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과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수도복을 입는 도미니코 수도회의 창설자로서 서방 교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성인 중 한 명으로 추앙받는 사제 성 도미니코(St. Dominico, 1170~1221년)는 8월 6일에 귀천하셨다. 그러므로 그날을 축일로 설정하는 것이 마땅하였으나 이미 전례력에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이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그날과 가까운 8월 4일에 축일을 지내기도 했다가 오늘날은 8월 8일로 옮겨 지내게 되었다. 성인의 실제 탄생일이 8월 8일이기도 하다. 능숙한 언변으로 신新 마니교neo-Manichæan 분파라고 할 수 있는 알비파Albigenses(Albigensianism) 이단을 대적하는 등 청빈한 삶과 설교로 복음의 진리에 관해 철저한 탐구를 강조한 그는 1234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천문학자와 설교자의 수호성인이다. 상징물은 백합, 성경, 개이며 그의 유해는 이탈리아의 볼로냐에 있는 산 도메니코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원래 도미니크 구즈만Dominic Guzman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성인은 스페인 칼레루에가Caleruega 출신이다. 아버지는 펠릭스, 어머니는 요안나로 알려지는데, 전승에 따를 때 그의 어머니는 오랜 기간 불임이었고, 칼레루에가 북쪽 오늘날 산토 도밍고 데 실로스 수도원(베네딕토 수도원)이라고 불리는 곳을 순례하며 기도하여 아들을 얻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뱃속에서 횃불을 입에 문 개가 한 마리 튀어나오면서 온 세상을 불태우는 꿈을 실로스에서 꾸었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적인 이야기는 훗날 성인의 이름을 따서 설립한 도미니코 수도회를 라틴어로 ‘도미니카누스(Dominicanus)’라고 부르는데, 이 ‘Dominicanus’라는 말마디를 ‘주님의 개(라틴말로 주님, Domini + 개, canis)’라는 말로 풀어헤쳐 볼 수 있는 것과도 연관된다. 부모와 주교였던 외삼촌의 손에서 자랐으며 1194년 25세의 나이로 오스마 교구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성 베네딕토의 규칙을 따르는 오스마 교구의 사제로서 외교적인 임무에도 봉사하였으며, 「사제 도미니코는 1203년과 1205년에 오스마의 주교인 복자 디다코 데 아제베도Didacus de Azevedo를 수행해 북유럽을 여행하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한다. 그는 프랑스 남부 랑게독Languedoc을 여행하면서 그곳에서 발생한 영적인 것만 선하고 물질적이거나 육적인 것은 모두 악하다고 주장하는 알비파 이단으로 인해 교회가 겪고 있는 고통을 목격하며 교회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깨달았다. 또한 1206년 프랑스 남부 몽펠리에Montpellier에서 알비파Albigenses, 발두스파Waldenses, 카타리파Cathari에 대항하는 시토회 출신 교황 사절을 만난 후 이단을 척결하는 사명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출처. 굿뉴스)」 성인은 1215년 프랑스의 툴루즈 지역에서 여섯 명의 동료들과 함께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규칙을 따르고자 수도회를 설립하였고, 1217년 1월 교황 호노리우스 3세로부터 ‘설교자들의 수도회(Ordo Praedicatorum, 약칭하여 O.P., 도미니코회의 공식 명칭)’로 수도회로서 공식 인준을 받았다. 1220년 초 호노리우스 3세 교황은 도미니코와 그의 동료 남자 수도자들을 고대 로마 성당 가운데 하나인 산타 사비나 성당에 초대하여 머무르도록 배려하였다.
금욕적인 생활과 과로로 1221년 8월 6일 정오에 선종한 성인이 세상을 떠날 즈음, 이미 서유럽의 8관구에는 60여 곳의 수도원이 설립되었으며 500여 명의 수도자가 있었고, 1300년경에는 500여 곳의 수도원에 회원들이 1만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도미니코 성인이 과연 로사리오 기도의 창시자인가 하는 데에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참조-http://benjikim.com/?p=11085), 도미니코 성인이 성모님으로부터 묵주를 받는 장면을 담은 예술 작품이 많을 정도로 묵주 기도와 도미니코 수도회의 영성 간에 깊은 연관성이 있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이를 두고 교황 레오 13세께서는 1889년에 “카르카소네의 주교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묵주 기도의 기원이 일정 부분 도미니코 수도회였음을 확인하였고, 교황 비오 12세께서도 “성모님의 묵주는 성 도미니코 수도회 회원들의 삶을 완전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얻도록 해주기 위한 원리와 토대로 바쳐지게 되었다.”라는 말씀을 남기신 적이 있는 등, 역사적으로 13명의 교황님께서 직·간접으로 이를 확인하신 바 있다.(*참조. Robert Feeney, St. Dominic and the Rosary, catholic.net / Fr. Donald H. Calloway’s book, The Champions of the Rosary 등) 또한 도미니코 수도회는 몰타 공화국과도 인연이 깊은데, 이는 도미니코회 출신이었던 교황 비오 5세께서 성 요한 기사단이 몰타에서 도시(오늘날 몰타 공화국의 수도 발레타) 건설 공사를 지원하도록 한데서 연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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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하느님과 더불어, 하느님에 대해 말했다
그의 생활의 거룩함과 그 마음속에 타오르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미루어 보아 도미니코는 은총으로 뽑힌 도구임이 틀림없다. 그는 언제나 꿋꿋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성격은 연민이나 동정심으로 마음이 움직일 때 외에는 아무 변함이 없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기쁜 마음은 얼굴 표정을 기쁘게 만든다.”라는 말이 있듯이 도미니코는 인자하고 기쁜 표정을 통하여 자기 영혼의 평온을 드러내 주었다.
그는 어디서나 말과 행동으로 자신이 복음의 사자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낮에는 자기 형제들과 동료들을 대할 때 그보다 더 명랑하고 소탈한 사람이 없었고 밤에는 그보다 더 열렬히 기도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말이 적고 과묵한 편이었다. 그리고 입을 열 때는 기도 중에 하느님과 더불어 대화하거나 아니면 하느님에 관해 형제들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형제들에게도 이렇게 하도록 권고했다.
도미니코는 기도드릴 때 하느님께 특별히 청하는 것 한 가지가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일하게끔 해주는 그 열렬한 사랑을 하느님께 구했다.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모든 힘을 다하여 자신을 송두리째 바칠 때만 자신이 그리스도 신비체의 참된 지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우리 구원을 위해 당신 자신을 모두 바치신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고 싶어 했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오랫동안 깊이 생각한 후 하느님의 감도를 받아 마침내 설교 형제회를 세우게 되었다.
저술과 강론을 통해서 자기 형제들이 신구약 성서를 끊임없이 연구하도록 권고했다. 언제나 성 마태오 복음서와 성 바오로의 서간들을 가지고 다녔으며, 거의 외울 정도로 열심히 읽고 연구하였다.
두세 번이나 주교로 선임되었지만, 그때마다 거절했다. 주교직을 갖기보다 자기 형제들과 함께 가난하게 살아가기를 더 원했다. 일생을 통해서 내내 흠 없이 순수성을 간직했다. 신앙을 위해 매 맞고 몸이 산산이 찢기면서 목숨을 바치기를 열렬히 원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도미니코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전심전력으로 사도적 생활 양식을 따라간 사람을 알았습니다. 그 사람이 천국에서 사도들의 영광을 함께 누리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습니다.”(성무일도 독서기도 제2독서-도미니코회 역사의 여러 자료에서, Libellus de principiis O.P.: Acta canonizationis sancti Dominici: Monumenta O.P. Mist. 16, Romae 1935, pp.30ss.,146-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