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마태 17,2)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축일은 우리를 ‘빛의 사건’ 앞에 놓이게 한다. 세 제자 앞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시고, 그분 안에 거하는 신성神性이 온전하게 드러난다. 이로써 제자들의 시선도 변모되어,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의 아들을 새로운 빛 속에서 바라보게 된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타볼 산에서 경험한 이 새로운 시선은 우리 각자가 주님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 시선은 우리에게 일상생활에서 예루살렘으로 나아가는 순례길에서 만나는 현실을 다른 시각으로 식별하도록 한다. 모세와 엘리야를 통해 나타난 율법과 예언자들을 만나고, 타볼에서 울려 퍼진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사랑하는 아들을 듣는다.
우리도 “하느님의 경고하는 목소리가 매일 우리에게 되풀이하는 것을 떨리는 마음으로 듣고”, “그 신성한 빛에 눈을 뜨기”로 결심한다면(참조. 베네딕토 성규, 서문 9),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는 말씀대로 우리도 그 피조물의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피조물은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희망한다.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참조. 로마서 8,19-22) 창조물이 변모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피조물의 진통이며 아픔이요 상처이다.
오늘날 이 상처에는 두 가지 명확한 이름이 있다. 전쟁과 기후 변화이다. 이 두 현실은 인간, 동물, 물, 땅, 하늘을 함께 묶어놓은 비극적인 현실이다. 이 두 현실이 서로 얽히면서 각각의 파괴력을 더욱 치명적으로 만든다. 이 두 현실은 우리 인간의 행동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발생한다. 우리는 창조주로부터 우리 형제자매와 우리와 하나인 피조물을 돌보라는 임무를 받았음에도 우리는 그를 파괴한다.
전쟁은 인류를 왜곡하고, 그 얼굴을 훼손한다. 죽음, 부상, 장애, 난민, 흩어진 가족들, 땅, 집, 일자리라는 인생 의식주에 관한 필수 조건의 상실이다. 전쟁은 관계를 파괴하고, 타인에 대한 신뢰를 파괴하며, 미래에 대한 공동의 시선을 파괴한다. 적대적인 민족이 다시 대화하고, 서로 가까이 살며, 공동선을 함께 염려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대가 필요할까? 비슷한 이웃을 잠재적인 살인자로만 보아야만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자기 민족과 맺었던 생명력이 끊긴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오랜 시간 동안 단지 생존을 위해 고통 속에서 살아온 사람에게 어떤 미래가 열릴 수 있을까?
전쟁은 또한 땅을 훼손한다. 자연 자원과 인간이 가꾸어온 공동의 집을 폭력적으로 다룬다. 전쟁은 지뢰를 심고, 물을 오염시키며, 숲을 불태우고, 농작물을 파괴하며, 가축과 야생 동물을 멸망시킨다. 전쟁은 길을 끊고, 다리를 파괴하며, 가정을 부수고, 학교와 병원을 무너뜨리며, 광장, 종탑, 첨탑, 시장, 제빵소, 우물을 없애버린다. 어떻게 땅의 열매와 인간 노동의 결과를 다시 즐길 수 있을까? 어떻게 공동의 공간을 재건할 수 있을까? 어떻게 희귀하거나 접근할 수 없는 자원을 다시 나눌 수 있을까?
기후 변화는 우리 행성의 얼굴, 땅, 하늘, 바다, 동물들을 뒤틀리게 한다. 가뭄과 홍수, 지하수가 마르고, 바다의 온도가 상승하며 뜨거워지고, 빙하가 녹고, 광풍이 미친 듯이 휘몰아친다. 한때 비옥하고 살기 좋았던 땅이 단일 재배의 공장이나 가축 사육 창고로 변한다. 성 프란치스코의 노래처럼 땅을 어머니로, 해와 바람과 불을 형제로, 달과 구름과 물, 심지어 죽음까지도 자매로 부르는 소리를 어떻게 다시 들을 수 있을까? 모든 종種의 동물을 구하고 생명을 보장하는 노아의 사명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
기후 변화는 우리의 폭력을 더는 견디지 않고 자신의 법칙에 따라 반응하면서 인류의 얼굴도 왜곡한다. 기근과 전염병, 더위와 기상 이변은 매일 죽음을 증가시키고, 이는 전쟁과 불의의 희생자들과 결합한다. 정치적 난민들은 기후 난민들과 뒤섞이고, 고향에 남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극심한 투쟁을 벌여야 한다.
이런 어두운 세상의 모습은 종말론적일 수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본질에서 계시적이다. 이는 우리의 인간 중심적인 오만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를 드러내고, 우리가 전쟁을 거부하지 않고 평화를 구축하지 않으며 창조물을 존중하지 않고 남용하는 것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 보여준다. 이는 우리가 인류의 형제자매들, 인간의 연대, 그리고 우리의 자유를 어떻게 다뤘는지 드러낸다.
하지만 변모 사건은 상황이 아무리 복잡하고 해결책이 우리 능력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의 시선이 변화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의 눈을 그분이 보시는 대로 볼 수 있게 하여 자비롭고 선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이렇게 우리는 모든 인간이 창조된 선을 보고,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보고, 예리코 길에서 사마리아인처럼 자비를 베풀고 이웃을 도울 수 있다. 이는 “가장 가까운” 사람, 즉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람을 의미한다. 우리가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변화된 시선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다른 사람들, 관계, 우리의 행동, 공동선, 거짓과 증오로 오염된 언어까지도 돌보도록 우리를 이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가 거주하는 세상을 변모시키고, 시대의 징조를 읽으며, 현대적인 관점에서 전쟁을 통해 정의를 회복하는 것이 이성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는 4세기 이집트 사막의 성 안토니오가 예언한 시대와 비슷하다: “사람들이 미쳐가면서, 미치지 않은 사람을 보고 ‘너는 미쳤다’ 하며 달려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그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번역글-이탈리아어 원문출처 https://www.monasterodibose.it/comunita/lettera-agli-amici/16106-uno-sguardo-rinnova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