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할 위爲

‘할 위爲’라고 하는 글자 위에는 ‘손톱 조爪’가 붙어있다. 이는 손톱이나 갈퀴의 모양에서 유래하면서 긁고, 할퀴고, 움켜잡는 모양새다. 이 ‘손톱 조爪’ 밑에 있는 모양을 원숭이라고 보기도 하고 코끼리라고 보기도 한다. 원숭이라고 보면 원숭이가 손톱으로 할퀴고 무엇인가를 움켜잡는 모양이다. 원숭이가 머리를 긁거나 쥐어뜯는 모습으로 재주 많은 원숭이를 표현하면서 원숭이가 사람처럼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뜻에서 ‘할 위’가 되었다는 이도 있다. 그러나 좀 더 설득력이 있는 글자 풀이는 원숭이보다는 코끼리의 옆모습을 90도 돌려놓은 모양(코끼리 상象)으로 보는 것이다. 곧 사람이 코끼리를 잡고 부리는 형상이라는 것이다. 이는 코끼리를 길들이는 모습과 통하여 코끼리가 이러저러하게 어떤 행동을 하게 하는 것으로 ‘하다’라는 의미를 담아 ‘할 위爲’가 되었다는 것이다. ‘할 위爲’의 갑골문 금문 시기의 모양(그림 左)과 그 다음 시기인 소전체 문자(그림 右)를 문자 학자 진태하 교수께서 그린 것을 보면 자명해진다. 코끼리 코를 잡은 사람의 손이 위에 붙어있는 형상이다.

인도에서는 대략 기원전 2천 년부터 코끼리를 길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원래 코끼리가 없던 중국에서는 기원전 1000여 년 전에 코끼리를 들여와 전쟁에 사용했다. 당연히 우리나라에도 코끼리가 없었다. 내가 알기로 코끼리를 우리나라에 맨 먼저 소개한 분은 연암燕巖 박지원(1737~1805년) 선생이다. 그분의 중국 기행문인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정 민 교수가 번역한 내용을 따라서 살펴보면, 묘사하기가 어려웠을 코끼리를 다음과 같이 재미있게 소개한다.

“그 생김새가 몸뚱이는 소인데 꼬리는 나귀 같고, 낙타 무릎에다 범의 발굽을 하고 있다. 털은 짧고 회색으로, 모습은 어질게 생겼고 소리는 구슬프다. 귀는 마치 구름을 드리운 듯 하고, 눈은 초승달처럼 생겼다. 양쪽의 어금니는 크기가 두 아람이나 되고, 길이는 한 자 남짓이다. 코가 어금니보다 더 길어서 구부리고 펴는 것은 자벌레만 같고, 두르르 말고 굽히는 것은 굼벵이 같다. 그 끝은 누에 꽁무니처럼 생겼는데, 마치 족집게처럼 물건을 끼워가지고는 말아서 입에다 넣는다. 혹 코를 주둥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어, 다시금 코끼리의 코가 있는 곳을 찾기도 하니, 대개 그 코가 이렇게 길 줄은 생각지도 못하는 것이다. 간혹 코끼리는 다리가 다섯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다. 혹은 코끼리 눈이 쥐눈과 같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대개 온 마음이 코와 어금니 사이로만 쏠려서 그 온 몸뚱이 가운데서 가장 작은 것을 좇다 보니 이렇듯 앞뒤가 안 맞는 비유가 있게 된 것이다. 대개 코끼리의 눈은 몹시 가늘어 마치 간사한 사람이 아양을 떨 때 그 눈이 먼저 웃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그 어진 성품이 바로 이 눈에 담겨 있다.…그대가 말하는 이치란 것은 소나 말, 닭이나 개에게나 해당할 뿐이다. 하늘이 이빨을 준 것이 반드시 고개를 숙여 물건을 씹게 하려는 것이라고 치자. 이제 대저 코끼리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어금니를 심어 주어 장차 땅으로 숙이려고 하면 어금니가 먼저 걸리게 되니, 이른바 물건을 씹는 것이 절로 방해되지 않겠는가?…코끼리가 범을 만나면 코로 쳐서 이를 죽이고 마니 그 코는 천하에 무적이다. 그러나 쥐를 만나면 코를 둘 곳이 없어 하늘을 우러르며 서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장차 쥐가 범보다 무섭다고 말한다면 앞서 말한 바의 이치는 아닐 것이다.”

지상의 포유동물 중에서 가장 덩치가 크다고 할 수 있는 코끼리를 길들이는 것은 정말 뭔가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할 위爲’라는 글자가 코끼리를 부리는 사람의 손이 붙은 글자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이 글자는 나아가 인위적으로 무엇인가를 한다는 뜻에서 거짓으로 꾸미는 것인 ‘가장하다’와 같은 부정적인 의미도 담게 되었다. 코끼리를 길들이는 것이므로 ‘다스리다’의 의미도 갖추게 되었고, 코끼리의 처지에서는 무엇인가를 사람에게서 배우게 되었으므로 ‘배우다’의 의미, 여기에서 번져나가 ‘생각하다’의 의미, 그리고 전투 훈련 같은 어려운 목적을 위해 길들이는 것에서 ‘위하다’의 의미를 두루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하/할 위爲’에 ‘사람 인人’을 붙이면 인위적인 것을 강조하여 ‘거짓, 작위’라는 뜻을 갖는다. 그래서 ‘거짓 위僞’가 된다. 어쩌면 사람이 하는 것이나 하려고 하는 것은 본성적으로 ‘거짓’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거짓 위僞’라는 글자는 정당하다.

그래서 일찍이 예수님을 몰랐던 노자老子는 도덕경道德經에서 ‘爲無爲위무위 則無不治즉무불치 = 무위로써 하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다.’라고 간파했던 것일까? 노자의 말에서 ‘다스릴 치治’는 삼수변氵(=水, 氺, 물)과 함께 만물을 이롭게 하는 물, 다투지 않는 물,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이어서 상선약수上善若水, 으뜸 선, 평화이다. 어쩌면 진정한 평화는 ‘할 것’이 없이 오로지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기도하는 것뿐이다. 낮은 곳의 가난한 사람이 차지하는 복이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하셨고,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21.26 루카 24,36) 하고 거듭 반복했던 것이다.(2017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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