫明珠買空櫝(여탈명주매공독)

또 마치 멍청한 못난 아이가又如癡獃兒(우여치애아)

망령되이 무지개를 잡으려는 것과 같네.妄欲捉虹蜺(망욕착홍예)

서쪽 언덕 바로 곁 가까운 데서西陂一弓地(서피일궁지)

아침에 무지개를 분명히 보았지만,分明見朝隮(분명견조제)

아이가 쫓아가면 무지개는 더 멀어져 兒來逐虹虹益遠(아래축홍홍익원)

또 서쪽 언덕에서 다시 서편 옮겨 가네. 又在西陂西復西(우재서피서복서)

담담했는데 헤어지는 새벽이 오자 두 사람은 말을 못 잇고 목부터 멘다. 자기가 갔어야 할 곳인데 어째 형님이 그처럼 아득하고 험한 곳으로 귀양을 가시는가? 자신의 새 귀양지인 강진은 궁벽한 장기에 견주면 도회지나 같았다. 장기 시절에는 생각이 늘 강진 쪽을 떠돌았다. 그 앞바다인 신지도에 형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이제 형님이 있던 곳에 왔지만, 형님은 아득히 먼 서쪽으로 더 멀어졌다. 형님이 안 계신 강진은 진주는 한 알도 들지 않은 빈 상자나 한 가지다. 무지개를 쫓는 아이처럼, 가까이 갈수록 더 멀어지는 무지개의 심술 앞에 망연자실 맥을 놓고 만 시다.(한국일보, 정민, 다산독본, 70회)』

『(다음 해) 9월 9일 꿈에 둘째 형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9일 내가 장차 우이봉(牛耳峯: 소흑산도이다) 꼭대기에 올라가서 강진 쪽을 바라볼 테니, 자네도 높은 데 올라가서 바라보아 정신으로라도 서로 만나세나.” 마침내 아침밥을 재촉해 먹고서 보은산 꼭대기로 올라갔다. (산은 강진현의 북쪽 5리 지점에 있다.) 승려 근은(謹恩)이 따라왔다. 산 위에 올라 술을 마시고 서편을 바라보았다. 산과 바다가 서로 겹쳐져 안개와 구름 사이에서 가물거리고 나주의 여러 섬이 또렷이 앞에 펼쳐졌다. 다만 어떤 것이 우이도인지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근은이 말했다. “이 산은 일명 우이라고 하고(‘강진 현지’에는 “진산鎭山이 누운 소의 형상이어서, 서북쪽 한 봉우리가 소귀가 된다”고 했다.) 꼭대기의 두 봉우리는 형제봉이라고 합니다.” 내가 말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는 곳이 모두 우이의 꼭대기이고, 봉우리의 이름도 형제봉이라 하니 또한 우연이 아니겠는가?” 인생이 이리저리 떠돌아도 모두 미리 정해진 것이 있는 듯한지라, 이 때문에 서글퍼져서 즐겁지가 않았다. 돌아와서 시를 지어 형님에게 부쳤다.

시에서 다산은 200리 떨어진 두 곳에 똑같은 우이봉이 있는 우연에 감탄하고, 형님 계신 곳을 이렇게 바라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 적었다. 비록 구름안개에 가려 분간할 수는 없어도 눈이 빠지라고 바라보노라니 눈물도 말라버리고 천지조차 캄캄해지더라고 썼다.

시의 제4구에 이런 주석이 달려있다. “흑산(黑山)이란 이름은 어둡고 캄캄해 무섭다. 내가 차마 이렇게 부르지 못해 매번 편지를 보낼 때마다 고쳐서 현산(玆山)이라 하였다. ‘현(玆)’이란 검다는 뜻이다.(黑山之名 흑산지명, 幽黑可怖 유흑가포. 余不忍呼之 여부인호지, 每書札改之爲玆山 매서찰개지위자산, 玆者黑也 자자흑야)” 이 글자를 ‘자’로 읽으면 지시대명사 ‘이’의 뜻이고, ‘현’으로 읽어야 검다는 의미가 된다. 흑산의 암흑스런 느낌이 싫어서 같은 의미를 취해 읽었으니, ‘자산’이 아닌 ‘현산’으로 읽는 것이 맞다. 정약전의 책 이름도 ‘현산어보’라야지, ‘자산어보’일 수 없다. 다산이나 제자 이강회가 다른 글에서 흑산도를 ‘현주(玄洲)’라고 적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자산은 그냥 ‘이 산’이고, ‘현산’이라야 ‘흑산’의 뜻이 되기 때문이다.(한국일보, 정민, 다산독본, 77회)』

3. 성경의 순교자

성경의 순교자는 ‘증거자’이다: “주님의 증인인 스테파노가 피를 흘리며 죽어 갈 때”(사도 22,20) “나의 충실한 증인 안티파스가 사탄이 사는 너희 고을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너는 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묵시 2,13) “하느님의 말씀과 자기들이 한 증언 때문에 살해된 이들”(묵시 6,9) “성도들의 피와 예수님의 증인들의 피”(묵시 17,6)

1) 예수님 자신이 바로 증거자이시고 순교자

고통의 순간에 하느님 은총의 위로를 받았던 분이며(루카 22,42-43 –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그때에 천사가 하늘에서 나타나 그분의 기운을 북돋아 드렸다”), 고발과 모욕 앞에서의 침묵과 인내를 사셨던 분이고(루카 23,9 – “헤로데가 이것저것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빌라도와 헤로데까지도 인정한 무죄를 억울하게 죄로 처벌받으신 분이며(루카 23,4.14-15,22), 자신의 고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분이었고(루카 23,27-28 – “백성의 큰 무리도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 가운데에는 예수님 때문에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 참회하는 죄인들을 관대하게 용서하신 분(루카 23,43 –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이었으며, 베드로(루카 22,61 –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와 박해자들까지 용서하신 분(루카 22,51 – “예수님께서 ‘그만해 두어라.’ 하시고, 그 사람의 귀에 손을 대어 고쳐 주셨다” / 루카 23,34 –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이셨다.

2) 순교자들은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인간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려 했던 이들

순교자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특권뿐만이 아니라 고난을 받는 특권까지 누린 사람들이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 1,29)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사도 5,41)

순교자들은 세상이 어둠과 밤에 매여 있어 빛을 못 보는 올빼미의 눈을 가졌을 때 외로이 빛의 신비를 감지한 사람들, 죽음 너머의 삶을 내다보고 살았던 사람들, 인간 최대의 비극인 죽음을 인간 최대의 환희인 생명으로 바꾸었던 사람들이다.

3) 이름 없이 믿음과 교회의 밀알이 되었던 무명의 순교자들

순교자들은 하느님 생명의 책에 기록되는 이름 하나이면 좋다는 소박한 믿음으로 죽음을 자청했던 사람들, 새남터에서, 절두산에서, 서소문에서 숨져간 수많은 사람. 그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다 모른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누군가의 십자가 덕으로, 누군가의 신앙고백으로, 누군가의 죽음으로 오늘 내가 누리는 신앙이 있음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가난했으나 이제는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된 사람들이다.

십자가와 고통을 억울하게만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 십자가를 기꺼이 감수하면서 살아간 사람들이 있다. 즉, ‘갖가지 빛나는 덕행을 갖추고 죽기까지 신앙을 지키면서 십자가를 감수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함께 누린(감사송)’ 이들이 바로 그런 이들이니 우리의 순교자들이다.

One thought on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루카 9,23-26)

  1. 의정부 주보에는 주마다 복자들이 소개됩니다.

    그들의 빛나는 행적을 볼 때마다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는 의연함이
    항상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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