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 1,1-8(대림 제2주일 ‘나’해)

Battesimo della gente, one of Andrea del Sarto’s gray and brown grisaille frescoes in the Chiostro dello Scalzo, Florence (1511~26)*Wikipedia

1.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전례력에 따라 읽는 오늘 마르코복음의 첫 대목에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이라는 마르코복음의 제목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렇게 제목을 붙인 다음에 마르코 복음사가는 그 제목에 걸맞은 내용의 시작을 위해 곧바로 이사야 예언서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세례자 요한의 선구자적 사명을 언급한다. 복음의 제목에 등장하는 “시작”이라는 말은 즉시 구약 성경의 첫 장 첫 줄, 첫마디 말인 “한처음에”(창세 1,1)라는 말을 연상하게 한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제 새로운 역사, 새로운 창조가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이루어지게 된다는 기쁨에 찬 “복음의 시작”을 그렇게 알려준다.

구약 성경이 갈망하고 품었던 메시아의 구원 계획이 드디어 이루어지게 되면서 새로운 메시아의 시대가 시작한다.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이사 40,10) 하면서 이사야 예언자가 우리 인간의 역사 안에 오신다는 기쁜 소식을 알려주었는데, 이 기쁜 소식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라는 이름 자체의 뜻이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으로 그분은 “주님”, “기름부음받은이”(시편 2,2), 메시아,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다윗의 자손이시다. 갈릴래아 사람 예수, 마리아라는 분에게서 나신 분은 시편 작가가 노래한 대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주님, 살아계신 하느님,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하며 알아 모셨던 부활하신 주님이시며, 십자가 밑에서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마르 15,39)이라고 고백하였던 분이다.

마르코가 복음을 기록할 때,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은 이미 마르코가 속한 그리스도인 교회 공동체의 고백이었고 믿음이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실 뿐 아니라 이미 우리 인간의 역사 가운데 오신 하느님이시라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작”은 우연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기나긴 역사 안에 기록된 내용이었으며 그 기록인 구약, 특별히 이사야 예언서의 성취였다. “복음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미리 성경에 약속해 놓으신 것으로, 당신 아드님에 관한 말씀입니다.”(로마 1,2) 하고 바오로 사도가 말해 주는 대로 마르코 복음사가는 “복음”이 하느님 말씀의 연장이고 삽입이며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한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분이고, 가난하고 겸손하게 믿는 이들이 애타게 부르짖으며 찾았던 분이다. 이제 바야흐로 이 모든 약속이 기록된 그대로 이루어지게 된다.

2.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세례자 요한”

마르코 복음사가는 세례자 요한의 출현을 두고도 이사야 예언자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이사 40,3)라고 기록하였고, 말라키 예언자가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말라 3,1 참조. 탈출 23,20)라고 기록한 내용이 드디어 성취되었다 한다. 오늘 복음의 장면에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의 출현을 위해 등장하고는 있지만, 아직 그 연관성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역사적 등장과 활약, 그리고 그의 제자들 간에 주고받는 대화의 내용 속에서 간접적으로만 예수님이 등장할 뿐이다.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준 것은 서기 27년경이고(루카 3,1), 장소는 “광야”인데, 이는 요르단 강(마르 1,5.9 루카 3,3) 동부에 있는 베타니아(요한 1,28) 근처였다고 알려진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마련”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마르 1,3)이다. 몇 백 년을 두고 들리지 않았던 예언이 새로운 목소리로 주님께로 돌아가라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마르 1,4)를 다시 선포하며 회개로 초대한다.

성 大 그레고리오(St. Gregory I the Great, ‎590~604년 교황 재위)께서는 『은총의 힘이 들어오도록, 진리의 빛이 빛나도록, 하느님을 향한 길이 똑바로 되도록, 그리고 우리를 선익에로 이끄는말씀을 듣고 영혼 안에 정직한 생각들이 생겨나도록 세례자 요한께서 ‘곧은 신앙과 선행을 설파…’하셨다.』 한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말라 3,23)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유다인들의 전통에 따르면 시간의 끝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에 주님의 말씀이 다시 울려 퍼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엘리야 예언자가 올 것이었다. “엘리야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을 그를 제멋대로 다루었다.”(마르 9,13)라는 예수님 말씀에 따라 홍해로 흘러 들어가는 요르단 강 유역의 광야에서 활약을 시작했던 세례자 요한은 사실 새로운 엘리야였다. “몸에는 털이 많고 허리에는 가죽띠를 두른 사람”(2열왕 1,8)이라는 말씀과 “예언자들은…속이려고 입던 털옷”(즈카 13,4)이라는 말씀처럼 세례자 요한은 예언자요 엘리야의 복장으로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으며”, 음식으로는 가공하지 않고 자연에서 그대로 채취한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마르 1,6) 세례자 요한의 철저한 금욕생활과 그의 삶은 권력과 도시에서 먼 거친 삶이었다.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마르 1,5)라는 기록은 상대적으로 그의 삶이 광야의 고독한 삶이었음을 보여준다.

『세례자 요한은 메뚜기를 먹었습니다. 그의 영혼에 날개들이 자라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예루살렘의 성 치릴로 315~386년)』 『복된 세례자 요한은 사치와 향락의 냄새 때문에 양 떼로부터 얻은 털을 경멸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대신에 (거친) 낙타 털을 선택하였습니다. 이는 자기 생애를 단순하고 검소한 형태로 살아가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마르 1,6)” 하였는데, 이는 달콤하고도 영적인 음식입니다. 이 모두는 주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하여 겸손하고 자기 절제를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감히 어떻게 자줏빛 옷을 걸칠 수 있었겠습니까? 세례자 요한은 도시의 모든 그릇된 허울을 피하고 온갖 하찮은 것과 저속하고 비열한 것들을 떠나서 광야에서 조용한 현존을 살았던 사람입니다.(알렉산드리아의 성 클레멘트, 150~215년)』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마르 1,3)”라 한다. 『“소리”와 “외침”은 함께 갑니다. “소리”는 믿음을 설파하고 “외침”은 회개를 요구합니다. “소리”는 편안하고 “외침”은 다급합니다. “소리”는 자비를 노래하고 “외침”은 심판을 알립니다.(튜린의 막시무스, 5세기)』 『요한은 “소리”였습니다. 그 대신에 주님께서는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에서 보듯이 말씀이셨습니다. 요한은 시간의 소리입니다만, 그리스도께서는 “한 처음”부터 계시는 영원의 말씀이십니다. 말을 빼고 그저 소리만 있을 뿐이라면 그 소리는 과연 무엇입니까?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그저 소음일 뿐입니다. 말이 없는 소리는 귀를 울릴 뿐이지만 마음에 새겨지지는 않습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354~430년)』

세례자 요한에 관해서는 복음서들의 기록만이 아니라 유다인들의 다른 기록(예를 들어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기원후 37년~100년 경)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기록을 종합해보면,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의 자손, 특별히 소위 종교인들이라고 하는 이들이 보기에는 형편없는 무지렁이와 같이 무식하고 단순하여 하느님께 그저 자비와 용서를 청할 수밖에 없었던 유다교 신자 중에서 광범위한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알게 된 바에 따르면 당시 세례자 요한이 활동하던 시기에 같은 지역에서는 쿰란의 에세네 공동체와 같은 여러 다른 그룹들이 있었다. 이 그룹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며 정화를 위해서 강물에 몸을 담그는 침례浸禮를 실천하고, 희생 제물을 대신하여 주님의 말씀을 듣고 성경 공부와 찬미를 드리며, 예루살렘 성전에서 지내는 희생 제사를 거부하는 것과 같은 공동체 의식을 행하였다. 세례자 요한도 이러한 그룹의 일원이었을까? 지금까지 학자들의 연구에 따를 때 세례자 요한이 이와 같은 내용을 알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고 보이지만, 그러한 종교적 운동의 하나로 그의 활약을 규정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는 아직 없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주님께로 가는 길을 준비하라고 요청하면서 그것이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임을 선포(마르 1,4)한다. 주님께로 가는 길을 준비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주님께서는 우리 앞에 하나의 길을 열어 그 길을 통해 당신께 오라고 요구한 적이 없으시고 오히려 정확하게 말해서는 그 반대이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우리에게 오실 터이니 그 길을 준비해 달라고 요구하신다. 길은 그분께서 오시는 주님의 길이지 우리가 그분께로 가는 우리의 길이 아니다. 그 길에서 그분과 만나는 만남은 그분의 은총이고 그분께서 우리 하나하나를 애써 찾으신 결과이지 우리가 찾아 나서서 얻어지는 결과가 아니다. 그분께서 자비와 용서, 그분만이 여실 수 있는 길로 우리에게 오신다.

우리가 그 길에서 그분을 만날 수 있는 것오직 우리가 우리 죄를 인식할 때만 가능하다. 죄는 주님을 배반하는 것이고 결국 죄지만, 그 죄를 우리가 죄라고 깨달으면서 주님을 만날 수 있으므로 어떤 의미에서 주님을 만나는 유일한 가능성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부서진 마음, 진심으로 자기 죄를 죄라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마음만이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 모세는 하느님께 “이제 제가 당신 눈에 든다면, 저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당신을 알고, 더욱 당신 눈에 들 수 있을 것입니다.”(탈출 33,13)라고 청한다. 이 대목을 타르굼Targum, 곧 아람어 식 번역에서는 『당신의 자비를 알 수 있도록 당신 은총의 길을 보여주십시오.』라고 한다. 주님께서는 부르심과 만남, 그리고 사랑의 길에서 “내가 몸소 함께 가면서 너에게 안식을 베풀겠다.”(탈출 33,14) 하시는 것처럼 항상 우리와 몸소 함께 가신다. 사실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내용을 그 내용 그대로 깊이 알아듣기에는 한계가 많지만,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시고 그저 은총이요 선물인 당신의 사랑을 밝혀주시기에 그분께서 밝혀주시는 만큼 조금씩 알아갈 것이다.

3.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모든 길을 따라 걸으며 그분을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섬기는 것”(신명 10,12)이라 하셨으니 우리는 그렇게 그분을 듣고, 그분을 사랑하며, 언제나 그분의 길로 남는 그분의 길을 간다. 예수님 몸소 “나는 길”(요한 14,6)이라 하셨다. 세례자 요한이 사람들에게 요청한 것은 회개이고 주님께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사람들은 그 표시로 “모두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세례를 받았다.” 죄를 고백하는 말, 그리고 강물에 몸을 담그는 세례, 곧 말과 표시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따랐다. 이는 나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나는 상태에 있기 위함이었지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려고”(마태 3,7 루카 3,7) 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마르 1,3) 한다. 『“주님의 길”은 마음 안에서 준비되어야만 합니다.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 온 세상인 것처럼 그렇게도 위대하고 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크기를 인간 신체적인 크기로서가 아니라 진리를 품어 안을 수 있다는 위대한 능력의 크기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마음 안에 고귀한 인생의 자세로 “주님의 길”을 준비하십시오. 당신의 인생길을 곧게 간직하여 주님의 말씀이 아무 장애 없이 들어가게 하십시오.(오리게네스, 185~254년)』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계시하고 가리키며 나타내기 위하여 예수님께도 세례를 주고 그분을 강물에 담근다.(참조. 마르 1,9)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이 일이 있고 나서 세례자 요한은 무대에서 즉시 사라진다. 그런 면에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간결하게 본질적인 것만을 기록하려 한다. 마르코복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말로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르 1,7-8)라는 말만을 전한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이다.

세례자 요한이 아직 예수님의 이름을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또 예수님이 마치 자기의 제자요 추종자처럼 등장하시지만, 자기는 선구자일뿐 자기의 역할과 임무 수행은 다른 분을 소개하는 것임을 명확히 한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을 알고, 자신이 감히 그분의 종도 되지 못할 처지임을 알고 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관해 어떻게 이런 인식과 식별력을 지니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신비이다. 오직 하느님께서 그에게 알려주신 계시였으며 은총이었을 것으로 생각할 뿐이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전에 내가 말한 분이시다.”(요한 1,30)에서 보듯이 세례자 요한은 항상 무대 중앙에서 비켜서서 예수님을 중앙에 모시려고 한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주는 세례와 예수님이 장차 주실 세례가 “물”의 세례요 “성령”의 세례로서 다르다는 것도 밝힌다.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이사 11,2)에서 밝혀졌듯이 하느님의 영이요 풍성하고 충만한 메시아의 영, 주님의 영, “성령”의 세례를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베풀어주실 것이라고 알려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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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은 하느님의 온유한 사랑에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번 주일 복음(마르 1,1-8 참조)은 세례자 요한의 모습과 활동을 소개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당대인들에게 제시했던 신앙의 여정은 대림시기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신앙의 여정과 흡사합니다. 성탄 때 주님을 모시려고 우리가 준비하는 신앙의 여정 말입니다. 이 신앙의 여정은 회심의 여정입니다. “회심”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성경에서는 무엇보다 방향이나 진로를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기도 합니다. 도덕적, 영적 삶에서 회심한다는 것은 악에서 선으로, 죄에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유다의 광야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4절)했던 세례자 요한이 가르쳤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그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려고 결심했던 이들의 회심의 외적이고 가시적인 표식이었습니다. 그 세례는 요르단 강, 물속에 잠김으로써 이루어졌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단지 표식에 불과했습니다. 참회하고 삶을 바꾸려는 기꺼운 자세가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회심은 지은 죄에 대한 통회, 죄에서 벗어나려는 열망, 자기 삶에서 영원히 죄를 몰아내겠다는 결심을 포함합니다. 죄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죄와 결부된 모든 것, 죄와 연관된 것들을 거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세속적인 사고방식, 안락한 생활에 대한 과도한 동경, 쾌락, 행복 추구, 부에 대한 지나친 동경을 거부해야 합니다. 이러한 이탈의 본보기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에서 한 번 더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세례자 요한은 불필요한 것을 포기하고 본질을 추구하는 엄격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회심의 첫째 측면입니다. 곧 죄와 세속성에서 이탈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에서 초월하는 이탈의 여정을 시작해야 합니다.

회심의 다른 측면은 여정의 종착점, 다시 말해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를 찾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사물에서 이탈하고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안락함과 세속적 사고방식의 포기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단지 참회를 하기 위한 고행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고행자”처럼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이탈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보다 더 큰 어떤 것의 성취를 목적으로 합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 나라, 하느님과의 친교, 하느님과의 우정을 목표로 삼습니다. 하지만 이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를 죄와 가깝게 해주는 수많은 연결고리가 있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습니다. (…) 유혹은 (우리를) 언제나 아래로 끌어당기고, 아래로 끌어당깁니다. 그리고 우리를 죄와 가깝게 해주는 수많은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곧 불충실, 낙심, 악의, 해로운 환경, 나쁜 본보기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주님을 향한 열망이 약하다고 느끼며 하느님이 대부분의 경우 침묵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들었던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는 친절하고 자상한 목자의 모습처럼(이사 40,1.11 참조), 하느님이 약속하신 위로는 비현실적이고 거리가 먼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참된 회심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이런 낙심을 느낍니까! “아뇨, 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처음엔 조금 회심하지만, 나중에는 예전으로 되돌아가고 마는걸요.” 그런데 이런 태도는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회심은) 가능합니다. 가능하고 말고요. 혹시 이 낙심하는 생각이 여러분에게 다가올 때, 거기에 머물지 마십시오. 이런 생각은 모래 늪이기 때문입니다. 모래 늪입니다. 범속한 존재의 모래 늪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평범하고 속된 것입니다. 누군가 (앞으로) 가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느낄 때, 이런 경우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먼저 회심은 은총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도 자신의 힘으로 회심할 수 없습니다. 은총이란 주님이 여러분에게 주시는 겁니다. 따라서 온 힘을 다해 하느님께 (은총을) 청해야 하고, 하느님이 우리를 회심시켜 주시도록 청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움, 선하심, 온유한 사랑에 우리 마음을 여는 만큼, 우리가 정말 회심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청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온유한 사랑을 생각하십시오. 하느님은 악한 아버지, 나쁜 아버지가 아니십니다.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온유한 분이시고, 당신 양 떼의 (길 잃은) 마지막 양을 찾으시는 착한 목자처럼, 우리를 무척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회심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회심의) 여정을 시작하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을 (회심의) 여정으로 이끄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분이 어떻게 오실지 보게 될 겁니다. 기도하고, (회심의 여정을) 걸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항상 한 걸음 더 발전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는 12월 8일 화요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을 지냅니다. 하느님, 하느님의 말씀,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 마음을 열기 위해, (우리가) 죄와 세속적인 것에서 벗어나도록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가 우리를 도우시길 빕니다.(교황 프란치스코, 삼종기도 훈화, 2020년 12월 6일, 출처-바티칸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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