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은,

시신屍身 소생이 아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우화가 아니다. 유령이나 영혼의 유체 이탈이 아니다. 죽었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다시 살아난다는 것도 아니다. 『죽었다가 살아났다가 다시 죽어야 할 몸으로 사는 라자로(C.S.루이스)』가 아니다.

두려움에 싸여 있던 제자들이 갑자기 설쳐대는 것이 부활의 증거가 아니냐는 들이댐만으론 현대인에게 설득력이 약하다.

“하느님은 사랑”(1요한, 4,8.16)이시라 했으니, “서로 사랑”(요한 15,12.17) 해야 한다고 하셨으니, 고통과 죽음의 흔적이 아니라 “끝까지 사랑”(요한 13,1)하느라 생긴 상처, 사랑이다.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신비이다. 빵을 떼실 때에야 알아보는 성사이다.

감히 사랑이신 하느님의 조각이나 부스러기일지라도 내가 온전히 살아, 내가 사랑이 되어, 사랑이신 분의 사랑에 조금이라도 녹아들고 스며드는 것이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에 나를 받아주실 만큼 내가 죽는 것이다. 당치도 않을 나를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거두어주심이다.

“제자”들은 이 모든 것에 관한 무엇인가 비밀을 깨우쳤거나 살짝이라도 엿본 사람들이다.(20210401*이미지- 영문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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