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이별

로마 외곽에 있는 성 바오로 대성당 쪽 몬테마르티니 센터Centrale Montemartini가 있는 곳에서는 사진에서 보는 바대로 1975년 로마시와 로마인 협회에서 설치한 표지석 하나(복제본)를 만나게 된다. 원본은 ‘오스티엔세 길 박물관Museo della Via Ostiense’ 내부 ‘포르타 산 파올로Porta San Paolo’에서 볼 수 있다. 사진의 위는 로마의 사도들로 알려지는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의 포옹 장면, 아래는 「이 근처에는 거룩한 십자가를 기리기 위해 봉헌된 작은 경당이 있었다. 이 경당은 20세기 오스티엔세 거리가 확장되면서 허물어지게 되었다. 이 장소는 거룩한 전승에 따를 때 사도의 왕자들인 베드로와 바오로께서 영광스러운 순교를 위해 떠나면서 헤어졌던 곳이다.(Nei pressi di questo sito una devota cappellina in onore dei satissimo crocifisso demolita agli del secolo XX per ‘’allargamento della via Ostiense segnava il luogo dove secondo una pia tradizione i principi degli apostoli Pietro e Paolo vennero separati nell’avvio al glorioso Martirio.)」라는 글귀가 적혔다.

석판에서 언급하는 이 ‘이별의 경당Capella della Separazione(=Chiesa del Santissimo Crocifisso)’은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의 석판은 원래 순교로 헤어지게 된 두 사도의 눈물겨운 마지막 이별 장면을 기리기 위해 초대 교회로부터 세워진 경당의 입구 위에 붙어 있던 것이다. 이 경당은 7세기 교황 도노Dono의 <교황 관련 서적Liber Pontificalis>에 ‘사도들의 교회Ecclesiam Apostolorum’라는 이름으로 처음 언급된다. 1551년 레오나르도 부팔리니Leonardo Bufalini가 제작한 로마 지도에서는 ‘십자가Crucifixus 성당’이라고 표기한다. 비오 4세께서는 이 성당을 ‘순례자들과 회복기 환자들의 삼위일체 형제회Confraternita della Santissima Trinità dei Pellegrini e dei Convalescenti’에 양도하기도 했다. 이 형제회는 1568년 이곳 오스티엔세 거리에 이 경당을 작은 병원 부속 건물과 함께 재건한 바 있다. 이 경당은 1577년 에튀엔 뒤 페락Etienne Du Perac이 제작한 지도에도 다시 ‘십자가 성당’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원래 위치와는 다르게 도로 반대편에 표기되어 있다. 이 경당은 성 필립보 네리의 이름으로 봉헌된 제대가 하나만 있었던 작은 경당이었다.

기록이나 전승과 달리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정말 만나 이렇게 마지막 포옹으로 이별을 했다는 기록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엄밀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만 말한다면, 실제 존재했던 이 경당은 교회의 예술적·문학적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교회의 많은 예술 작품들은 두 사도가 서로 껴안는 장면을 묘사한다.(참조.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 서로 껴안는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https://benjikim.com/?p=14268) 성스러운 역사와 세속의 역사가 교차하는 로마라는 도시의 한쪽 구석에서 이 작은 경당의 존재와 석판을 확인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기억과 예술, 그리고 믿음과 신심이 어떻게 과거를 이해해왔었는지 생각해보고 발견하라고 다그치는 석판의 소리를 조용하게 듣는다.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서로 껴안는 모습을 생각하면서는 성경의 기록에 비추어 얼핏 둘 사이가 그렇게 좋지는 않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 예로 유명한 ‘안티오키아 사건’을 들어볼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케파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나는 그를 정면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가 단죄받을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올바른 길을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케파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갈라 2,11.14)라고 매섭게 기록한다. 사연은 이렇다: 베드로와 바오로가 안티오키아에 함께 있었을 때인데, 그때까지는 베드로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이방인 개종자들인 현지인들과 어울리고 음식을 먹다가 “야고보 사도가 보낸 사람들, 곧 할례받은 유다인들”이 찾아오자 그들의 눈 밖에 날까 “두려워한 나머지 몸을 사리며 (이방인이었던) 다른 민족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던”(갈라 2,12) 위선적 행동을 보였으며, 이에 바오로 사도는 베드로 사도의 위선적 태도를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던 것이다.

이후 두 사도가 어떻게 화해하였고,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었는지를 기록으로 확인할 수는 없으나 같은 갈라티아서 앞부분에서 보는 “나는 케파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보름 동안 그와 함께 지냈습니다.”(갈라 1,18) “베드로가 할례받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듯이, 내가 할례받지 않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다는 사실…할례받은 이들을 위하여 베드로에게 사도직을 수행하게 해 주신 분께서, 나에게도 다른 민족들을 위한 사도직을 수행하게 해 주셨기 때문”(갈라 2,7-8)이라는 기록들을 통해서 우리는 두 사도가 하나의 복음과 그리스도를 향한 하나의 믿음으로 일치하여 각기 다른 부르심을 성실히 수행하였으리라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교회는 두 분의 축일을 한 날에 지내면서 두 분의 하나 된 믿음의 일치를 기린다. 신약 성경이 기록으로 남겨주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두 분이 서기 64년 혹은 67년경 네로 황제의 박해로 순교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두 분의 순교는 그리스도교의 중심지로서 로마라는 도시의 중요성을 확인하면서, 이러한 두 분의 유산은 가톨릭이나 정교회에 모두 확실한 기초가 된다.

레오 14세 교황은 교황으로 선출된 지 한 달 남짓 만에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맞게 된 두 분의 대축일 강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베드로와 바오로의 역사는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친교가 그 누구의 자유도 소외하지 않는 목소리들과 인격들의 조화였음을 보여줍니다. 우리 수호성인들은 각자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각자 다른 생각들을 지녔었습니다. 때로는 복음적인 솔직함으로 서로 논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사도들의 일치를 방해하지는 않았습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되어 살아가면서 다양성 안에서 풍성한 열매들을 맺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께서도 “두 사도의 축일은 한 날에 거행합니다. 그들도 하나였습니다. 비록 각기 다른 날에 순교하였음에도 그들은 하나였습니다.”(Serm. 295, 7.7-교유 성무일도 독서기도 제2독서)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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