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로 오랫동안 함께 사는 사람들이 곧잘 “사랑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미운 정 고운 정 ‘정’으로 살고, ‘웬수’같은 질긴 인연으로 헤어지지 못해 산다.”라고 말한다. 모든 이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많은 이가 사랑해서 결혼하고 인생의 반려가 되었으면서도 함께 살아가는 세월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사랑이 깊어간다기보다는 시들해져 간다고 말하면서 옛 시절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산다.
수도생활도 그렇다. 어리고 젊은 나이에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그대는 내 마음을 사로잡았소. 한 번의 눈짓으로, 그대 목걸이 한 줄로 내 마음을 사로잡았소.”(아가 4,9) 하는 구절처럼 가슴 뛰며 잠 못 이루는 설렘 속에서 수도원의 문을 두드리던 ‘그날’이 있었음에도, 한참 세월이 흘러 이제는 그저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 속에서, 갖은 허물을 감추어가며 해도 그만, 하지 않아도 그만인 듯한 일상 속에서 날들이 후딱후딱 간다.
「하느님과의 사랑에 빠져들어 수도자들이 살아가는 삶이 성덕과 성화의 길이라면 과연 나는 거룩해져 왔을까?」 이 문장을 쓰는 순간 그러한 문장 자체를 감히 쓸 수나 있는 나인가 하는 부담이 내심 엄습한다. 하느님과 형제들 앞에 부끄러운 온갖 못된 점이나 악습들을 세월 탓으로 돌리기에는 아무런 죄가 없는 ‘세월’이어서 세월에 너무도 미안하다. 세월이 가면 나도 점점 더 거룩해지는 줄 알고 살았으나, 그러한 성덕과 성화는 오랫동안 갈고 닦아 수련과 연마로 완성되지 않는다. 성덕과 성화는 나의 악덕을 고쳐 개선해나가는 것이 분명 아니다. 그렇게 하려 들면 그것은 내 의지로 내가 무엇인가를 해내려는 교만일 수도 있다. 나의 못된 점을 꼼꼼히 살피려다가 많은 경우에는 내 형제의 못된 점만을 더 잘 보고 만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서 자신을 채근해대다가는 강박이나 신경쇠약에 걸리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사랑은 제대로 된 사랑이 되기 위하여 갈고 닦는 연마의 과정이라기보다 오히려 처음 빠져들었던 사랑의 순간에 대한 빈번한 기억이요 회상이다.
성경은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느헤 8,10)이라 한다. 수도자들은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 그 은총의 힘으로 세끼 밥을 먹고 산다. 성덕과 성화의 길은 적어도 나의 경우로 보아 득도得道의 과정이라기보다 분명 은총의 길이다. 로또보다 더한 행운으로 어쩌다가 나에게도 주어진 수많은 성현이 살아갔던 그 길 위에서, 주어지는 규칙들과 패턴에 따라 은총을 믿고 그저 죄송한 마음으로 주어지는 날들에 감사하며 살아가다가 보면, 어제의 하루에 오늘의 하루를 더하고 내일의 하루를 더해가다 보면, – 만약 그것이 성덕이라면 – 어쭙잖은 성덕일지라도 어느 날 하느님 덕에 감히 성덕을 지닌 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작은 일상의 돌멩이들이 모여 탑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악을 꾸며도 선으로 바꾸시는 오묘하신 하느님(참조. 창세 50,20)이시니 말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믿고, 처음 가졌던 “사랑”의 마음을 잊지 않고 가끔이라도 새기며 끝까지 붙들고 살다가 보면, 이것마저 놓치면 내게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살아가다 보면, “주님, 고맙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일에서 당신 백성 중 하나인 저를 들어 높이시고 영광스럽게 해 주셨으며 언제 어디에서나 저를 도와주시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참조. 지혜 19,22 지혜서 마지막 절)라는 말씀을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날이 그렇게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