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추덕·향주덕·성령의 선물과 열매
*이 글은 덕德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하여 한국 천주교 중앙 협의회가 발행한 <가톨릭교회 교리서> 개정 제2판 16쇄, 2020년 7월, 1803-1845항을 발췌하여 수록한 내용임
1803. “형제 여러분,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의로운 것과 정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은 무엇이든지, 또 덕이 되는 것과 칭송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마음에 간직하십시오”(필리 4,8).
덕(德)은 선을 행하고자 하는 몸에 밴 확고한 마음가짐이다. 덕은 인간이 선한 일을 하게 할 뿐 아니라 최선을 다하도록 한다. 덕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감각적, 영적인 모든 능력을 다해서 선을 향해 나아간다. 그는 구체적인 행동들 안에서 선을 추구하고 이를 선택한다.
I. 인간적인 덕
1804. 인간적인 덕은 지성과 의지의 확고한 태도, 안정된 마음가짐, 몸에 밴 장점 등으로서, 우리의 행동을 규제하고 우리의 감정을 바로잡고 이성과 신앙에 따라 우리의 행위를 이끈다. 덕은 도덕적으로 선한 삶을 용이하게 하며 자제와 기쁨을 준다. 덕성스러운 사람이란 자유로이 선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윤리적 덕은 인간의 노력으로 획득되는 것이다. 이는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들의 씨앗이며 열매이다. 덕은 인간의 모든 능력을 하느님의 사랑과 일치하도록 준비시킨다.
덕행 생활의 목적은 하느님을 닮는 것입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참행복 강론」, 1: Gregorii Nysseni opera, W. Jaeger 편, 7/2권(라이덴, 1992), 82면(PG 44, 1200).]
사추덕四樞德의 구별
1805. 네 가지 덕이 ‘중추적’ 구실을 한다. 그러므로 이 네 가지 덕을 ‘사추덕’이라고 부른다. 다른 모든 덕은 이 네 가지 덕을 중심으로 묶을 수 있다. 사추덕은 현명, 정의, 용기, 절제이다. “누가 의로움을 사랑하는가? 지혜의 노고에 덕이 따른다. 정녕 지혜는 절제와 예지를, 정의와 용기를 가르쳐 준다”(지혜 8,7). 이 덕들은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다른 이름으로 찬양된다.
1806. 현명은 모든 상황에서 우리의 참된 선을 식별하고 그것을 실행할 올바른 방법을 선택할 수 있도록 실천 이성을 준비시키는 덕이다. “영리한 이는 제 발걸음을 살핀다”(잠언 14,15).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기도하십시오”(1베드 4,7). 토마스 데 아퀴노 성인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현명은 “올바른 행동 규범”[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 대전」, 2-2, q. 47, a. 2, sed. contra: Ed. Leon. 8, 349.]이라고 말한다. 현명은 주저나 공포, 은폐나 위선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현명은 ‘덕의 마부(馬夫)’(auriga virtutum)라고 불린다. 곧 현명은 다른 덕들에게 규율과 척도를 일러 줌으로써 그것들을 이끈다. 양심의 판단을 직접 인도하는 것은 현명이다. 현명한 사람은 이 판단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고 규제한다. 이 덕으로 우리는 구체적인 경우에 윤리적 원칙을 오류 없이 적용하며 이루어야 할 선과 피해야 할 악에 대한 의심을 극복한다.
1807. 정의는 윤리적인 덕으로서, 마땅히 하느님께 드릴 것을 드리고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려는 지속적이고 확고한 의지이다. 하느님을 향한 정의를 ‘경신덕’(敬神德, virtus religionis)이라고 부른다. 사람을 대상으로 할 때는 각자의 권리를 존중하도록 하고, 사람들에 대한 공평과 공동선을 촉진시키는 조화를 인간관계 안에 확립하도록 하는 것이 정의이다. 성경에 자주 나오는 “의로운” 사람은 사고의 올바름이 몸에 배고 이웃에게 올바르게 행동하는 사람이다. “너희는 가난한 이라고 두둔해서도 안 되고, 세력 있는 이라고 우대해서도 안 된다. 너희 동족을 정의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레위 19,15). “주인 여러분, 종들을 정당하고 공정하게 다루십시오. 여러분에게도 하늘에 주인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콜로 4,1).
1808. 용기는 어려움 중에도 단호하고 꾸준하게 선을 추구하도록 하는 윤리적 덕이다. 용기는 도덕적 삶에서 유혹을 이기고 장애를 극복하고자 하는 결심을 확고하게 해 준다. 용기는 공포를, 심지어 죽음의 공포까지도 이겨 내게 하며, 시련과 박해에 맞서게 해 준다. 용기는 정당한 일을 옹호하기 위해 자신을 버리고 목숨까지 바칠 수 있게 한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 나에게 구원이 되어 주셨네”(시편 118[117],14).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1809. 절제는 쾌락의 유혹을 조절하고 창조된 재화를 사용하는 데에 균형을 유지하게 해 주는 윤리적 덕이다. 절제는 본능에 대한 의지의 억제력을 보장하고, 욕망을 단정함 안에 묶어 둔다. 절도 있는 사람은 그의 감각적 욕망이 선을 향하게 하고, 건전한 조심성을 지킨다. 자신의 정력만 믿고서 탐욕에 빠지는 일이 없게 한다.[집회 5,2; 37,27-31 참조.] 구약 성경은 절제를 자주 칭송한다. “네 욕망을 따르지 말고 욕심을 절제하여라”(집회 18,30). 신약 성경은 절제를 ‘중용’ 또는 ‘신중’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티토 2,12) 살아야 한다.
잘 산다고 하는 것은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손상하지 않고 온전히 보존해야 합니다. 이것이 절제입니다. 이 사랑은 어떤 불행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용기입니다. 이 사랑은 하느님만을 섬깁니다. 이것이 정의입니다. 계략과 거짓에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모든 사물을 식별하기 위해 깨어 있습니다. 이것이 현명입니다.[성 아우구스티노, 「가톨릭 교회의 습속」, 1, 25, 46: CSEL 90, 51(PL 32, 1330-1331).]
덕과 은총
1810. 교육과 사려 깊은 행동과 노력하며 늘 다시 시작하는 끈기로 얻게 되는 인간적인 덕은 하느님의 은총으로써 정화되고 고양된다. 하느님의 도움으로 이 덕들은 인간의 성품을 단련하고, 선을 쉽게 실천하도록 한다. 덕성스러운 사람은 덕을 실천함으로써 행복하다.
1811. 죄 때문에 상처를 입은 인간으로서는 도덕적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 쉽지 않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선물은 우리가 꾸준하게 덕을 추구하도록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준다. 각자는 늘 이 빛과 힘의 은총을 청해야 하며, 성사의 도움을 받고, 성령과 협력하며, 선을 사랑하고 악을 경계하라는 성령의 호소를 따라야 한다.
II. 향주덕向主德
1812. 인간적인 덕들은 인간의 능력을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기에 적절하게 해 주는[2베드 1,4 참조.] 향주덕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왜냐하면 향주덕은 하느님과 직접 관계되기 때문이다. 향주덕은,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하신 삼위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려는 마음을 가지게 한다. 향주덕의 근원과 동기와 대상은 한 분이시고 세 위이신 하느님이시다.
1813. 향주덕은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행위의 기초가 되며 그 행위에 활력을 불어넣고 특징을 부여한다. 곧 모든 윤리덕들을 알게 하고 생기를 불어넣는다. 향주덕은 신자들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행동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릴 자격을 얻을 수 있게 하려고 하느님께서 그들의 영혼에 불어넣어 주시는 것이다. 향주덕은 인간의 능력 안에 성령의 현존과 활동을 보증한다. 향주덕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다.[1코린 13,13 참조.]
믿음
1814. 믿음은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시하신 것과, 거룩한 교회가 우리에게 믿도록 제시하는 모든 것을 믿게 하는 향주덕이다. 하느님께서는 진리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인간은 “자기를 온전히 하느님께 자유로이 맡기는 것이다.”[계시 헌장, 5항.] 그러므로 신자는 하느님 뜻을 알고 실천하고자 애쓴다.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로마 1,17). 살아 있는 믿음은 “사랑으로 행동한다”(갈라 5,6).
1815. 믿음이라는 선물은 믿음을 거슬러 죄를 짓지 않는 사람 안에 머문다.[트리엔트 공의회, 제6회기, 의화에 대한 교령, 제15장: DS 1544 참조.] 그러나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야고 2,26). 희망과 사랑이 없는 믿음은 신자를 그리스도께 완전하게 결합시켜 주지 못하며, 그리스도의 몸의 살아 있는 지체가 되게 하지 못한다.
1816. 그리스도의 제자는 믿음을 간직하고 믿음으로 살아야 할 뿐 아니라, 이를 담대하게 고백하고 확신으로 증언하고 전파해야 한다. “모든 제자는 그 준비를 갖추어,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교회가 늘 겪고 있는 박해 가운데에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는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한다.”[교회 헌장, 42항. 종교 자유 선언, 14항 참조.] 믿음에 대한 봉사와 증언은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32-33).
희망
1817. 희망은 그리스도의 약속을 신뢰하며, 우리 자신의 힘을 믿지 않고 성령의 은총의 도움으로, 우리의 행복인 하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게 하는 향주덕이다. “우리가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간직합시다. 약속을 주신 분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히브 10,23). “이 성령을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은총으로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따라 상속자가 되었습니다”(티토 3,6-7).
1818. 희망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넣어 주신 행복을 바라는 덕이다. 희망은 사람들의 활동을 고취시키는 갈망을 받아들이며, 그 활동들을 정화하여 하늘 나라를 향하게 한다. 사람들을 실망하지 않게 보호하고, 버림받을 때 언제나 힘을 북돋아 주고, 영원한 행복에 대한 기대로 마음을 열어 준다. 희망의 약동은 사람을 이기주의에서 보호하여 사랑의 행복으로 이끈다.
1819.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선택된 민족의 희망을 되살리고 완성한다. 이 선택된 민족의 희망은 이사악으로 이루어진 아브라함의 희망과 희생의 시련으로 정화된 하느님의 약속에서 그 기원과 본보기를 찾을 수 있다.[창세 17,4-8; 22,1-18 참조.]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로마 4,18).
1820.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예수님의 전도 초기부터 행복 선언 안에 제시되었다. 참행복은 우리의 희망을 새 ‘약속의 땅’으로 들어 올리듯이 하늘로 들어 올린다. 참행복은 예수님의 제자들 앞에 기다리고 있는 시련을 통과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준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를 통해서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 희망”(로마 5,5) 안에 지켜 주신다. 희망은 “우리에게 영혼의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하며 …… 예수님께서는 …… 우리를 위하여 선구자로 그곳에 들어가셨다”(히브 6,19-20). 희망은 구원을 위한 싸움에서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무기이기도 하다.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희망을 투구로 씁시다”(1테살 5,8). 희망은 시련 중에서도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 12,12). 희망은 기도 안에서 표현되며 지탱되는데, 특히 우리가 희망하여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이 요약된 ‘주님의 기도’가 그러하다.
1821.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고[로마 8,28-30 참조.] 당신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에게[마태 7,21 참조.] 약속하신 하늘의 영광을 희망할 수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각자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끝까지 견디어 낼 수 있기를[마태 10,22; 트리엔트 공의회, 제6회기, 의화에 대한 교령, 제13장: DS 1541 참조.] 바라야 하고,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자신이 행한 선행에 대해 하느님께서 영원한 상급으로 주시는 하늘의 기쁨을 얻게 되리라고 희망해야 한다. 교회는 희망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1티모 2,4) 기도한다. 교회는 천상 영광 속에서 자신의 정배이신 그리스도와 하나 되기를 갈망한다.
희망하라, 희망하라. 너는 그날과 그 시간을 알지 못한다. 조심스럽게 깨어 있어라. 비록 너의 초조함이 확실한 것을 의심스럽게 만들고, 아주 짧은 시간을 길게 여기게 하더라도 모든 것은 빠르게 지나간다. 네가 많이 싸우면 싸울수록 네 하느님에 대한 너의 사랑은 더욱 드러나며, 장차 결코 끝나지 않는 행복과 기쁨 중에 네 사랑하는 분과 더욱 즐거우리라는 사실을 생각하여라.[예수의 성녀 데레사, 「하느님을 향한 영혼의 외침」, 15, 3: Biblioteca Mística Carmelitana, 4권(부르고스, 1917), 290면.]
사랑
1822. 사랑은 하느님만을 위하여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웃을 자신같이 사랑하게 하는 향주덕이다.
1823.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새로운 계명으로 삼으신다.[요한 13,34 참조.]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을 “끝까지”(요한 13,1) 사랑하심으로써 당신께서 받으시는 성부의 사랑을 드러내신다. 제자들은 서로 사랑하여 그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는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요한 15,9) 하고 말씀하시며, 또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하고 말씀하신다.
1824. 성령의 열매이며 율법의 완성인 사랑은 하느님과 그 아들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게 한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9-10).[마태 22,40; 로마 13,8-10 참조.]
1825.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원수”(로마 5,10)였던 때에도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돌아가셨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처럼 우리의 원수들까지도[마태 5,44 참조.] 사랑하며, 가장 먼 사람들을 이웃으로 삼고,[루카 10,27-37 참조.] 어린이들과[마르 9,37 참조.]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당신 자신처럼[마태 25,40.45 참조.] 사랑하라고 당부하신다.
바오로 사도는 사랑을 비길 데 없이 훌륭하게 묘사한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 13,4-7).
1826.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사랑이 없으면 ……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의 특은과 봉사와 덕행까지도 모두 ……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1-3 참조.] 사랑은 모든 덕에 앞선다. 사랑은 향주덕 가운데 으뜸이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1코린 13,13).
1827. 모든 덕의 실행은 사랑에서 활력을 얻고 사랑으로 고취된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콜로 3,14)이고, 모든 덕의 바탕이며, 덕들을 연결하고 질서를 지어 준다. 애덕은 그리스도인들이 닦아야 할 덕의 근원이며 귀결이다. 애덕은 우리의 인간적 사랑의 능력을 확고하게 하고 정화한다. 애덕은 인간적 사랑의 능력을 하느님 사랑의 초자연적 완전함으로 들어 올린다.
1828. 사랑으로 고취된 윤리적 삶의 실천은 그리스도인에게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적 자유를 준다. 이제 인간은 하느님 앞에 노예 같은 공포를 지닌 종도 아니고, 품삯을 바라고 일하는 품꾼도 아니며,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분”(1요한 4,19)의 사랑에 응답하는 자녀로 살아간다.
우리가 벌이 무서워 악에서 멀어진다면 우리는 종의 마음을 지닌 것입니다. 또 보상의 미끼를 좇아간다면 우리는 돈에 팔린 사람과 같습니다. 마침내 선 자체에 대한 사랑과, 우리가 따르는 명령을 내리시는 분에 대한 사랑으로 그렇게 한다면 …… 우리는 자녀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성 대 바실리오, 「규범 상해」, 서문 3: PG 31, 896.]
1829. 사랑의 열매는 기쁨과 평화와 자비이며, 사랑은 친절과 우정 어린 충고를 요구한다. 사랑은 호의이며, 사랑은 상호 유대를 촉진하고 욕심이 없고 너그럽다. 사랑은 우정이며 친교이다.
우리 모든 행동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그것이 목적입니다. 우리는 그것 때문에 달리고, 그것을 향해 달립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으면 그 안에서 쉬게 될 것입니다.[성 아우구스티노, 「바르티아 사람들에게 보낸 요한 서간 강해」, 10, 4: PL 35, 2056-2057.]
III. 성령의 선물과 열매
1830.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적 삶은 성령의 선물로 지탱된다. 이 선물은 성령의 이끄심에 기꺼이 따르는 항구한 마음가짐이다.
1831. 이러한 성령의 일곱 가지 선물은 지혜, 통찰, 의견, 용기, 지식, 공경과 하느님에 대한 경외이다. 다윗의 후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성령의 선물들을 완전히 갖추셨다.[이사 11,1-2 참조.] 성령의 선물은 그것을 받는 사람들의 덕을 보충하고 완전하게 한다. 이 선물들은 열심인 신자들을 하느님의 감도에 기꺼이 순종하게 한다.
당신의 선하신 영이 저를 바른길로 인도하게 하소서(시편 143[142],10).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로마 8,14.17).
1832. 성령의 열매는 성령께서 영원한 영광의 첫 열매로서 우리 안에 이루어 놓으신 완덕이다. 성경은 이 열매들을 다음과 같이 아홉 개로 꼽는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행, 성실, 온유, 절제”(갈라 5,22-23).
간추림
1833. 덕은 선을 행하려는 몸에 밴 확고한 마음가짐이다.
1834. 인간적인 덕들은 우리의 행위를 규제하고, 우리의 감정에 질서를 부여하며, 우리의 행실을 이성과 신앙에 따라 인도하는 지성과 의지의 흔들리지 않는 마음가짐이다. 인간적인 덕은 현명, 정의, 용기, 절제의 사추덕을 중심으로 정리할 수 있다.
1835. 현명은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의 참다운 선을 식별하고 그것을 행할 올바른 방법을 선택하도록 실천적 이성을 준비시킨다.
1836. 정의는 하느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을 드리고 이웃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주려는 꾸준하고 굳은 의지이다.
1837. 용기는 어려움에서도 단호하고 꾸준하게 선을 추구하도록 보장해 준다.
1838. 절제는 감각적 쾌락의 유혹을 조절하고 재화를 사용하는 데에 균형을 잡게 해 준다.
1839. 윤리덕은 교육과 사려 깊은 행위와 꾸준한 노력으로 성장한다. 하느님 은총은 윤리적 덕들을 정화하고 고양한다.
1840. 향주덕은 그리스도인들을 거룩하신 삼위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게 해 준다. 향주덕의 근원과 동기와 대상은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느님을 알고 희망하며, 그분 자신을 위해 그분을 사랑한다.
1841. 향주덕은 세 가지인데 믿음, 희망, 사랑이다.[1코린 13,13 참조.] 향주덕은 모든 윤리덕에 의미와 생명을 준다.
1842. 우리는 신앙으로써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과 거룩한 교회가 우리에게 믿으라고 제시하는 모든 것을 믿는다.
1843. 우리는 희망으로써 영원한 생명과 그것을 누릴 자격을 얻기 위한 은총들을 확고한 신뢰로 하느님께 바라고 기대한다.
1844. 우리는 사랑으로써 하느님을 모든 것 위에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한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콜로 3,14)이며 모든 덕의 바탕이다.
1845.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성령의 일곱 가지 선물은 지혜, 통찰, 의견, 용기, 지식, 공경과 하느님에 대한 경외이다.(20220622 *이미지-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