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사도를 함께 기리는 대축일이자 교황 주일이다. ‘부르심 / 사명 / 순교’라는 세 키워드로 그분들을 비교하면서 기려본다. (※참조. 열쇠와 칼 https://benjikim.com/?p=4633) 뒷부분에 2024년 6월 29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삼종기도 훈화 말씀 번역문(우리말, 영문)이 덧붙여져 있다.
1. 부르심
베드로의 부르심을 보자면, 베드로는 민물고기 어부였으며 벳사이다 태생이었고 주로 카파르나움에서 성장하던 중에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는 안드레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어느 날 동생이 와서 ‘메시아를 만났다.’고 소리치며 형인 베드로를 데리고 간 것이 인연이 되어 예수님과 상봉하게 되었다. 그때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너 시몬이라고 불리는 자, 앞으로 너를 베드로라 부르겠다.’ 하셨는데, 당장 그 이름을 바꾸어 부르지는 않았겠지만, 일순간에 그의 온 일생이 뒤바뀌게 되었다. 동생이든 친구이든 연인이든, 또 가족의 누구이든 누군가가 나를 어디로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편, 바오로는 베드로가 시골 출신인 반면 타르소라는 도시 출신이다. 어렸을 때부터 가믈리엘이라는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을 것으로 보이고 율법의 신봉자인 바리사이파 계보에 속했으며 당시 식민 지배를 하고 있던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기득권층의 일원으로서 실제 예수님을 만난 적은 없지만,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적으로서 활약하였다. 그리스도인들 중 스테파노라는 이의 살해 당시 (직접 돌을 던지지는 않았지만) 이에 가담하였고 예수님의 일당이 틀림없이 사이비라는 확신을 가져 다마스쿠스라는 곳으로 예수님의 일당들을 추격하던 중에 말에서 떨어져 ‘사울, 왜 나를 박해하느냐? 나 네가 박해하는 예수이다.’라는 음성을 듣고 인생을 바꾸게 된다. 설령 예수님의 적이라 할지라도 언젠가 예수님을 만나지 않는 인생이란 있을 수 없다. 악인도 선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바오로 사도를 통해서 그 누구도 판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짓는 악인을 만나실 때마다, ‘나 네가 하는 그 나쁜 짓을 곧 내게 하는 행위로 알고 너를 기다리는 예수이다.’ 하실 것이다.
2. 사명
베드로의 사명은 언젠가 예수님께서 함께 산 위에서 휴식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날 두고 뭐라 하드냐?’하고 갑자기 물으셨을 때, 다른 제자들이 당황하였지만, 베드로는 ‘당신은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답하는 것으로 본격적으로 시작한 듯하다. 그 순간부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당신 교회의 초석으로 삼으시기로 구상하신 듯하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항상 당신께서 함께 계시겠다고 하셨으며,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세 번이나 묻기도 하셨고(참조. 요한21,15-19), 몸소 ‘베드로, 나는 너를 위해 기도하였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주라.’(루카22,31-32)고 당부하시기까지 하셨다. 항상 함께 하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은 반드시, 끝까지 지켜지는 약속이다.
바오로의 사명은 예수님께서 세상 끝까지 전하라고 하시던 말씀을 20여 년 동안 약 2만km를 돌아다니며 중동아시아, 로마, 스페인, 말타 등을 누비는 것이었다. 그는 작은 그리스도인 공동체 형성에 주력하는 한편, 지나간 곳들의 공동체들을 위해서는 수시로 편지를 통해 그들을 지도하고 격려하였다. 그의 서한으로서 13통이 남아 신약성경의 일부를 이룬다.(7편만이 친서이고 나머지 6편은 제자들이나 후학이 스승의 이름으로 기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몸소 자신이 겪었던 고난의 과정을 서술한 2코린 11,21-33는 두고두고 읽어도 눈물이 나는 대목이다. 내 발이 아프고 피곤할지라도 복음을 전하는 이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으리니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이 기쁨으로 곡식을 거둘 것이기 때문이다.
3. 순교
베드로의 순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받으시던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3번이나 배반한 뒤 이루어졌다. 말년에 로마에서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살고 있었는데, 전승에 의하면, 네로 황제 때 박해 소식을 듣고 또다시 로마 외곽의 아피아 거리를 통해 로마를 빠져나가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주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Quo vadis Domine?)’ 하고 여쭈었더니, 주님께서 ‘나, 네가 도망친 로마로 간다.’고 답하시므로 다시 한번 울며 회심하고 발길을 돌려 도저히 예수님과 같은 모습의 십자가에는 감히 달릴 수 없으니 거꾸로 매달아주라 청하여 그렇게 순교하였다 전해진다. 일생 살면서 가끔일지라도 예수님께 대한 신뢰를 잃을 수도 있고 도망칠 수도 있으나, 그 순간에도 예수님께서 함께 계심을 잊지 말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 시민권자로서, 그리스도인이라 고발 감금당하는 상황을 맞았으므로, 로마 황제에게 항소하였고, 이에 따라 역시 로마에까지 와서 연금 상태로 얼마 동안을 지내다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른바 ‘tre fontane(3개의 샘)’이라는 곳이 그 참수터인데, 내려친 바오로 사도의 목이 3번 굴러 그 구르는 곳마다 샘이 하나씩 솟아났다고 전해져 ‘3개의 샘’이라 한다. 아무래도 바오로 사도는 자기 묘비명에 ‘열심히 살았습니다. 제가 언젠가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고 했었는데(2테살 3,10 참조), 제 자신 제가 하는 말대로 살려 하였고 사는 대로 말하려 했습니다.’라고 했을 법하다. 베드로의 동상이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고 하시던 예수님 말씀에 따라(마태 16,19 참조) 열쇠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는 반면에, 바오로 사도는 칼로 참수를 당하였으므로 그의 동상은 칼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바오로 사도의 목이 떨어진 자리에 샘이 솟아났듯이 아무리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샘처럼 솟아오르는 것이 하느님 말씀이다.
가톨릭교회는 열쇠와 십자가 위에, 그리고 칼 위에 세워진 공동체이다. 열쇠는 섬김이며 십자가는 마지막 남은 피 한 방울까지 철저하게 자기를 던지는 투신이고, 칼은 또 다른 투신이되 섬뜩한 용기이다. 열쇠는 섬김이고 섬김은 곧 십자가이며, 칼은 열정이다. 십자가는 반석이고, 칼은 소리이다. 십자가는 안이고, 칼은 밖이다. 십자가는 열쇠이며, 칼은 원천이다. 십자가가 함께 지냈던 날들로 살아가는 기억의 삶이라면, 칼은 발견한 진리를 위해 달릴 길을 다 달리는 인내의 여정이다. 십자가는 고백이고, 칼은 그 고백의 증명이다. 십자가는 몇 번이고 돌아서는 참회의 눈물이고, 칼은 천둥과 뇌성에 돌아서는 개벽開闢이다. 십자가는 몸으로 사는 우여곡절迂餘曲折이고, 칼은 그리움의 기나긴 편지이다. 그러나 결국 열쇠도, 십자가도, 또 칼도 같은 승리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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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껴안는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를 하나의 전례 안에서 함께 기념하는 대축일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베드로 사도는 공관복음서에 따를 때,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부르신 제자이며, 교회의 “반석”이라 불리는 분이다. 반면 바오로는 예수님의 직접적인 제자가 아니었고,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분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사도”라 불리며 복음 선포에 삶을 바친 대표적인 선교사였다.
신약성경은 두 사람의 최후를 자세히 전하지 않지만, 오랜 전통에 따를 때 이분들은 같은 날, 같은 도시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그들의 삶을 바친 것이다. 서로를 잘 알았던 그분들의 생애 중에는 서로 충돌한 적도 있었지만(갈라 2,11-14 참조), 오늘 우리는 그 두 분을 하나의 전례로 함께 기억한다. 이는 두 분께서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끝까지 복음을 전하며 진정한 파레시아(parrhesia, 영어로 ‘Free Speech’)를 살아냈던 분이라는 삶의 증거로 같은 분이시며, 결코 쉬운 인생만을 사실 수 없었다는 점에서 같은 분이시기 때문이다.
시몬 베드로는 갈릴래아 벳사이다 출신의 어부로서, 안식일마다 회당에서의 예배를 통해 신앙을 살던 평범한 유다인이었다. 예수님의 부르심 이후 그는 그분의 가르침을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곁에서 다른 제자들을 대표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으며, 제자 중에서도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 예수님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베드로를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군중과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예수님이 과연 오시기로 예언된 그 예언자이신지, 마지막 시대에 오실 그 예언자인지, 아니면 메시아인지 궁금해했다.(참조. 요한 6,14;7,40) 이때 베드로가 처음으로 나서서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하며 믿음을 드러냈다. 이 고백은 하느님께서 베드로에게 직접 계시하신 것이며, 이 믿음 위에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셨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때 당시 베드로를 “행복하다”라고 하셨음에도, 그는 자신의 연약함과 불충실함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그러한 고백 후에도 곧바로 예수님의 수난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세속적인 생각을 드러냈고, 예수님은 그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라고 꾸짖으셨다.(마태 16,23) 또한 예수님의 수난 때에는 세 번이나 그분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다.(마태 26,69-75 참조) 자신을 지키고 싶은 두려움 때문에, 하느님이 그에게 계시하신 예수님을 “모른다” 하며 상관도 없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이 사라지지 않도록 기도하셨고(루카 22,32), 부활 후에는 세 번의 사랑 고백을 요구하며 그를 다시 사도로 세우셨다.(요한 21,15-17) 이후 베드로는 예수님의 양들을 돌보는 목자가 되었고, 예루살렘을 시작으로 팔레스타인의 유다인 공동체, 안티오키아, 마지막에는 로마에 이르러, 스승이신 주님의 본을 따라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바로 이 로마에서 바오로와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이들의 일상이 함께였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순교의 증거 안에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바오로는 베드로와 매우 다른 사도였다. 그러나 그의 존재는 교회가 처음부터 다양성과 복수성 속에서 살아가는 공동체였음을 보여준다. 타르수스 출신 유다인으로서 디아스포라에서 태어난 바오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유명한 라삐 가말리엘에게 배운 바리사이였고, 율법에 열정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예수님이나 초기 제자들을 알지 못했으며, 오히려 새로 생긴 그리스도교 운동을 박해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과 계시를 경험하게 된다. 바오로 자신은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갈라 1,15-16)라고 말한다.
그는 다른 사도들과 견주면서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8)라며 자신을 낮추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동일하게 받아들여지기를 원했다. 바오로는 온 생애를 복음에 바치며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았고, 지중해 전역을 돌며 선교 여행을 하였다. 그의 열정과 지혜, 복음을 전하려는 헌신은 그의 모든 서간에 녹아 있으며, 사도행전 또한 그의 사도직을 증언한다. 그는 “이민족들의 사도”(로마 11,13)로 불렸고, 베드로는 “할례받은 이들의 사도”(갈라 2,8)로 구별된다.
베드로와 바오로는 모두 그리스도의 사도이지만, 매우 다르다. 베드로는 가난한 어부였고, 바오로는 학식 있는 지식인이었다. 베드로는 팔레스타인의 작은 마을 출신이었고, 바오로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디아스포라 유다인이었다. 베드로는 이해하고 실천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인물이고, 바오로는 종말의 긴박함 속에서 불타오른 인물이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도직을 수행했고, 때로는 대립하기도 했지만,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의 뜻을 실현하려는 열망만은 같았다.
바로 그들의 ‘다름 속 하나 됨’ 덕분에, 그리스도교 선교는 얼굴을 갖게 되었고, 사랑 안에서 다스리는 로마 교회는 확고한 기초 위에 세워지게 되었다. 그래서 성화聖畫 속에서 이 둘은 서로를 껴안고 있거나, 하나의 교회를 함께 떠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들의 공동 증언은 기억이고 예언이며, 교회 내 일치의 상징이다. 베드로는 바오로를, 바오로는 베드로를 서로 껴안는다. (참조.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이별 https://benjikim.com/?p=14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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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2024년 6월 29일 교황 프란치스코의 삼종기도 훈화 우리말과 영문 번역본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좋은 아침입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대축일인 오늘 전례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시몬을 베드로라고 부르시면서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마태 16,19)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이 광장의 성 베드로 조각상에서 보듯이 성 베드로가 손에 두 개의 큰 열쇠를 든 모습으로 자주 묘사되는 이유입니다. 이 열쇠들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모든 교회를 섬기라고 맡기신 권위의 상징입니다. 권위는 섬김입니다. 섬김이 아닌 권위는 독재입니다.
그렇지만 이 뜻을 잘 이해하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사실 베드로의 열쇠는 왕국의 열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안전(금고)나 지하 저장고의 열쇠가 아닌 다른 이미지, 곧 작은 씨앗, 귀한 진주, 숨겨진 보물, 반죽 속의 누룩과도 같은 이미지들, 고귀하고도 값진 것이지만 작고 눈에 띄지 않는 것들로 이를 묘사하셨습니다.(참조. 마태 13,1-33) 그러므로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안전을 위한 기계 장치나 잠금장치를 가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인내, 주목, 항구함, 겸손, 섬김과 같은 덕을 연마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맡기신 사명은 집의 문을 걸어 잠그고 선별된 손님만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을 충실히 따라서 누구나 들어올 길을 찾도록 돕는 것입니다. 모두, 모두, 모두가 들어올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과의 만남에서 오는 기쁨과 자유를 체험한 후 갖은 고통과 역경을 무릅쓰고 이를 순교할 때까지 평생 성실히 이행하였습니다. 그 자신이 먼저 회개해야 했고, 자기에게 맡겨진 권위가 섬김임을 이해해야 하였으며, 예수님께 문을 열기 위해 노력해야 했습니다. 이는 그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씀드린 후였는데도 스승이신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거부하였으므로 스승님으로부터 야단을 맞아야만 했던 것만을 생각해 보더라도 그렇지 않습니까?(참조. 마태 16,21-23)
베드로가 왕국의 열쇠들을 받은 것은 그가 완벽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결코 아닙니다. 그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겸손했고, 정직했으며, 아버지 하느님께서 그에게 신실한 믿음을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참조. 마태 16,17) 그래서 베드로는 하느님의 자비에 자신을 맡겼으며, 자신에게 요구된 대로 형제들을 지지하고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줄 수 있었습니다.(침조. 루카 22,32)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분의 왕국에 들어가려는 열망을 키우고, 다른 이들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그런 열망을 키우도록 적극적인 옹호자가 되고 있습니까? 그렇게 되도록 나 자신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성령, 우리 안에, 우리 각자 안에 살아계시는 성령으로 “연마되고” 부드러워지도록 나를 내맡기고 있습니까?
사도들의 여왕이신 성모 마리아, 그리고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기도를 통하여 주 예수님을 만나도록 우리 서로 안내자가 되고 서로 지지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허락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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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brothers and sisters, buongiorno!
In the Gospel today, Solemnity of the Holy Apostles Peter and Paul, Jesus says to Simon, whom he named Peter, “I will give you the keys of the kingdom of heaven” (Mt 16:19). This is why we often see Saint Peter depicted with two large keys in his hand, as in the statue here in this Square. Those keys represent the ministry of authority that Jesus entrusted to him at the service of all the Church. Because authority is a service, and authority that is not service is dictatorship.
Let us be careful, though, to understand well the meaning of this. Peter’s keys, in fact, are the keys of a Kingdom, which Jesus does not describe as a safe or a vault, but with other images: a tiny seed, a precious pearl, a hidden treasure, a handful of leaven (cf. Mt 13:1-33), that is, like something precious and rich, yes, but at the same time small and inconspicuous. To reach it, therefore, one does not need to activate mechanisms and safety locks, but to cultivate virtues such as patience, attention, constancy, humility, service.
Therefore, the mission that Jesus entrusts to Peter is not to bar the doors to the house, permitting entry only to a few select guests, but rather to help everyone find the way to enter, in faithfulness to the Gospel of Jesus. Everyone, everyone, everyone can enter.
And Peter did this throughout his life, faithfully, until his martyrdom, after having been the first to experience for himself, not without fatigue and with many setbacks, the joy and the freedom that come from the encounter with the Lord. He was the first to have to convert, and to understand that authority is a service, in order to open the door to Jesus, and it was not easy for him. Let us think: just after saying to Jesus, “You are the Christ”, the Master had to reproach him, because he refused to accept the prophecy of his passion and his death by the cross (cf. Mt 16:21-23).
Peter received the keys to the Kingdom not because he was perfect, no — he was a sinner — but because he was humble, honest, and the Father had given him sincere faith (cf. Mt 16:17). Therefore, entrusting himself to God’s mercy, he was able to support and fortify his brethren too, as had been asked of him (cf. Lk 22:32).
Today we can ask ourselves, then: do I cultivate the desire to enter, with God’s grace, into his Kingdom, and to be, with his help, its welcoming guardian for others too? And to do so, do I let myself be “polished”, softened, modelled by Jesus and his Spirit, the Spirit who dwells in us, in each one of us?
May Mary, Queen of the Apostles, and the Saints, Peter and Paul, through their prayers, grant us to be guides and support to one another, for the encounter with the Lord Jes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