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프란치스코와 할머니

(1963년 12월 13일에 저는 서품을 받았습니다. 제가 서품을 받던 날 저의 할머니, Rosa Margherita Vassallo, 1884~1974년) 로사 할머니는 더할 나위 없이 기뻐하셨습니다. 제가 사양했음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서품식을 위한 작은 선물을 마련해 두셨더랬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최소한 6년 전부터 이 선물을 준비해 오셨다고 합니다. 외아들이셨던 제 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내신 뒤로는 당신들도 이 뜻깊은 날을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마음에서였죠. 제가 수련원에서 집에 다녀갈 때면 할머니는 늘 “사제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미사를 봉헌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그러시면서 어떤 어머니가 사제가 될 아들에게 “매 미사를 첫 미사처럼, 또 마지막 미사처럼 봉헌하라.”고 당부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하셨습니다.

할머니는 봉성체 성합과 병자성사용 성유 용기를 정성스레 포장하시고, 거기에 쪽지 한 장을 곁들이셨습니다. 서품식 날에 제 손에 직접 전해지기를 바라며 세세한 지시 사항까지 적어 두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서품식 미사 후에 이 선물을 제게 직접 건네주셨습니다. 조반니 할아버지는 이미 5년 전에 하느님 곁으로 가신 뒤였습니다.

할머니는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셨지만, 글로 쓰실 때는 다소 어려워하셔서 이탈리아어를 섞어 쓰시곤 했습니다. 그렇게 써 주신 그 쪽지를 저는 지금까지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거룩한 날, 너의 축성된 두 손으로 구세주 그리스도를 모시게 되고, 더욱 깊은 사도직으로 가는 특별한 문이 열리는 이 중요한 날에 작은 선물을 보낸다. 비록 물질적으로는 보잘것없지만 영적으로는 큰 의미가 담겨 있단다. 로사 할머니와 후안 할아버지는 비록 몸은 멀리 있어도 영적으로는 네 곁에 가까이 있음을 잊지 말아라. 하느님께서 복을 내리시기를.

성인 사제 되소서haga santo.

그리고 저는 할머니께서 선종하시기 8년 전 주님 성탄 대축일에 남기신 영적 유언을 50년이 넘도록 늘 가슴에 품고 다니고 있습니다.

산후스토에서

1966년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

내 마음의 가장 귀한 보화인 이 손주들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기를 빈다. 그러나 언젠가 고통이나 병마가 찾아오거나, 사랑하는 이를 잃는 슬픔을 겪게 될 때면, 이것만은 꼭 기억해다오. 지극히 거룩하신 순교자께서 계신 감실을 향해 간절한 마음을 드리고, 십자가 아래 서 계신 성모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장 깊고 아픈 상처에 치유의 향유가 한 방울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이 유언을 성무일도서 속에 고이 간직해 두고 기도문처럼 자주 읽곤 합니다.

*출처: 교황 프란치스코의 자서전, <프란치스코 교황·카를로 무쏘, 희망(Spera), 이재섭 외 3인 옮김, 가톨릭출판사, 2025년, 287-288쪽>

4 thoughts on “교황 프란치스코와 할머니

  1. 아름답습니다. 할머니의 사랑이 감실 속 성체로 부터 향유를 길어내는 기적이 됩니다. 사랑만이 상처를 치유합니다

  2. 십자가 아래 서 계신 성모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장 깊고 아픈 상처에 치유의 향유가 한 방울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마음에 위로를 전해 주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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