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1장
우리의 영혼에는 두 부분이 있는데 서로 어떻게 되어가는가?
테오티모여, 우리는 한 영혼을 가지고 있을 뿐인데, 이 영혼이란 본래 나누어질 수 없지만, 이 영혼 안에는 완전성의 몇 가지 단계가 있다. 왜냐하면 영혼이란 것은 살아 있는 것이고, 감각할 수 있는 것이고, 이성적인 것이기 때문이며, 또 이러한 단계를 따라 영혼은 고유한 제 특성과 경향성의 다양성도 지니고 있게 되며, 이러한 고유성이 나의 경향성에 의해서 영혼은 어떤 사물을 회피하고, 어떤 사물과는 일치한다.
그 이유는, 첫째로 포도 넝쿨이 양배추를 싫어하여, 그것을 피해서 뻗어나가는데, 그것은 서로가 해롭기 때문이지만, 올리브 나무와는 몹시 사이가 좋은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음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하고 뱀은, 자연적으로 서로는 반목 중에 있고, 단식하고 있는 인간의 침이 자연적으로 뱀에게 닿으면 인독으로 뱀이 죽기까지 한다.(금식한 사람의 입에서 뱉어진 침을 뱀이 받으면, 그 뱀이 죽는다는 것은 유럽의 통속적인 지식으로 되어 있었다. Plinius의 Naturae Historia VII. 2) 그러나 사람과 암양과는 이상할 만큼 잘 어울려 서로 좋아하며 친숙한 편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은 무슨 상호 간에 대한 인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즉 한편이 제게 상극이 되거나 상반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자기에게 해롭다는 것을 미리 알기 때문에 싫어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또 자기에게 무슨 유익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서로 호감이 가거나 친화력을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비밀히 숨어 있는 품성에서부터 이러한 감각적인 반감이나 상반성, 또는 호감이나 친밀감이 나온다고 봐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 안에 가지고 있는 감성적感性的 인식을 통하여 여러 가지 어떤 사물에게로 이끌리고 찾게 되거나, 밀쳐지고 회피하게 되는 감각적 욕구를 지니고 있다. 모든 것은 이와 같이, 마치 동물들이 제게 적응되는지 아닌지를 알고 있어 서로 끼리끼리만 즐겨 찾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러한 욕구에는 우리가 일컫는 그 감각적인 또는 동물적인 사랑이 머물러 있기도 하고, 거기에서 발산해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이러한 사랑은 사실 본 의미의 사랑이라 할 수는 없으며 단순한 욕구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셋째로, 우리는 이성적인 존재라, 의지하는 것을 지니고 있으며, 이 의지를 통하여 우리는 선을 찾게 되는데, 무엇이 어떠함을 알거나 판단케 되는 대로, 선을 추구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도 이성적인 것이므로, 우리는 완전성의 두 가지 관계를 명확히 말할 수가 있다. 이것은 성 아우구스티노 이후, 모든 박사들이 영혼의 두 부분이라고 부른 것인데(신학대전, Ia, q, LXXIX, a,9), 상부上部와 하부下部를 말한다. 감각기능에 의해서 무엇을 알게 되고 경험한 것을 따라 결론을 추리해 내고 이끌어내는 부분을 영혼의 하부라고 부르고, 감각기능의 경험에 근거를 두지 않고 정신의 분별력과 판단에 근거를 두고 있는 지성적 인식을 따라 결론을 추리하여 내고 말하는 것을 영혼의 상부라고 하는데, 이 상급 부분을 흔히는 영혼의 정신 혹은 정신력이라 하고 하급 부분은 흔히 감각 또는 감정과 인간적 이성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영혼의 이러한 상급 부분은 두 종류의 빛을 따라 작용한다. 하나는 자연적 빛이라고 해서 보통으로 철학을 하는 자들이나 학문을 하는 이들이 혜택을 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초자연적인 빛으로서 신학자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이 계시된 신앙과 하느님의 말씀에 대하여 갖는 관계를 이루어 주는 것이며, 특별히 저들의 정신은 조명照明이나(조명照明=illustratio이란 말은 성 아우구스티노의 사상 중에 매우 중요한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마치 태양의 광선이 없이는 우리의 육체가 지닌 눈이 제아무리 좋아도 아무것도 볼 수 없듯이, 하느님의 광명, 즉 정신적이며 지성적인 빛이 없으면 우리의 이성이나 지성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태양의 광명 속에서 눈이 만사를 보듯, 하느님의 광명 속에서 우리의 지성은 모든 것을 인식한다. 이 지성의 인식에 필수적인 것이 하느님의 조명, 즉 광명을 주는 것이다) 영감靈感, 또는 천상적 충동에 의하여 인도된다. 이는 성 아우구스티노께서 말씀하신 바로서, 영혼의 상부구조 내지 부분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법에 우리 자신을 집착케 하고 우리 자신을 적용케 하는 것이다.
야곱은 가정의 극단적 곤궁에 찌들어 벤야민을 그의 형제들에게 맡겨 이집트로 데리고 가게 하였는데(참조. 창세 43,1-14), 이것은 야곱의 본의가 아니었으나 하여간 성경의 역사적 증언임은 사실이고, 이 사실에서 야곱은 두 가지 의지가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하나는 하부적인 것으로서 그가 벤야민을 보내기를 섭섭히 여김이고, 다른 하나는 상부적인 것으로서 그를 보내기로 결심하였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를 보내기를 꺼려함은 그를 자기 곁에 두고 보는 즐거움에 의한 것이고, 그를 보내기를 싫어함은 그와 떨어져 있기를 싫어하는 철저한 감각적 이유 때문이었으나, 그는 가정의 처지와 형편을 따라 그를 보내기로 결정하게 된 것이다. 즉 가까운 앞날에 곧 들이닥칠 가정의 곤궁을 미리 보고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아브라함은 자기 영혼의 하등 부분의 요구를 따라, 천사의 기쁜 소식 즉 장차 한 아들을 가지리라는 소리에 이런 말을 하였었다. “나이 백 살 된 자에게서 아이가 태어난다고? 그리고 아흔 살이 된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단 말인가?”(창세 17,17) 그러나 상등 부분을 따라 그는 하느님을 믿었고,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창세 15,6) 그리고 하부를 따라 그는 크게 근심하였으니,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말씀(참조. 창세 22,2)을 들었을 때다. 그리고서 자기 영혼의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 자기 아들을 제헌키로 용감히 결정하였다.
우리 안에는 항상 무엇인가 좀 늘 상반되는 의지가 있음을 매일의 생활에서 경험하게 된다. 어떤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공부시키기 위해서나 궁중에 체류케 하려고 얼마 동안 떠내 보내게 되었다고 하자. 이런 때 아버지는 아들을 보냄에 있어 눈물을 머금게 될 수도 있으나, 이러한 사실이 입증하는 바는 아들의 수덕 진보를 생각하고 영혼의 상부에서는 아들의 출발을 비록 원한다고 할지라도, 하부에서는 이별을 몹시 싫어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어떤 딸이 결혼하게 되어 부모의 슬하를 떠나 남편에게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친정 부모의 축복을 받으며 작별 인사를 드리게 되는 경우, 자신은 아무래도 떠나야 될 몸임을 알고 있고 그대로 행동하게 하는 것은 그의 영혼의 상등 부분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 역시 눈물을 흘리는 것이 보통인데, 이것은 영혼의 하부에 의한 것이다. 즉 상부에서는 인정하고 하부에서는 반항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니교 신자들이 생각하듯이, 우리에게는 영혼이 둘이라든가 또는 한 영혼이지만 두 가지 본질 내지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 아우구스티노께서도 그의 고백록 제8권 제10장에서 그러한 이성적二性的인 말씀은 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즉, 여러 가지 매력에 이끌리는 의지나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서 충동을 받는 우리의 의지는 그 자체 내에 있어서 나뉘는 것처럼 보이기 쉽다. 두 가지 방도로 이끌리며 영혼은 제 자유사용으로써 이것이나 저것이 나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연고다. 왜냐하면 가장 힘센 의지가 다른 것들을 정복하고 위를 차지하게 되며, 영혼 속에 악에 대한 느낌을 남겨 둘 따름이니 이러한 악이란 곧 투쟁이 만들어 내는 것으로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마음에 걸림(contrecœur<Contre-Coeur, 영어- reluctance)’이란 것이리라.
그러나 우리의 구세주께서 보이신 표양은 이 점에 있어서 매우 경탄할 만한 것이며 또 좀 고찰해보면, 구세주께도 영혼의 상부와 하부의 구별을 의심할 수 없게 되는데, 그 이유는 구세주께서 동정녀의 몸에 잉태되시는 순간부터 이미 완전한 영광을 입으셨음을 신학자들치고 모르는 이가 누구랴? 또 그럼에도불구하고 구세주께서는 그와 동시에 슬픔과 한탄과 괴로움을 당하셨는데, 육체상으로만 고통을 당하셨고 영혼으로는 괴로움을 안 받으셨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영혼은 감각 내지 감지感知하시며, 달리 말해서 느끼게 하는 원동력 자체가 되기 때문인 것이니, 구세주께서 어떤 외적 고통을 당하시거나 혹은 당신 가까이 닥치는 고통을 보시기 전에 이미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까지도 주님의 영혼은 고통하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할 만하시면 그 잔을 멀리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실 정도였으니(참조. 마태 26,37-39), 이는 곧 그러한 수난을 모면하시려 함이었다. 그것은, 아주 똑똑히 주님의 영혼의 하부 원욕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혼의 하부는 준비된 수난이 슬프고 괴로운 대상에 대한 생성한 상상이 그의 상상력 안에 재현되었던 것이다. 결국 여기에서 매우 합리적인 결론으로서, 할 수만 있으면 그러한 지겨움을 미리 피하든가 멀리할 수 있기를 바라게 되어 성부께 간구하시기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여기서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바로 영혼의 하부란 것이 감각기능과 동일한 것이 아님과 하부적 의지란 것이 영혼의 감각적 욕구 자체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감각적 욕구는 영혼이 아니며, 그 감각하는 정도를 따라 보더라도 무슨 요청하는 기도를 올리거나 할 능력이 없는 것이니, 기도란 벌써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기능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며, 특히, 감각이 그 욕구력에 알릴 수 있을 만큼, 감각이 도달치 못하는 대상을 들어 하느님께 말씀드릴 능력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세주께서는, 그 영혼의 하부 작용을 하시면서 우리에게 보이시는 바가 있으니 그것은 곧 그의 영혼이 취하는 행동과 관찰을 따라 그의 의지는 고통과 번민을 회피하려 하셨으며, 후에 영원한 법에 집착하고, 성부의 어명에 힘있게 따라야됨을 그의 영혼의 상부에서 밝히 보이자, 그는 영혼의 하부에서 몹시 반항함에도 불구하고 즐겨 죽음을 받아들였으니, “아버지,…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하였다. 주께서, “제 뜻”이라고 하심은 바로 당신 영혼의 하부가 요구하는 바를 뜻하심이며, 또 그는 당신이 상부의 의지를 가지고 계심을 기꺼이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