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10,26-33(연중 제12주일 ‘가’해)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0,26.28.31) by Emil Nolde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 10장으로 예수님께서 세상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태오복음 28장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최종적으로 “온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하라”는 ‘대大파견’이라면, 오늘 복음이 담긴 10장은 ‘소小파견’이라 할 수 있다. 이른바 ‘파견 설교’라고 알려지는 마태오복음 10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그분의 나라를 위하여 봉사하는 이들을 위한 말씀으로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에게만이 아니라 오늘날 모든 봉사자에게도 해당이 되는 중요한 말씀이다.

마태오복음 10장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앞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마태 10,16)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서”(마태 10,6) 전해야 할 말씀을 주시고, 그들 가운데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행동수칙까지도 낱낱이 설명해 주신다.(참조. 마태 10,5-15) 그다음에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파견된 제자들이 당해야만 할 박해가 있을 것을 예고하시면서(참조. 마태 10,16-23), 권위 있는 예언적 말씀으로 “제자가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마태 10,24-25) 하신다. 예수님께서 마귀 두목으로 취급을 받으신 것처럼 예수님으로부터 파견을 받은 이들도 그런 취급을 받을 것이라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사신 것처럼 그분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도 그렇게 살 것이라고 예견하신다. 과연 “사람들은 제자들을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고, 심지어 죽이면서까지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스스로 합리화할 것”(참조. 요한 16,2)이라 하신다.

오늘 복음에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0,26.28.31)라는 말이 세 번 반복되는데, 이는 박해하려는 온갖 시도에 맞서는 두려움, 육신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 행여 예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할까 싶은 두려움으로 각각 정리할 수 있고, 이 말씀 뒤에 이루어지는 내용으로 보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 세 가지를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복음이 마땅히 드러나고 알려지기 마련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며, 셋째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인간과 문명의 역사는 생존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역사요 발달이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얼마 전 Covid-19 사태에서 인간의 그 모든 것들이 그렇게도 허술한 것이었음을 절감하였으면서도 벌써 잊어버렸다.

1.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이들은 용기를 가져야 하며 두려움에 맞서 싸워야 하고,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안에서만 3번이나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명령하신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이 말씀은 성경에서 하느님께서 당신께서 부르신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실 때 쓰는 말이다.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모세에게,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도 같은 말이 전해졌었다. 성경은 “사람을 무서워하면 그것이 올가미가 되지만 주님을 신뢰하면 안전해진다.”(잠언 29,25)라는 말에서 보듯이 세상과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을 강조한다. 그래서 성경은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다.”(잠언 9,10)라고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즉 세 번 거룩하신(참조. 이사 6,3 묵시 4,8) 하느님의 현존 앞에 인간이 설 때 ‘두려워해야 한다’라는 말씀으로 이는 행여 인간이 우매하여 그분의 현존 앞에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할까를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것이 인간이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이니 설령 원수들 앞에 나설지라도 인간은 절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간혹 우리 곁에 계시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느낄 때라도 당신을 믿는 이들의 곁에 항상 계시는 주님께 믿음을 두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두려움은 은총의 한 가지로서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위험이나 위협이 어디에 있는 지를 알아차려서 주의하도록 해주는 느낌이다. 이 두려움은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 그 일상적인 느낌을 넘어서 그 무엇도 우리 주님과의 관계나 그분의 뜻을 결코 해칠 수 없고,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가 반드시 이긴다는 믿음이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마태 10,26)이라는 구절에서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첫 번째 이유를 발견한다. 이러한 이유를 두고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루카 12,1) 하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기록한다. 루카 복음사가의 기록에서는 바리사이들의 위선 따위가 반드시 밝혀질 것이므로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것이고, 여기 마태오복음에서는 반드시 알려지고야 말 공공연한 복음의 선포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예수님이 구세주가 아니라면서 이를 숨기려 했었지만, 이제 이 사실은 온 세상에 드러났고 알려졌다.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이 모든 사실이 드러나고야 말았다.

2.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예수님께서는 복음이 공공연하게 선포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 10,27) 하며 말씀을 이어가신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예수님 당시 유다의 집 지붕들은 평평하여 바람을 쐬거나 기도 또는 묵상 등을 하는 데에 이용하기도 했다.(참조. 사도 10,9) 이사야는 모압에 대한 심판의 예언을 하면서 모압 사람들이 지붕 위에서 통곡하리라고 하였으며(이사 15,3), 예레미야는 유다와 이스라엘 자손이 지붕 위에서 바알에게 분향하였음을 지적하였다.(예레 32,29)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복음을 공공연하게 선포하고 살아가면서, 불신과 폐쇄, 그리고 배척과 적대감을 만난다. 이때 제자로서는 이미 마음에 살아 움직이고 있는 희망을 접어버리고 그저 침묵하거나 숨고, 심지어는 도망가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내신 파견의 시간은 ‘묵시’의 시간이다. 요한의 ‘묵시록’을 ‘revelation’이라고 하는 것처럼 re-velate, 곧 베일veil을 걷어 올리는(장막을 걷어 올리는) 시간이고 계시를 통하여 진리를 드러내는 시간이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마태 10,26)이듯이 복음 선포는 대낮처럼 “밝은 데에서”, 그리고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소리 질러) 선포”(마태 10,27) 해야만 한다. “숨겨진 것은” 잊어버리거나 내팽개쳐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드러나기” 위해 숨겨진 것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위해서 감추어진 것이다. ‘숨겨지다(kalýpto)’라는 동사와 ‘드러나다(apokalýpto)’, ‘감추어지다(kryptós)’와 ‘알려지다(ghinósko)’라는 동사가 대비되어 문장이 구성되고 있음에 유의할 것이다.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마태 13,35 시편 78,2) 하는 말씀대로, 예수님과 예수님의 명을 받은 제자들에 의해서 모든 것이 드러나고 알려진다. 복음의 메시지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거부하려는 음모,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르는 온갖 어두운 거짓 행위를 숨기려는 시도, 특별히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착취하려는 악행들을 드러낸다. 그뿐만 아니라 기득권과 특권을 고수하려는 종교적 합법화 안에 숨어있는 거짓들도 드러낸다.

제자들의 진짜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숨기고 싶은 한 가지는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도 우상을 섬기는 태도가 엄연히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밖에 있는 원수들은 복음을 실천하고 우리의 신앙과 하느님 나라에 대한 우리의 충성을 증명할 좋은 기회이다. 그러나 안에 있는 원수들은 계속하여 자꾸만 우상숭배에 빠지는 것을 스스로 다그쳐 솎아내야 하는 원수이다.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인 성소聖召(거룩한 부르심)를 사는 이들의 영적 싸움이다. “복음은…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로마 1,16)에 인간의 역사를 통하여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빠르게 퍼져 나가 찬양을”(2테살 3,1) 받아야 한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하신다. 진정한 삶과 생명을 망가뜨리지 못하는 것들, 지상의 삶을 망가뜨리는 것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이다. 그 대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유일한 두려움은 죄와 악한 행실로 주님과의 관계가 단절될까를 걱정하는 두려움이다. 주님만이 지상의 삶과 참된 삶이요 생명을 좌우할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사는 이 지상의 인간적인 삶은 창조주의 뜻에 맞춰 살아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처참하게 망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 이를 말씀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온갖 쓰레기들을 모았던 성 밖의 계곡, “지옥(게헨나)”이라고 불렸던 곳을 언급하신다.

3.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도 더 귀하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창조물을 지으시고 보살피시며, 그분을 믿는 모든 것을 절대 버리지 않으시며 살리시는 당신의 “아빠, 아버지”이신 하느님께로 눈길을 돌려 말씀을 이어가신다. 이때 “참새 두 마리”(마태 10,29)를 말씀하신다. 아주 작은 피조물 중의 하나로 나뭇가지나 지붕 여기저기 수도 없이 드나들며 둥지를 트는 창조물 중 하나로 별로 보살필 가치가 없는 것으로 사람들이 여기는 것들인데, 하물며 하느님 앞에서야 오죽하겠는가? 주의 깊게 그 말씀을 다시 읽으면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마태 10,29) 한다. 잘 읽어야 한다. 한 마리는 땅에 떨어지도록 허락하셔서 떨어지고(간혹 이방인들의 운명을 이렇게 비유하는 경우도 있다), 다른 한 마리는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셔서 안 떨어졌다는 것이 아니다. 설령 둘 중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진다 해도 그것이 아버지의 허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의 머리에 붙어있으면서 우리가 의식하지도 못하는 새에 수도 없이 바닥에 떨어지는 머리털을 언급하시며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 10,30) 하신다. 다른 말로 보잘것없는 것처럼 생각되는 참새나 머리카락도 하느님의 보살핌 안에 있고, 하느님의 시선 아래에 있는데, 하물며 우리를 더욱 “귀한” 존재로 여기시는 하느님이 아니겠느냐고 하시며 우리가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하신다.

하찮게 여겨지는 참새나 생각지도 못한 머리카락마저 하느님의 시선 아래에 있다는 생각을 하면 두려움이 가시고 하느님을 믿는 든든한 믿음이 생긴다. 절대 나를 버리지 않고, 언제나 내 편이며, 언제나 내가 돌아가 기댈 수 있고, 내가 설령 엎어지더라도 사랑스럽고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아주는 아버지처럼(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거나 아버지에 대한 아픔이 있는 분들의 경우에는 내 인생에서 아버지 같은 그런 분)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우리를 보고 계신다.

하느님의 눈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보잘것없는 참새나 많은 이가 생각지도 않는 머리털과는 비교할 수 없이 귀한 존재들이지만, 박해를 당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 제자들의 죽음에는 항상 하느님 아버지께서 함께하시고, 유혹 중에도 주님께서 함께하신다. 제자들의 고통에는 항상 주님께서 함께 고통을 받으신다. 주님과의 통교와 관계는 우리 스스로 그것을 훼손하지 않는 한 세상 그 누구도 망가뜨리지 못한다. 이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모실 준비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준비는 오만과 교만이 없이 없이 겸손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비싼 값을 치러야 한다.

오늘날 서방 세계와 많은 그리스도교 국가에서조차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데에 어떤 경우에는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한다는 박해의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는 않는다. 우리 스스로 그러한 시험과 박해에서는 면제되었다는 환상을 갖지나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하는 것을 주저할 때마다, 인간의 정의와 평화, 그리고 사랑의 현장에서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증거할 용기를 발휘하지 못할 때마다, 우리는 하늘에서 아버지 하느님 앞에 서게 될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마태 10,33) 선택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은 ‘다들 그렇게 하고, 또 그렇게 말하잖아.’ 하는 흔한 말에 담겨있을 때가 많다. 힘 있는 사람이나 영향력 있는 사람들 앞에서 그들을 불쾌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처세와 매너, 괜히 방해나 부담이 되고 싶지 않다는 우리의 나약함이나 게으름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경우가 많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어떤 거창한 법정이나 군중 앞에서가 아니라 가난한 하녀와 구경꾼들 앞에서였다.(참조. 마태 26,69-75)

오늘날까지도 이집트와 중동 지역 일부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맹목적인 반그리스도교적 정서 안에서 전례에 참석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희생양이 되어 죽음에 처해 질지 모른다는 위험을 감수하며 전례에 참석한다. 오늘날에도 순교는 여전히 남아있고 로마 제국 시대의 수 세기 동안보다도 더 많은 순교자가 발생한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요한 14,26)께서 아버지 하느님께 우리를 위해 항상 간청하시고, 성령의 힘과 보호로 우리를 지켜주시는 예수님께서 계시니 우리는 용기를 내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두려움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가장 큰 위협이다. 두려움은 의심을 낳고, 의심은 주님과 복음의 부인否認을 낳는다. 겸손한 믿음이 있는 곳에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힘이 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8) 아멘!

2 thoughts on “마태 10,26-33(연중 제12주일 ‘가’해)

  1. 이번 마태복음10장을 설명하신 글에서 지난주 의문의 답을 찾았다. 온전히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하고 찾을수 있게 도와주시는 신부님들께 감사드립니다

  2. “진짜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마음에 와 닿으며 성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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