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4. 저의 주 하느님, 당신의 심오한 비밀의 저 품속이 얼마나 깊습니까? 그 대신 제 죄악들은 그 품에서 저를 얼마나 멀리 내치는 결과를 냈습니까?(11-31.41)
3675. (시간 속에서 기대expextatio, 주시contuitus, 기억memoria을 거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인식과 영원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직관intuitio은 사뭇 다르다.)
3676. 인간의 빈약한 지성은 대개 말로만 풍성합니다. 진리의 발견보다는 시비에 말이 더 많고, 성취보다 요구에 말이 더 길고, 받드는 손보다 두드리는 손이 더 부산합니다.(12-1.1)
3677.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모든 사물-자연본성이 갖춘 ‘정도modus’, ‘형상specis’, ‘질서ordo’는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된 속에 있는 보편적인 선들이고, 형상이 탁월한 것은 형상이 ‘곱다speciosi’라고 한다.-De natura boni 18,18)
3678. (물체는 아니지만non corpus 허무는 아닌non nihil 무엇, 그리스 철학자들이 거론하던 제일질료materia prima와 흡사한 존재 상태를 아우구스티누스는 ‘무형의 질료informis materia’라 명명하고 제12권의 토론주제로 삼는다. 4.4에서 ‘형태없이 그것을 만드셨고 그것으로부터 형태 있는 세계를 지어내셨다’고 명기한다.)
3679. 형상形相과 무無 사이에 있는 무엇, 형상화된 것도 아니고 무도 아닌 무엇, 차라리 무에 가까운 무형quiddam inter formam et nihil formatum nec nihil, informe prope nihil(비록 문학적이지만 질료에 관한 가장 정확한 서술로 꼽힌다)을 생각해내기보다는, 일체 형상이 없는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12-6.6)
3680. 오, 진리여, 제 마음의 빛이여, 제 어둠이 저한테 말 거는 일이 없게 해 주십시오. 제가 저 따위 것들에로 휩쓸려 떠내려가다 보니 어두워졌습니다만 바로 거기서, 바로 거기서도 당신을 애모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헤맸고 그러고서 당신을 기억해냈습니다. 저더러 돌아오라는 당신의 목소리를 제 뒤에서 들었으며, 그것도 소란스럽고 시끄러운 자들의 소동으로 말미암아 간신히 들었습니다. 지금은 보십시오. 제가 목이 타서 헐떡거리며 당신의 샘으로 돌아오는 중입니다. 아무도 저를 가로막지 말게 해 주십시오. 여기서 마시고서 여기서 살아나야겠습니다. 제 스스로 저의 생명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니 저 나름대로 산 것이 잘못이었고 그것이 저한테는 죽음이었습니다. 당신 안에서 제가 되살아나는 중입니다.(12-10.10)
3681. (악의 정체를 ‘존재하시는 당신께로부터 돌아서서 덜 존재하는 것으로 기우는 의지의 움직임motus voluntatis a te qui es, ad id quod minus est’으로 규정하였다.)
3682. (삼라만상의 아름다움이 흠이 생기지 않는 것은 다음 세 가지 때문에, 다시 말해서 죄인들의 단죄, 의인들의 단련, 복된 이들의 완성으로 인해서다.-참된 종교 23,44)
3683. 저의 하느님, 오묘한 깊이입니다. 그것을 들여다보는 일이 끔찍하고, 경외의 공포이자 사랑의 전율입니다.(horror honoris et tremor amoris:두렵고도 매혹적인 성스러움이 주는 이 전율을 교부는 본서에서도 이미 두 번이나 피력하였다. ‘당신께서는 저에게 세찬 빛을 쏟으시어 저의 허약한 시력에 타격을 주셨고, 그래서 저는 사랑과 두려움에 몸을 떨었습니다.’-7,10,16 ‘저를 들이비추고 생채기를 내지 않은 채 제 마음에서 떨리고 그와 닮았다는 점에서 화끈거립니다.’-11,9,11)(12-14.17)
3684. 당신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 전부를 한꺼번에 또 동시에 또 항상 원하신다.(semel et simul et semper velle omnia quae vult: 하느님의 인식은 ‘한꺼번에 또 동시에 또 항상’ 이뤄진다면,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해와 기억과 의지가 ‘하나요 한 생명, 한 지성, 한 존재-삼위일체론 10,11,18’라면, 하느님의 의지 역시 ‘원하시는 모든 것 전부를 한꺼번에 또 동시에 또 항상 원하신다’라는 이 문장이 나온다.)(12-15.18)
3685. (이해하는 사람은 알고 있다. 아니, 아는 사람은 이해한다. 무슨 뜻인지 아직 모르는 사람은 지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바를 신앙으로 붙들라. 이럴 때 신앙은 공덕이고 이해는 그에 대한 보상이라고 하겠다.-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47,6;48,1)
3686. 저의 하느님, 제 비천함의 기품이시고 제 수고의 안식처이시여!(비천한 나의 높음, 수고로운 나의 안식-최민순 역본)…저희 모두가 ‘같은 한 덩어리ex eadem massa’(교부는 이 문구를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악의 연대성을 거론하는데 사용한다. ‘죄악덩어리massa peccati’-로마 9,21 참조.)에서 나오는데 또 당신께서 기억해 주시는 까닭이 아니면 인간은 대체 무엇입니까?(12-26,36)
3687. (하느님과 피조물의 거리는 완전성의 차이인데, 단순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공간상의 거리로 상상한다.)
3688. 주 하느님, 날개도 미처 돋지 않은 새 새끼를 가엾게 여기셔서 길 가는 사람들이 밟지 않게 해 주십시오. 당신의 천사를 보내셔서 그가 그를 둥지에 도로 넣어주어, 날 수 있을 때까지 거기서 살아남게 해 주십시오.(12-27.37)
3689. 영원으로 말하자면 하느님이 만유에 앞서시고, 시간으로는 말하자면 꽃이 열매에 앞서는 경우이고, 선택으로 말하자면 열매가 꽃에 앞서는 경우이며, 시원으로 말하자면 소리가 노래를 앞서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꼽은 이 네 가지 경우 가운데 맨 처음과 맨 끝은 알아듣기 아주 힘들고 가운데 둘은 알아듣기 아주 쉽습니다. 주님, 당신의 영원을 관찰할 식견은 드물뿐더러 그것을 관조하기는 너무도 힘겹습니다.(12-29.40)
※ 총 13권 278장으로 이루어진 <고백록>을 권위 있게 맨 먼저 우리말로 소개해주신 분은 최민순 신부님으로서 1965년에 바오로딸을 통해서였다. 여기서는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Confessiones, 성염 역, 경세원, 2016년>을 따랐다. 각 문단의 앞머리 번호는 원문에 없는 개인의 분류 번호이니 독자들은 괘념치 말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