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의 대축일(6월 29일) : 십자가와 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by El Greco(1541~1614년), Barcelona 국립미술관 소장 *출처-Wikipedia

6월 29일은 64년~68년 사이 네로Nero 황제 때 로마에서 순교하심으로써 로마의 수호 성인으로 모시게 된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두 사도를 함께 기리는 대축일이다. 두 사도를 함께 기리는 것이 같은 날에 순교하셨기 때문은 아니다. “두 사도의 순교는 같은 날에 기념합니다. 이 두 분은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두 분은 서로 다른 날에 순교했지만, 그들은 하나였습니다.(성무일도 독서 기도 중에서)”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대로 그리스도 안에 하나였던 두 분, 교회의 두 기둥이었던 분들을 한 날에 기념하는 것이 더욱 마땅하고도 영예스러운 일임이 틀림없다. 우리 교회에는 비가 자주 내리고 벼락 천둥이 잦은 여름의 초입에 맞는 이 축일을 절기에 맞춰 베드로 변형의 ‘벼’나 ‘바위’를 뜻하는 베드로 사도를 연상하고, 바오로라는 이름의 ‘바’라는 첫 자를 따서 ‘벼락 바위 축일’이라 불렀다는 속설도 있다. 너무도 다른 인생으로 각자의 소명을 완수했던 두 사도를 함께 기리는 대축일에, ‘부르심 / 사명 / 순교’라는 세 마디 말로 정리하여 그분들을 기려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1. 부르심

베드로의 부르심을 보자면, 베드로는 민물고기 어부였으며 벳사이다 태생이었고 주로 카파르나움에서 성장하던 중에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는 안드레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어느 날 동생이 와서 ‘메시아를 만났다.’고 소리치며 형인 베드로를 데리고 간 것이 인연이 되어 예수님과 상봉하게 되었다. 그때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너 시몬이라고 불리는 자, 앞으로 너를 베드로라 부르겠다.’ 하셨는데, 당장 그 이름을 바꾸어 부르지는 않았겠지만, 일순간에 그의 온 일생이 뒤바뀌게 되었다. 동생이든 친구이든 연인이든, 또 가족의 누구이든 누군가가 나를 어디로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베드로가 시골 출신이지만 바오로는 타르소라는 도시 출신이다. 바오로는 어렸을 때부터 가믈리엘이라는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을 것으로 보이고 율법의 신봉자인 바리사이파 계보에 속했으며 당시 식민 지배를 하고 있던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기득권층의 일원으로서 실제 예수님을 만난 적은 없지만,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적으로서 활약하였다. 그리스도인들 중 스테파노라는 이의 살해 당시 (직접 돌을 던지지는 않았지만) 이에 가담하였고 예수님의 일당이 틀림없이 사이비라는 확신을 가져 다마스쿠스라는 곳으로 예수님의 일당들을 추격하던 중에 말에서 떨어져 ‘사울, 왜 나를 박해하느냐? 나 네가 박해하는 예수이다.’라는 음성을 듣고 인생을 바꾸게 된다. 설령 예수님의 적이라 할지라도 언젠가 예수님을 만나지 않는 인생이란 있을 수 없다. 악인도 선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바오로 사도를 통해서 그 누구도 판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짓는 악인을 만나실 때마다, ‘나 네가 하는 그 나쁜 짓을 곧 내게 하는 행위로 알고 너를 기다리는 예수이다.’ 하실 것이다.

2. 사명

베드로의 사명은 언젠가 예수님께서 함께 산 위에서 휴식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날 두고 뭐라 하드냐?’하고 갑자기 물으셨을 때, 다른 제자들이 당황하였지만, 베드로는 ‘당신은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답하는 것으로 본격적으로 시작한 듯하다. 그 순간부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당신 교회의 초석으로 삼으시기로 구상하신 듯하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항상 당신께서 함께 계시겠다고 하셨으며,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묻기도 하셨고(참조. 요한21,15-19), 몸소 ‘베드로, 나는 너를 위해 기도하였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주라.’(루카22,31-32)고 당부하시기까지 하셨다. 항상 함께 하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은 반드시, 끝까지 지켜지는 약속이다. 바오로의 사명은 예수님께서 세상 끝까지 전하라고 하시던 말씀을 20여 년 동안 약 2만km를 돌아다니며 중동 아시아, 로마, 스페인, 말타 등을 누비는 것이었다. 그는 작은 그리스도인 공동체 형성에 주력하는 한편, 지나간 곳들의 공동체들을 위해서는 수시로 편지를 통해 그들을 지도하고 격려하였다. 직접 저자, 혹은 간접 저자로서 그의 이름을 딴 서한 13통이 남아 신약성경의 일부를 이룬다.(7편만이 친서이고 나머지 6편은 제자들이나 후학이 스승의 이름으로 기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몸소 자신이 겪었던 고난의 과정을 서술한 2코린 11,21-33는 두고두고 읽어도 눈물이 나는 대목이다. 내 발이 아프고 피곤할지라도 복음을 전하는 이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으리니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이 기쁨으로 곡식을 거둘 것이기 때문이다.

3. 순교

베드로의 순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받으시던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3번이나 배반한 뒤 이루어졌다. 말년에 로마에서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살고 있었는데, 전승에 의하면, 네로 황제 때 박해 소식을 듣고 또다시 로마 외곽의 아피아 거리를 통해 로마를 빠져나가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주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Quo vadis Domine?)’ 하고 여쭈었더니, 주님께서 ‘나, 네가 도망친 로마로 간다.’라고 답하시므로 다시 한번 울며 회심하고 발길을 돌려 도저히 예수님과 같은 모습의 십자가에는 감히 달릴 수 없으니 거꾸로 매달아주라 청하여 그렇게 순교하였다 전해진다. 일생 살면서 가끔일지라도 예수님께 대한 신뢰를 잃을 수도 있고 도망칠 수도 있으나, 그 순간에도 예수님께서 함께 계심을 잊지 말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 시민권자로서, 그리스도인이라 고발 감금당하는 상황을 맞았으므로, 로마 황제에게 항소하였고, 이에 따라 역시 로마에까지 와서 연금 상태로 얼마를 지내다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른바 ‘tre fontane(3개의 샘)’이라는 곳이 그 참수터인데, 내려친 바오로 사도의 목이 3번 굴러 그 구르는 곳마다 샘이 하나씩 솟아났다고 전해져 ‘3개의 샘’이라 한다. 아무래도 바오로 사도는 자기 묘비명에 ‘열심히 살았습니다. 제가 언젠가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고 했었는데(2테살 3,10 참조), 제 자신 제가 하는 말대로 살려 하였고 사는 대로 말하려 했습니다.’라고 했을 법하다. 베드로의 동상이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고 하시던 예수님 말씀에 따라(마태 16,19 참조) 열쇠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는 반면에, 바오로 사도는 칼로 참수를 당하였으므로 그의 동상은 칼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바오로 사도의 목이 떨어진 자리에 샘이 솟아났듯이 아무리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샘처럼 솟아오르는 것이 하느님 말씀이다.

가톨릭교회는 베드로의 십자가 위에, 그리고 바오로의 칼 위에 세워진 공동체이다. 십자가는 마지막 남은 피 한 방울까지 철저하게 자기를 던지는 투신이고, 칼은 또 다른 투신이되 섬뜩한 용기이다. 십자가는 섬김이고, 칼은 열정이다. 십자가는 반석이고, 칼은 소리이다. 십자가는 안이고, 칼은 밖이다. 십자가는 열쇠이며, 칼은 원천이다. 함께 지냈던 날들로 살아가는 기억의 삶이 십자가라면, 칼은 발견한 진리를 위해 달릴 길을 다 달리는 인내의 여정이다. 십자가는 고백이고, 칼은 그 고백의 증명이다. 십자가는 몇 번이고 돌아서는 참회의 눈물이고, 칼은 천둥과 뇌성에 돌아서는 개벽開闢이다. 십자가는 몸으로 사는 우여곡절迂餘曲折이고, 칼은 그리움의 기나긴 편지이다. 그러나 결국 십자가도, 또 칼도 같은 승리이다.

5 thoughts on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의 대축일(6월 29일) : 십자가와 칼

  1. 성 베드로의 십자가와
    성 바오로의 칼의 의미에서
    신앙의 생명을 발견합니다.
    그 안에서 어찌 살아내야 하는지
    무거운 누름이 있습니다.

    행복하세요. ~~^*^

  2. 일 순간 나의 온 일생을 바꾸게 한 계기, 사람들을 생각해보게 된다. 정말 그 중심에는 하느님이 계셨고, 미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때문에 미운 이도 없어지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더 깊이 사랑스러워진 것 같다. 나도 하느님의 관심 안의 사람임을 한번 더 생각하게 한다.

    아무도 아닌 베드로와 바오로 앞에 현존하신 예수님이 이 어려운 일을 그들이 해낼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주시어, 하느님 말씀을 전하고 공동체를 현존하게 하셨다. 지금 현재 우리 모두에게 어떤 용기와 어떤 지혜가 필요한지 기도 묵상하게 한다.

  3. 결정적인 순간
    베드로 사도 앞에 나타나신 그 분.
    늘 곁에 계셔 주셨던 그 분.
    도망치려던 사도를 붙잡아 주셨던 그 분.
    지금 이순간 제게 와주신
    그 분께 감사의 예를 올립니다.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복음을 전하신 두 사도께도 감사의 마음을
    보냅니다.
    이 아침 든든함으로 가득 채웁니다.

  4. 보이지 않는 부르심.사명. 순명 이 우리에게도 분명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처럼 ….. 작게나마 나에게도 십자가와 칼이 있을텐데 … 과연 삶속에서 어떻게 …..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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