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다’해(요한 16,12-1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요한 16,15)

교회는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첫 주일삼위일체 대축일을 규정한다. 이는 1334년 교황 요한 22세께서 교회의 공식 축일로 지정하면서 그렇게 되었다. 이 축일은 예수님의 생애와 관련된 어떤 복음적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역사 안에서 니체아 공의회(325년)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년)를 통하여 확정된 교의를 기념하여 거행하고 이에 관해 신앙을 고백하고자 함이다. ‘삼위일체’라는 말 자체는 교의적인 말마디로서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렇지만 성경은 아버지로서의 하느님,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 아버지와 아드님께서 역사와 구세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을 계시한다. 다른 그리스도인들과는 달리 오직 우리 가톨릭교회의 신자들만이 교회의 뜻에 순명하여 이 축일을 거행하면서 삼위일체의 위대한 신비를 드러내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공의회들의 결정에 따라 우리 신경에서 우리는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고, 인간을 위하여 그리고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외아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는다.』라고 고백한다.

구약에는 이스라엘의 유일신 사상 때문에 삼위일체에 대한 표현이 구체적으로 없으나, 초대 교회는 예수님과 성령을 하느님으로 고백하였고,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마태 28,19) 세례를 베풀면서 삼위일체를 자연스럽게 신앙 교리로 받아들였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어떻게 3위로 계시는가를 논리적으로 물으려는 시도나, 결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일 뿐이라는 사고방식은 피해야 할 두 가지이다. ‘삼위일체’는 교회의 역사와 함께 성경의 내용을 바탕으로 교의로 형성된 믿을 교리이자 신비이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께서 같은 본성의 한 하느님이라는 신비를 기리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서 우리의 진정한 생명이 시작되었으니, 성부, 성자, 성령을 부르는 ‘성호경’으로 시작되어 성부, 성자, 성령을 찬미하는 ‘영광송’으로 끝나야 하는 우리 인생에 관하여 묵상하는 날이기도 하다.

1.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오늘 복음의 대목은 부활 시기에 이미 몇 번 언급된 ‘예수님의 고별사’ 중 한 대목이다. ‘고별사’란 예수님께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수난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말씀하시는 분은 제4복음서에서 드러나는 영광의 예수님이시고, 현재 이 세상과 교회의 주님이신 분이시다. 주님께서는 ‘지금 여기’ 교회에 말씀하시며 부활하시어 살아계신 하느님,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이신 분으로서 말씀하신다.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18)라고 하시며 주님께서는 이미 “보호자”(요한 14,15-17.26;15,26-27;16,7-11)이신 파라클리토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믿으라고 초대하시고, 그 믿는 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경고하시면서 적대감과 박해를 받더라도 “산란해지거나 겁을 내지 말라” 하시며(참조. 요한 14,27;16,1-4.33),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쫒겨날 것”이고 “이미 심판을 받았다”라고 선언하신다.(참조. 요한 12,31;14,30;16,11)

제4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이미 몇 년을 두고 가르치셨던 당신의 제자들을 남겨두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요한 16,12) 하셨다 한다. 예수님께서도 많은 것을 전하고 싶고 마음은 있지만, 상대방이 감당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며 나눌 수 없어서 무엇인가를 완전히 공유할 수 없는 상황을 체험하셨다. 우리 역시 매일 그러한 내용을 경험한다. 찬찬히 헤아려서 무엇인가를 계속 파고들면 이해의 지평이 넓어지고 주고받는 말을 주의 깊게 듣다 보면 소통의 폭이 넓어지기도 하겠지만, 어떨 때는 벽에 부닥친 듯 넘을 수 없는 한계에 직면하기도 한다. 무엇인가를 아무리 이야기해도 상대방이 이를 알아들을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으며, 사실과 진실을 알리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게 마련이다. 이럴 때 우리는 괴롭지만,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우리가 그런 장벽에 굴복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어쩔 수 없이 내가 그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를 억지로라도 극복하려다가는 소통하자고 시작한 대화가 엄청난 불통의 문제로 비약할 수도 있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대화에서 예수님 편에서는 당신을 표현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었지만,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문제가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오늘은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언젠가 당신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과 믿음으로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역사와 인생 역시 인간에게 계시하는 바가 있을 것임을 아시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엇을 단순하게 듣기만 하고 지금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더불어 그 깊은 뜻을 언젠가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는 때가 오게 마련이다. 대 그레고리오St. Gregorius Magnus 교황(540?~604년 활동)께서는 이를 두고 『말씀은 듣는 이와 함께 자란다.』라고 표현하신다. 말씀은 실로 함께 나누는 이들, 함께 묵상하는 이들, 함께 인생을 듣고 역사와 표징을 듣는 이들과 함께 자란다. 이해를 깊이 하는 여정은 끝나는 법이 없고, “진리”를 향한 여정은 이 땅에서 절대 끝나지 않는다. 죽음 너머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저편의 “그때”에 비로소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1코린 13,12)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젠가 온전히 알게 될 “진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우리가 생각지도 못할 지위를 부여한다. 우리는 예수님과 제자들 간에 오간 내용을 들으면서 단지 과거의 사건 기록으로만 이를 들을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살아가는 오늘 우리의 사건과 역사의 말씀으로 신중하게 읽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고, 한번 주어져 우리가 안절부절못하면서 간직해야만 할 그런 보물 같은 것만은 아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손에서 성장하고 자라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을 주시면서 제자들이 당신에게서 들은 바를 박물관에 박제라도 하듯이 폐쇄적인 곳에 고정적인 어떤 것으로 간직하려고 들 것이라는 위험을 미리 간파하셨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이 세상의 길에서 긴 여행을 하고 세기와 역사를 통해서, 다른 문화와 언어, 그리고 역사를 만나 더욱 풍요로워지며 성장하기를 바라셨다.

우리에게 전해진 “진리”는 오늘의 교회와 어제의 교회가 지닌 다양성 안에서, 구원에 필요한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교회 안에서, 분명 어제의 교회보다는 복음 자체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있는 오늘의 교회 안에서, 더욱 깊어지고, 성장해야 하며, 확장되어야 한다. 복음이 바뀐 것이 아니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 『교회의 옛 교부들보다도 오늘의 우리가 어쩌면 더 잘 이해하는 면이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어제의 우리보다 오늘의 우리가 복음을 더 잘 이해하고 있다.

2.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진리 안으로 이끌어

그러나 이러한 성장은 우리 안에 내재한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정신의 탐구와 그 결과가 아니다. 부활하신 주님,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발걸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다.”(요한 14,13ㄱ)라고 하신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팔레스티나의 거리를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걸으시던 모습으로 지금의 우리와 함께 걷지는 않으신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히브 11,13 1베드 2,11)로서 세상 길을 걷고, 사람들 사이를 걸으며, 이방인들 사이를 걷는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가 아니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는 고아가 아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총이요 선물인 성령, 예수님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이신 성령(체사레아의 성 바실리오)』, 이제는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우리의 동반자가 되신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성령께서는 빛이시며 힘이시고 보호자이시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다. 어두운 밤에는 감미로운 빛이시고, 더위를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이시며, 우리가 흔들릴 때 우리를 굳건하게 붙들어주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우리가 결코 소유해보지 못한 진리를 찾아 우리의 길을 가고 있지만, 성령께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진리 너머, 결코 끝이 없는 진리에까지 도달할 가능성을 주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나아가는 진리는 분명 우리의 지적인 이해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으시는 그런 진리이며, 우리 인간 전체를 아우르시는 진리이다. 단지 우리가 찾고 가르치며 배우는 교의나 교리가 아니며 어떤 공식이나 사상도 아니다. “내가 진리이다.”(요한 14,6) 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체이다.

3. “나에게서 받아모두 나의 것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분(성령)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나에게서) 들은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 그분(성령)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요한 16,13ㄴ-15) 하신다. 성령께서는 불고 싶은 데서 불어와 불어가고 싶은 데로 가는 바람이 아니시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영이시며 예수님과 분리된 적이 없는 분이시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시어 예수님에 대해 말씀하시면 이는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는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주셨다.”(요한 1,18) 한 그대로 지극한 인간의 삶과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신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는 이제 하느님에 관해서 더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아드님과 모든 것을 함께하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가리킨다. 아드님은 아버지에게서 터져 나온 말씀이고, 성령은 말씀이 터져 나오게 하신 하느님의 숨이다. 이와 같은 모습으로 복음사가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하느님을 성부, 성자, 성령으로 볼 수 있도록 우리를 동반해 준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미사의 시작 때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라고 인사하는 이유이다. 사랑이신 하느님, 아드님 예수를 통해서 우리와 하나 되신 하느님, 성령을 통하여 계속 생명의 친교를 이루시는 하느님이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삼위일체에 관한 이 복음 대목을 읽거나 되풀이하면서 이를 교의적인 내용을 담은 논문 정도로 변질시켜서도 안 되고, 어떤 선문답처럼 알쏭달쏭한 수수께끼로 만들어서도 안 되며, 그럴듯한 수학 공식 정도로 풀어서는 안 된다. 이 복음 말씀이 진실로 “진리”라면 가장 작은 이들, 그다지 지적인 화려함을 자랑할 필요가 없는 이들, 소박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이 복음 말씀을 선포하여 그들로부터 확인하고 배워야 한다. 그들이 우리의 입술에서 나간 말로 무엇인가를 알아들었다면, 우리도 무엇인가를 조금이라도 이해한 것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본다면서도 보지 못하는 눈먼 이(참조. 요한 9,40-41)이고, 무엇인가를 안다면서도 무식한 자이며, 신앙을 고백한다면서도 그저 판에 박힌 교리나 나불대는 자들일 뿐이다. 복음은 작은 이와 철부지, 단순하고 무식한 이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것이며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어진”(마태 11,25 루카 10,21) 실제이다. 괜스레 어렵고 수수께끼처럼 만들어 그 누구의 마음에도 새겨지지 못할 또 다른 돌판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 몸에 십자가를 그어 우리의 마음과 정신, 두 팔과 두 발로 기꺼이 아버지와 아드님과 성령의 것이 되어 그분의 도구가 되겠다는 우리의 각오와 열망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넉 줄밖에 안 되는 오늘의 이 짧은 복음 안에서 “너희”라는 말마디는 무려 6번이나 반복된다. 아멘!

***

『…이 세상과 인류를 위해 펼쳐진 하느님의 드라마 안에서 작가는 누구이고 배우는 누구였으며 연출가는 누구였습니까? 바로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이었습니다. 성부께서는 창조하셨고 표현하셨으며 모든 것의 꼴을 갖추게 하신 분이었고, 성자는 이를 육화하셨고, 실현하셨으며, 실제가 되게 하시고 모든 것이 현재와 행동이 되게 하신 분이었으며, 성령께서는 고무하시고, 제안하시며, 소화하시고,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도록 세심하게 배려하신 분이었습니다. …작가인 성부께서는 드라마 밖에 군림하시는 혹독한 비평가가 아닙니다. 성부의 작품은 당신 자신이 몸소 당신의 피조물을 향해 겸손하게 자신을 굽히시는 바로 그런 내용을 담았습니다. 배우인 성자께서는 성부의 사랑받는 소중한 외아드님이셨습니다. 성부의 뜻 안에 완벽하게 일치하시는 분이었으며 한순간도 그분의 뜻을 잊지 않으시는 분이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죽으셨고 부활하신 바로 그런 분이었습니다. 연출가인 성령께서는 완전하게 성부의 작품에 담긴 혼魂, 곧 성부 자신을 완벽하게 이해하신 분이었습니다. 성부께서는 성령께 당신의 작품을 맡기셨고, 그 작품에 대한 성령의 해석과 인도하심으로 성자께서는 당신에게 부여된 작품을 당신의 생生으로 소화해 내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드라마는 이처럼 완벽한 삼위일체의 드라마였고, 순수 그 자체인 사랑의 드라마였으며, 인간에게 온전히 하느님 자신을 내어놓는 선물의 드라마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모든 것을 압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하느님의 드라마에 우리 생의 마지막이고도 진정한 의미가 담겨있음을 압니다. 매일 매일 우리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드라마 가장 깊은 곳 마지막까지 참여할 수 있기를 빕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영광을!(한스 우르스 폰 발타살Hans Urs von Balthasar, 1905~1988년, 스위스 태생 예수회 신부)』

※참조. 할머니에게서 배운 기도 https://benjikim.com/?p=14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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