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 쥬셉페 카파쏘(St. Giuseppe Cafasso, 1811~1860년) 신부는 돈 보스코가 태어나고 자란 지역, 아스티의 카스텔누오보에서 1811년에 태어났다. 작은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네 자녀 중 셋째였으며 막내였던 여동생 마리안나 카파쏘는 ‘콘솔라타 남녀 선교 수도회(I.M.C.)를 설립하고, 1880년 10월 2일자로 토리노 콘솔라타 성당의 주임으로 소임을 받아 본당을 영적 보고로 변화시켜냈던 공로를 인정받아 2024년 10월 성인품에 오르신 사제 쥬셉페 오타비오 알라마노(St. Giuseppe Ottavio Allamano, 1851~1926년) 성인의 어머니이다. 성인 사제 쥬셉페 알라마노 신부는 1861년부터 1866년까지 돈 보스코의 발도코 오라토리오 기숙생이었다. 그러니까 쥬셉페 카파쏘 신부는 쥬셉페 알라마노 성인 사제의 외삼촌이 된다.
돈 보스코는 자기의 회상록에서 쥬셉페 카파쏘를 여러 번 언급하고 있는데, 1827년 쥬셉페 카파쏘 신부를 처음 만났던 때를 그의 <돈 보스코 회상>에서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거룩한 섭리는 아스티의 쥬셉페 카파쏘라고 부르는 또 다른 은인을 만나게 해주셨다. 1827년 10월 둘째 주일이었다. 모리알도의 주민들은 그 지방의 축일인 하느님의 어머니 성 마리아 축일을 지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집안일이나 성당 일로 분주했다. 그들은 풀밭에서 담소를 나누거나 놀이를 즐겼으며 그 광경을 지켜보기도 했다. 나는 온갖 구경을 멀리하고 있는 한 사람을 보았다. 반짝이는 눈에 부드러운 자태, 천사 같은 얼굴의 키가 작은 신학생이었다. 그는 성당 문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 매혹당했고 그와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축제를 보러 가시겠어요? 가고 싶으신 데가 있으면 제가 안내해 드리겠어요.” 그는 내게 가까이 오라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는 아주 상냥하게 내 나이와 공부, 첫영성체를 했는지, 자주 고해성사를 보는지, 교리반에 나가는지에 대해서 물었다. 나는 흔쾌히 대답하고 나서 다시 물었다. “어떤 구경거리를 보고 싶으세요?” “귀여운 친구야, 사제들이 만드는 구경거리란 성당의 전례란다. 사람들이 거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참여하면 할수록 더욱 성공적인 것이 된단다. 종교예식은 언제나 새로운 것이므로 열심히 참석해야 하지. 나는 성당에 들어가기 위해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란다.”

나는 용기를 내어 말을 이었다. “그 말씀은 맞아요. 하지만 모든 것은 때가 있잖아요. 기도할 때가 있고 놀 때가 있잖아요.” 그는 웃으면서 자신의 인생의 좌우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말로 대화를 끝냈다. “성직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주님께 자신을 파는 사람이란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은 그의 마음을 차지하지 못한단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들의 선익이란다.” 나는 말과 태도에서 주님의 정신이 가득 풍기는 그 신학생에게 경탄을 금치 못했으며 그 이름에 대해서 호기심이 생겼다. 난 그가 바로 신학교 1학년인 쥬셉페 카파쏘 신학생임을 알게 되었다. 덕행의 거울이라고 불리는 그의 명성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71-73쪽)」
돈 보스코는 1841년 6월 5일 삼위일체 대축일 전날 사제품을 받았으며 첫 미사를 카파쏘 신부가 수석 사제로 있는 성 프란치스코 아씨시 성당에서 드렸다.(참조. 돈 보스코의 회상, 173쪽), 쥬셉페 신부는 돈 보스코를 제일 먼저 감옥과 소년원으로 인도했고(같은 책 186쪽), 청소년을 발견하도록 이끌었으며, 오라토리오 시작에서부터 돈 보스코에게 영감을 주고, 오라토리오의 어려운 살림에 구체적으로 물질적인 도움까지 아끼지 않았다.
사제 학교의 책임자
쥬셉페 카파쏘 신부는 어린 시절부터 이미 성인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분이다. 돈 보스코가 다녔던 키에리의 신학교에서 공부했고, 1833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품을 받은 지 넉 달 후에 사제들의 사목활동을 돕기 위한 초기 사제들의 양성소라고 할 수 있는 Convitto Ecclesiastico라는 기숙학교로 들어갔으며, 그곳에서 사제들의 양성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고 훗날 그곳의 책임자가 되었다. 돈 보스코 역시 사제품을 받은 뒤에 쥬셉페 카파쏘 신부의 권유에 따라 여러 좋은 사목지를 뒤로 하고 쥬셉페 신부의 사제 양성학교에서 3년여를 보냈으며, 이로부터 쥬셉페 신부의 안내에 따라 청소년과 함께 살아가는 생애를 시작한다.
영성의 노선
쥬셉페 신부가 이끄는 사제 양성소에서는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성, 성 알폰소 마리아 리구오리를 중심으로 하는 신학적이고도 사목적인 노선을 중심으로 삼았다. 훌륭한 고백 사제와 설교에 능한 사제를 양성하는 것이 그곳의 목표였다. 아울러 쥬셉페 카파쏘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영성을 깊이 연구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훗날 돈 보스코가 살레시오회를 설립하는 뿌리가 되었다. 쥬셉페 카파쏘 신부는 돈 보스코의 고백 신부로서 1841년부터 1860년까지 돈 보스코의 고백을 들으며 성사 안에서 그를 영적으로 인도했다. 쥬셉페 카파쏘 신부의 영성적 가르침은 일상에서 주어지는 모든 일에 감사하면서 성화로 나아가는 길을 찾도록 하는 것이었다. 살레시오회의 창립자로서 돈 보스코는 “쥬셉페 카파쏘 신부님의 아름다운 성덕은 일상에서 지켜야 하는 덕행을 놀랍도록 성실하게 지켜나가는 것이었습니다.”라고 그를 기억한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
쥬셉페 카파쏘 신부는 항상 가장 가난한 이들을 찾으려고 하였다. 그는 가난한 이들을 수시로 방문하였고, 사제로서 그들을 위로하는 한편, 그들에게 구체적으로 물질적인 도움을 주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감옥에 갇힌 이들, 그중에서도 사형수들에게 큰 관심을 기울였으며 ‘수감자들의 사제’ 혹은 ‘사형수들의 사제’라고 불리기도 했다. 신중하고도 절제 있는 영적 스승으로서 쥬셉페 카파쏘 신부는 사제들뿐만 아니라 많은 평신도와 정치인들, 그리고 수도회 창립자들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사제들의 진주
비오 11세 교황은 그를 가리켜 “이탈리아 사제들의 진주(the pearl of the Italian clergy)”라고 불렀다. 쥬셉페 신부는 짧은 병치레 이후에 49세라는 너무 이른 나이로 1860년 6월 23일 선종하였고, 그의 장례 미사에서는 돈 보스코가 그를 기려 강론했다. 그분의 성덕을 기려 교회는 그분을 1925년에 복자품에 올렸고, 1947년에 비오 12세께서 성인품에 올리면서 “사제들의 모범”이요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이며 “병든 이들의 위로자”요 “갇힌 이들, 그중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이들의 주보”로 교회의 공식 인준을 받았다. 비오 12세 교황은 1950년 9월 23일에 발표한 <Menti Nostrae>라는 교령을 통해 “모든 사제의 모범”으로 그분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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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가 갖추어야 할 미덕
인내, 가난, 겸손의 정신, 뒤로 물러남, 노동, 신심 실천에 대한 사랑. 이것이 바로 사제에게 필요한 덕이며, 불가결한 자질입니다. 그러나 참다운 하느님의 일꾼에게는 또 다른 정신, 또 다른 덕, 또 다른 활동이 요구됩니다. 그는 영혼들을 비추어 주고 성화시킬 운명을 지닌 세상의 빛이요, 이 땅의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사제는 신성하신 구원자와 닮기를 원하고, 복음 선포 영역에서 선을 행하고자 한다면,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스승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이 학문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뛰어난 일꾼들은 같은 학교의 학생들이었고, 모두 이 신성하신 스승을 본받았습니다.
사도적인 사람은 자신의 기도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이 기도학교를 포기하면 이 모범의 복사본이 되지 못할 것이고, 다만 물질적인 인간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혼과 정신 없이는 이름만 사도이지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고(1코린 13, 1 참조), 더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 하루가 전개되는 동안,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 봉사직 수행에 있어서, 그리고 그 일이 끝난 후에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자주 하느님께 들어 올리고, 그분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열려 있는 길로 유지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가 위험에 처하여 어떤 필요가 생길 때 그분께 달려가서 그분과 이야기하고 그분께 우리를 이해시키는 순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한 태도로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래야 지상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훔칠(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성하신 구세주께서는 친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가장 완전한 모범이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두루 다니시며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시고 모든 이를 고쳐 주셨다.”(사도 10,38)라고. 모든 사람을 온유하게 대하고,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하지 못하거나 여러분에게 나쁘게 행동하는 사람에게 특별히 그렇게 하십시오. 이것이 더 훌륭한 행동입니다.
신성하신 구세주께서 어떤 특혜나 총애를 베푸셨다면 그것은 항상 죄인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적대자들은 그를 일컬어 죄인이요 죄인들의 친구라고 불렀습니다(루카 11.2 요한 9,24 참조). 이는 그들의 무질서함의 친구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회개시키고 치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을 자애로 대했던 그분을 기억하면서 그들을 온유와 애덕으로 대하고, 그들에게 한 가닥 희망과 구원을 주었다는 위안을 마련합시다.
사도적인 사람은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의 구원 외에 더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이는 신성하신 스승께서 우리에게 남겨 주신 가르침입니다. “나는 내 영광을 찾지 않는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다.”(요한 8,50;6,38) 이 정직함과 깨끗한 지향은 항상 사도적인 사람들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러한 깨끗한 지향을 지니고 일함으로써, 사제는 자신의 수고의 무게를 거의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은 고통이라기보다 오히려 하나의 즐거움입니다. 하느님만 바라보고 다른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성 쥬셉페 카파쏘, ‘성직자 피정을 위한 묵상Meditazioni per gli esercizi spirituali al clero’에서, Torino, 1925, 240-257쪽 – 고유 성무일도 독서기도 제2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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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virtù del sacerdote
Spirito di pazienza, povertà, umiltà, amore al ritiro, al lavoro, alle pratiche di religione, ecco le virtù necessarie e le qualità indispensabili per il sacerdote. Ma altro spirito, altre virtù, altre opere si richiedono per un vero ministro di Dio, che quale luce del mondo e sale della terra è destinato ad illuminare, a santificare le anime.
Uomo di preghiera dev’essere il sacerdote, se vuole assomigliare al divin Redentore, se desidera fare del bene nel campo evangelico. Non occorre cercare altri maestri: i buoni operai che si resero eminenti in questa scienza, furono tutti allievi della stessa scuola, tutti copiarono da questo divino Maestro.
L’uomo apostolico abbia i suoi tempi fissi di preghiera. Rinunziando a questa scuola non saremo più copie di questo modello, ma solo uomini materiali, perché senza anima e senza spirito, apostoli di nome, bronzi sonanti(cf. 1 Cor 13,1) e nulla più. Oltre a questo, dobbiamo tenere rivolto il nostro cuore a Dio nel corso della giornata, prima di dar mano a qualche opera, nell’esercizio del nostro ministero e dopo d’aver faticato. Il nostro cuore si porti sovente a Dio, tenga come una via aperta per mantenere una continua relazione con lui; sicché capitandoci un bisogno, trovandoci in un cimento, abbisognando d’un qualche lume, sia un momento a portarci a lui, parlargli, farci intendere. Questo è pregare, e chi lo fa può dirsi uomo di orazione.
Con la dolcezza ci renderemo cari agli uomini e rapiremo i cuori sulla terra. Il divin Redentore se ne rese un modello, il più perfetto, sino a dirci egli medesimo: «Imparate da me che sono mite ed umile di cuore»(Mt 11,29). Di lui si dice che «passò beneficando e risanando tutti»(At 10,38). Dolci dunque con tutti; usate le particolarità con chi se le merita meno o si diporta male verso di voi: questa è la condotta migliore. Se il divin Redentore usò qualche particolarità e preferenza, fu sempre verso i peccatori, tanto che i suoi nemici lo chiamavano peccatore e amico dei peccatori(cf. Lc 11,2; Gv 9,24). Non l’amico dei loro disordini, ma per convertirli e guadagnarli. Procuriamoci il conforto di averli trattati con dolcezza e carità, di aver dato loro questo filo di speranza e di salute, nel ricordo di una persona che li ha trattati con bontà.
L’uomo apostolico non abbia altro di mira che la gloria di Dio e la salute delle anime. Tale è l’insegnamento lasciatoci dal divino Maestro: «Io non cerco la mia gloria… Sono disceso dal cielo non per fare la mia volontà, ma la volontà di colui che mi ha mandato»(Gv 8,50; 6,38). Questa rettitudine e purità d’intenzione fu sempre il distintivo degli uomini apostolici. Lavorando con tal purità d’intenzione, il sacerdote quasi non sente il peso delle sue fatiche, poiché il faticare per Dio è più un godere che un patire. Dio solo e nient’altro.(Dalle “Meditazioni per gli esercizi spirituali al clero” di san Giuseppe Cafasso, sacerdote, Torino 1925, pp. 240-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