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고小考는 “전통을 고수하며(In Defense of A Tradition)”라는 제목으로 도미니코회 폴 더프너 신부Paul A. Duffner, O.P.가 작성한 것으로서 “묵주기도의 빛과 삶(The Rosary Light & Life)”, 통권 49권, 제5호, 1996년 9-10월호에 게재한 글로서 별도로 첨가한 내용이 있다.(*이미지-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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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부분은 수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며 전통적으로 많은 교황님의 저술에서 받아들여진 묵주기도 신심의 시작과 성 도미니코의 연관성에 관하여 잘 알고 있다. 전통적으로 그 계기는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 초반까지 특별히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 그리스도교 왕국을 초토화하던 알비겐시안Albigensian이라는 이단이었다. 성 도미니코는 그 이단에 맞선 설교가 그리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괴로워했고, 절박한 심정으로 하느님의 어머니께 도우심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전승에 따를 때 하느님의 어머님께서는 성 도미니코에게 발현하시어 우리 구원의 신비를 설파하는 데에 당시 끔찍한 이단에 맞서는 도구로서 ‘시편을 함께 사용하도록‘ 하셨다.
*‘시편을 함께 사용하도록’이라는 말에는 교회의 성무일도와 관련된 오랜 교회의 역사가 담겨 있다:
「유다인들은 시편 150편을 하느님의 백성에게 주신 ‘경배의 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편을 활용하여 매일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했으며 모든 기도의 시작이자 기초가 마땅히 시편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님께서도 시편을 잘 알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공생활 동안 매일 제자들과 함께 시편으로 기도하셨다.(참조. 마태 26,30) 매일 일정한 시간을 정해 기도하고자 했던 유다인들의 전통과 예수님의 기도 모습을 생각했던 초대 교회는 시편과 성경의 대목들을 활용하여 시간대별로 바치는 기도집을 만들기 시작했고 이러한 내용은 점차 7세기에 이르러 로마 전례로까지 확정되었다가 변천의 역사를 거쳐 오늘날의 <성무일도(Liturgia Horarum, 직역하면 ‘시간 전례’라는 뜻)>로 자리 잡았으며 오늘날까지 성직자나 수도자들의 의무적인 기도가 되었다. 오늘날에 바치는 성무일도서에서는 109편과 같은 저주 시편을 제외하고 시편 147편이 담겨 있다.
현재의 성무일도는 <독서기도 / 아침기도 / 낮기도 / 저녁 기도 / 끝 기도>로 구성 편집되어 있으나 여기에 원래는 <일시경(오전 7시) / 삼시경(오전 9시) / 육시경(오전 12시) / 구시경(오후 3시)>이라는 소위 ‘시간 전례’라고 할 수 있는 ‘시간경’들이 더해져 있었다. 오늘날에는 일시경은 폐지, 독서기도는 시간 규정이 없이 다른 기도와 이어서 할 수 있으며, 낮기도는 삼·육·구시경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삼시경은 마르 15,25(참조. 사도 2,15)에 따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때”였으며, 육시경은 마르 15,33(참조. 사도 10,9)에 따라 “낮 열두 시가 되자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된 시간이었으고, 구시경은 마르 15,34(참조. 사도 3,1)에 따라 “오후 세 시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신” 때였다는 배경을 담고 있다.(*참조. 성무일도聖務日禱, https://acrolect.tistory.com/m/122)」
일반 대중은 문맹이었고, 그에 따라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이 의무적으로 매일 바치는 성무일도를 바치고 싶어도 바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성무일도서에 편성되어 있는 시편 150편 대신에 문자를 모르는 일반 대중 신자들이 암송할 수 있는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조합하여 기도드리게 되면서, 특별히 150편의 시편 대신에 성모송을 150번 암송하도록 하면서 묵주기도가 생겨났으며, 여기에 도미니코 성인의 일정한 역할이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 도미니코와 묵주기도에 관해 명시적으로 이를 언급하는 역사적인 문헌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이 소고를 통하여 필자는 그러한 역사의 침묵이 주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묵주기도의 발전
먼저 우리는 현재 우리가 바치고 있는 묵주기도의 형태가 있기까지 수백 년에 걸쳐 그 형태가 발전되어 왔다는 사실을 유념하면서 성 도미니코가 살았던 시대를 기억해야만 한다.
1. 오늘날 우리가 바치는 성모송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었다. 당시는 우리가 아는 성모송의 전반부만 사용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태중의 아들 예수…” 할 때의 “예수”라는 말마디는 14세기까지 추가되지 않았었으며 성모송의 후반부는 그 이후에 추가되었다.
2. 주님의 기도와 영광송은 당시에 아직 묵주기도의 일부가 아니었다.
3. 오늘날 우리가 바치는 “영광·고통·환희·빛”의 신비는 당시 아직 확정되지 않았었다. (*잘 아는 바와 같이 ‘빛의 신비’는 2002년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라는 교서를 통해 최근 추가되었다) 묵주기도는 성 도미니코 시대로부터 250년이 흐른 뒤인 15세기에 묵주기도에 관하여 설교하며 묵주기도 신심의 부흥을 이끌었던 복자 알란 드 뤼프Alanus De Rupe O.P(알란 드 라 로슈, Alan De La Roche, 1428~1475년) 신부 때조차도 150개의 성모송과 150개의 신비로 이루어진 마리아 시편이었으며, 이들은 ‘기쁨·슬픔·영광’이라는 세 묶음의 신비들로 나뉘어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바치는 ‘영광·고통·환희’의 신비는 공식적으로 1569년 교황 비오 5세에 의해서 제정되었다.
4. 우리가 오늘날 손에 들고 기도드리는 묵주의 형태에서도 앞부분에 붙어 있는 십자가나 5알의 구슬이 없었다.
5. 묵주를 가리키는 ‘로사리오Rosary’라는 말은 장미 정원이나 장미 묶음을 뜻하는 라틴어 ‘로사리움rosarium’에서 오는데, 도미니코 시대의 묵주기도 신심에는 이런 뜻이나 말이 적용되지 않았었다. 따라서 당시 문헌에 이러한 용어를 이용한 언급이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마리아 시편
그릇에 조약돌을 담거나 줄이나 실 같은 것에 매듭을 짓거나 구슬 등을 꿰어 이를 헤아리며 기도하는 관습은 성 도미니코 시대 훨씬 이전부터 교회의 역사 안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 이는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모슬렘이나 불교와 같은 비그리스도교 종교인 사이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150편에 이르는 성경의 시편은 예로부터 수도원에 사는 성직자나 수도자들이 바치는 공식 전례 기도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그렇지만 많은 일반 대중이 문맹(특별히 라틴어)이었으므로 그들에게 150편의 시편을 대체할 방법을 제공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있었다. 한 예로서 150편의 라틴어 시편 대신 150번의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일도 있었는데, 이때 50번씩 3묶음으로 나누어 이를 헤아리는 구슬 꾸러미나 매듭 등을 사용하는 관습이 생겨났으며 이를 “주님의 기도 꾸러미(Paternoster, 주님의 기도 시작 첫마디인 ‘우리 아버지’에 해당하는 라틴어)”라고 불렀다. 여기에 성모송과 신경이 더해지면서 오늘날의 묵주기도 형태가 되어갔는데, 이때에도 성모송은 전반부만 사용되었다. 점점 세월이 흘러가면서 150번의 성모송과 마리아 시편이라는 병행 시편 등도 등장했다.
알비겐시안Albigensian 이단
성 도미니크 시대에 프랑스 남부를 괴롭힌 알비겐시안 이단은 3세기의 마니교와 유사한 이원론적 세계관, 즉 영의 세계를 창조한 선한 신과 물질세계를 창조한 악한 신이라는 두 존재가 있다는 식의 사고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이런 세계관에 따를 때 영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선하고 인간을 포함한 물질세계는 본질적으로 악하다. 악한 신(사탄)이 물질이라는 몸에 영을 가두었으므로 그 감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자살 등을 포함하여 무엇이든 가능하며 이것이 선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물질이 악하므로 결혼이나 인류의 출산마저도 악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이단은 이민처럼 영혼들이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면서도 삼위일체, 육화(강생)의 신비, 성사들과 같은 가톨릭 신앙을 거부했다. 그 이단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사람이 되어 오셨음을 믿지 못함에 따라 하느님의 어머니인 성모님마저도 믿지 못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 그리고 부활이 오직 환상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십자가와 관련된 모든 개념을 거부했다.
이러한 이단은 13세기 초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 깊이 뿌리를 내렸는데, 이러한 이단의 급속한 성장은 성직자들의 도덕적 해이와 세속화에 영향을 입은 바가 컸다. 이에 더하여 귀족들이 교회의 재산이나 땅을 차지하고자 이단을 부추기거나 조장하기도 했다. 이것이 성 도미니코가 프랑스 남부에서 선교 사목을 시작할 때 직면한 상황이었으며 성모님의 개입을 불러온 상황이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순간마다 하느님의 어머니께서 유럽의 역사에 개입하셨던 것을 생각한다면 서유럽 교회가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었던 바로 그 시기에 몸소 개입하셨을 것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도미니코 성인을 비롯한 도미니코 수도회원들에게는 사람이 되어 오신 말씀을 거부하는 이들에게 마리아 시편을 소개하며, 우리 구원의 신비에 대한 설명과 반복되는 기도를 더하여 설교하는 것이 참으로 효율적인 일이었음이 틀림없다.
오랫동안 교황님의 개인적인 자문 위원으로 활약한 도미니코회 신학자 루이지 챱피Luigi Ciappi 추기경은 추기경으로 서임되기 몇 년 전인 1975년에 “묵주기도를 통한 신앙의 심화(A Deepening of The Faith By Means of The Rosary)”라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는 이 글에서 성 도미니코가 설교하면서 그리스도의 생애, 수난, 죽음, 부활의 신비를 성모송과 번갈아 가며 묵상하는 형태를 선호했으므로 나중에 묵주기도라고 불리는 마리아 시편의 열렬한 발기인인 셈이라고 말한다.
볼란디스트The Bollandists
(*17세기 예수회의 학자들 단체)
17세기 볼란디스트들이 활동하기 전까지는 성 도미니코와 묵주기도에 관한 전통이 많은 교황의 문서에서도 어느 정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볼란디스트들은 벨기에 예수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그룹이었는데, 이들은 전례력에 포함된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생애를 다룬 “성인들의 삶(Acta Sanctorum)”을 출판하였다. 볼란디스트들은 분명 대단한 학식을 가진 이들로서 역사적인 사료에 의해서 엄밀하게 검증된 내용을 보존하는 한편 성인들의 삶에 덧붙여진 전설을 제거하면서 성인들의 삶을 기록해갔는데, 성 도미니코와 묵주기도의 전통에 관해서도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충분한 증거가 없으며, 굳이 근거를 찾을 수 있다면 알란 드 뤼프Alanus De Rupe O.P.의 증언에서만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보면서도 성 도미니코 사후 250년이 지난 시점에 이루어진 그의 증언은 성 도미니코 시대의 어떤 문서로도 입증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렇지만 말이 없는 역사의 공백에 관련된 논쟁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내용은 후임 교황들의 생각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묵주기도의 시작과 관련하여 교황님들은 17세기 이후에도 계속하여 성 도미니코를 언급하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민병대
프랜시스 윌리엄Francis Willam 신부는 “묵주기도, 그 역사와 의미(The Rosary, Its History and Meaning)”라는 그의 저서 26쪽에서 성 도미니코가 설립한 ‘예수 그리스도의 민병대’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그들이 매일 성모 시편을 암송했다고 기록한다. 그는 또한 성 도미니코 사후 38년 뒤인 1259년 피아첸자Piacenza에서 도미니코 회원들이 설립한 ‘기도의 형제회(Confraternity of Prayer)’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그들 역시 150번의 성모송을 매일 암송하여 바쳤다고 기록한다. 도미니코회의 베네딕트 애쉴리Benedict Ashly 신부는 이 민병대가 1271년에 돌아가신 도미니코회 소속 주교인 브레간자Breganza라는 분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말한다.
어찌 되었든 도미니코 성인과 그의 사후 곧바로 이어지는 시대에 마리아 시편이 활발하게 사용된 것만큼은 사실인 셈이다. 여기에는 입으로 암송하는 묵주기도의 몸체를 이루는 150번의 성모송이 있었으며, 묵주기도의 영혼이라고 할 수 있는 구원의 신비에 관한 묵상이 함께하고 있었다. 앞서 챱피 신부가 말했듯이 도미니코 성인의 일반적인 설교 방법은 그리스도의 생애를 설교하면서 마리아 시편을 함께 묵상하며 전개하는 형식이었다.
따라서 묵주기도의 핵심(입으로 외우는 기도문과 정신적 묵상 기도의 결합)은 오늘날 우리가 바치는 묵주기도의 형식이기 이전에 성 도미니코가 당시 행했던 방식이 오늘날 우리 묵주기도의 형태로 발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기 작가들에 의해서 우리는 도미니코 성인이 하느님의 어머니에 대한 큰 신심을 지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전통에 따를 때 도미니코 성인께서 당시의 성모송과 구원의 신비에 관한 묵상의 결합이라는 영감을 성모님으로부터 얻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충분히 해 볼 수 있다. 교황 비오 12세께서는 회칙 「하느님의 중개자(Mediator Dei)」에서 묵주기도의 기원과 그 구성의 지혜가 “인간적이라기보다는 신적인 것”이라며 이를 암시하는 듯이 말씀하신다.
알란 드 뤼프Alanus De Rupe
역사적인 문헌들은 알란 드 라 로슈Alan De La Roche(1428~1475년)라고도 알려지는 분이 묵주기도의 위대한 사도였다는 사실을 잘 기록하고 있다. 그가 “전통과 작가들의 증언에 따를 때”라면서 성 도미니코와 묵주기도와의 연관성을 증언하고 있는 것은 분명 어떤 근거가 있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가 터무니없는 낭설을 그렇게 지어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는 몽상가가 아니었다. 그는 신학의 대가였고, 피터 롬바르드의 문장에 관한 해설을 썼으며, 파리에서 강의를 하였을 뿐 아니라 유럽 중부 수도원들을 살펴보기 위한 법적인 방문권자였던 분이었고, 묵주기도를 위한 호교론을 저술하였으며, 여러 곳에서 설교하셨던 분이었다. 그는 또한 1470년에 두아이Douai에서 ‘묵주기도 형제회Rosary Confraternity’를 설립하였으며 로사리오의 대중화를 위해 지대한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던 분이었다.
알란 드 뤼프가 접촉했던 문헌들이나 자료들이 훗날 소실되었을 수도 있다. 원래 존재했을 수도 있는 성 도미니코와 묵주기도에 관한 문헌들이 수 세기를 두고 유럽을 황폐화하였던 종교 박해 전쟁이 수많은 수도원이나 수녀원의 문서고나 도서관을 파괴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이다.
이와 같은 논리를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존 S. 존슨John S. Johnson은 “행동하는 묵주기도(The Rosary In Action)”라는 그의 저서 제3장 26쪽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지적한다:
“비평가들은 주로 침묵의 논증에 의존하여 복되신 동정녀께서 도미니코 성인에게 묵주를 주셨다는 옛 전통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들은 존재했을 수도 있는 알란 드 뤼프가 언급한 수많은 문서가 수녀원이나 수도원, 도서관들을 불태운 위그노Hugenots의 재앙에서 살아남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알았어야만 했다. 비평가들은 알란이 묵주기도 신심을 발명했다고까지 말했으며……그가 유명한 이름을 이용하느라 성 도미니코에게 이를 귀속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알란이 묵주기도의 역사적 기원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거론한 두 분은 종교 전쟁 중에 불에 탄 간드Gand 수도원의 도서관에 마리알레스Mariales를 보존하던 분들이었다. 알란 드 뤼페 시대 이전의 문서가 후대에 발견된 사례도 있다. ‘로사리우스Rosarius’라는 긴 시詩는 알란보다 100년이나 앞선 것이면서도 성 도미니코와 뮈레Muret 전투를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알란은 문서를 조작했다는 모든 의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 도미니코 성인의 시대에 이 모든 요소가 이미 일목요연하게 갖추어져 있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는가?”
이와 같은 의문에 관하여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볼 수도 있다. 묵주기도의 요소들이 도미니코 성인의 설교에서 종합된 것일까? 꼭 그랬다고 확실하게 증명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문헌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해서 꼭 그렇지 않았으리라는 것도 증명할 수는 없다.
마시 워드Masie Ward는 이러한 ‘침묵에 관한 논쟁’을 두고 ‘묵주기도의 광채(The Splendor of The Rosary)’라는 그의 저서 34쪽에서 “중세에 일어난 일에 대한 논의는 특별히 흑사병의 폐해로 인해 많은 문서가 사라졌다는 사실 때문에 쉽게 가려질 수 있다.”라면서 소위 ‘침묵’의 논거를 약화시킨다.
구이 베두엘Guy Bedouelle이라는 도미니코회 신부의 ‘성 도미니코, 은총과 말씀(St. Dominic, The Grace and The Word)’이라는 저서 254쪽에서는 성 도미니코의 동시대 인물에 관하여 중요한 언급을 담고 있다: “성 도미니코의 동료였으며 리옹의 수도원장이었고 나중에 프로방스 지역의 관구장이었던 복되신 리비아의 로메Romee of Livia께서는 자신의 아베스Aves를 세는 작은 매듭 끈을 손에 꼭 쥔 채 선종하셨다고 중세 연대기 작가 베르나르 구이Bernard Gui가 전한다. 역사가들은 이를 현대 묵주의 원초적 형태를 묘사하는 가장 오래된 텍스트 중 하나로 간주한다.”
역시 도미니코회 사제인 루도비코 판파니Ludovicus Fanfani는 그의 저서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묵주에 관하여(De Rosari B. M. Virginis)’라는 저서 27쪽에서 도미니코 성인이 돌아가신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성인이 그토록 장려했던 묵주기도의 신심이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하는데, 그러한 쇠퇴의 원인으로서 유럽을 휩쓸면서 당시 유럽 인구의 상당수를 몰살한 흑사병이라는 재앙과 유럽을 여러 파벌로 나눈 서방의 분열을 꼽는다. 그런데도 묵주기도에 관한 신심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며, 문헌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그 흔적이 사람들 사이에 남아있어 13세기와 14세기에 영국에서 그 신심이 유지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교황님들의 증언
교황 베네딕토 14세(1740~1458년 재위)는 저명한 학자이자 역사 연구와 조사에 앞장섰던 분이었다. 그분께서 거룩한 전례성 관료로 재직하던 시절 성 도미니코와 묵주기도의 전통에 관하여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볼란디스트가 활동한 때로부터 이미 한 세기가 지난 뒤였던 당시 그분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여러분은 지금 도미니코 성인이 묵주기도의 창시자인지를 물으면서 그 문제에 관하여 당황하면서 의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레오 10세(1521년), 비오 5세(1572년), 그레고리오 13세(1585년), 식스토 5세(1590년), 클레멘트 8세(1605년), 알렉산더 7세(1667년), 복자 인노센트 11세(1689년), 클레맨트 11세(1721년), 인노센트 13세(1724년)와 그 밖의 많은 교황님께서 묵주기도의 제정에 관하여 한결같이 도미니코 수도회의 창설자이신 도미니코 성인에게 그 공덕을 돌리는 것에 관하여 여러분이 어떠한 가치를 부여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도미니코 성인께서는 의심할 여지 없이 성령의 감도를 받아 진정으로 천상의 도구인 묵주기도의 설계자요 저자이며 발기인이자 가장 탁월한 설교자가 되셨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인용하면서 안토니 푸어스트Anthony N. Fuerst 신부는 ‘묵주기도(This Rosary)’라는 그의 저서 20쪽에서 “강력한 논거 없이 이 전통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은 매우 성급한 일이다.”라고 말한다.
위에 열거한 묵주기도와 성 도미니코에 관한 전통을 받아들인 교황님들의 명단에는 훨씬 더 많은 교황님이 추가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전통적인 사고를 뒷받침하는 주요 논거가 될 수는 없다. 교회의 역사 안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과 관련한 수많은 퍼즐의 조각을 맞춰본 하나의 시도일 뿐이다. 예를 들어;
1. 성 도미니코, 혹은 당시 도미니코 수도회원들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민병대원들이 매일같이 150번의 성모송을 바쳤다는 사실을 고려하면서……
2. 성 도미니코의 성모님에 대한 신심과 당시 횡행하던 이단들에 맞서 열렬히 기도했다는 사실, 그리고 도미니코 성인이 당시의 이단들에 맞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에 관하여 하느님의 어머니로부터 어떤 모종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알란 드 뤼페의 증언을 고려하면서……(파티마의 성모님께서 공산주의에 맞서고 평화를 얻기 위한 구제책을 마련하여 주셨으며 그 구제책에 묵주기도가 포함되어 있었다면) 교회의 전통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와 같이 13세기 알비겐시아니즘이라는 못된 이단과 싸우는 방법으로서 묵주기도를 제시하셨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서……
3. 도미니코 성인의 전기 작가 중 일부가 도미니코 성인의 일반적인 설교 방식이 우리 신앙의 신비에 관한 그의 가르침을 자주 기도와 번갈아 가며 가르치는 것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서……
4. 도미니코 성인의 시대에 묵주기도의 신심 시작이 현재의 우리 신심 구조와는 무척 다르다는 사실, 곧 당시에는 우리가 오늘날 묵주기도에서 기념하는 신비의 순서가 정해져 있지 않았으며 묵주기도라는 이름 자체가 아직 확립되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서……
5. 13세기 이후 종교 박해로 수많은 수도원이나 도서관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서……
충분히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는 이와 같은 내용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도미니코 성인이 묵주기도의 창시자요 기원이라고 언급하는 직접적인 문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부정적인 논쟁이 묵주기도의 핵심을 능가하는 것만 같다. 알런 드 뤼페가 증언하였듯이 하느님의 어머니께서 도미니코 성인을 활용하시어 묵주기도 신심을 불러일으키셨다고 하는 것에는 다분히 수긍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도 종교 예술에서 도미니코 성인이 성모님으로부터 묵주를 받았다고 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에는 상당한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과연 예술가들이 이런 식으로 묘사하는 것 말고 다른 식으로 어떻게 묘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말이다.
물론 도미니코 성인께서는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묵주기도 신심을 소개했을 수도 있다. 이미 존재하는 성모님 시편을 사용하여 자신의 설교를 풍성하게 하는 수단으로 이를 활용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랬다면 당시의 역사가들이 별로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이 마리아 시편을 굳이 언급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성모송과 함께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는 것이 묵주기도 신심의 본질인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번역글-원문 참조 https://rosarycenter.org/the-rosary-and-st.-dominic)
이 좋은 글을 먼저 읽었다면, 오늘 아침 제 강론이 달랐을 터인데 말이죠.^^
오늘날 우리가 바치는 ‘영광·고통·환희’의 신비는 공식적으로 1569년 교황 비오 5세에 의해서 제정되었다
많은 교황님께서 묵주기도의 제정에 관하여 한결같이 도미니코 수도회의 창설자이신 도미니코 성인에게 그 공덕을 돌리는 것에 관하여 여러분이 어떠한 가치를 부여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도미니코 성인께서는 의심할 여지 없이 성령의 감도를 받아 진정으로 천상의 도구인 묵주기도의 설계자요 저자이며 발기인이자 가장 탁월한 설교자가 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