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 10,2-16 또는 10,2-12(연중 제27주일 ‘나’해)

“둘이 아니라 한 몸…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마르 10,8-9) by Marc Chagall, Green Lovers. 1915년

복음의 전반부에서 몇몇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조상들이 이혼 가능성을 허락한 경우를 두고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며 시비를 걸어와 예수님과 논란을 일으킨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혼을 반대하는 것이 부당하며, 그렇게 되면 율법을 준수하지 않는 상황이 된다는 것처럼 몰아붙인다. 이 논쟁은 이미 당시 샴마이Shammai라고 하는 엄격주의자들(간음의 경우 이외에는 이혼 절대 불가)과 힐렐Hillel이라고 하는 자유주의자들(어떤 이유라도 이유가 닿으면 이혼 가능)이라는 두 랍비 파벌 간의 해묵은 논쟁이었다. 그 어느 견해이든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다. 질문 자체가 남성 본위의 사고방식에서 비롯되고 있다.(*힐렐과 샴마이는 예수님 당시에 모세오경과 구전 전승에 관련하여 독보적인 스승들이었고 그들 문하에 수많은 제자가 있어 학파를 형성할 정도였다. 참고로 힐렐의 손자로 알려지는 “가말리엘”의 문하생 중 하나가 사도 바오로이다. 참조. 사도 5,34.39;22,3)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선명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인간이 살아가는 혼인의 어려운 현실을 보면서 복잡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예수님의 분명한 의도와는 다르게 오늘 복음의 어떤 내용을 이용하여 다른 이의 혼인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도구로 사용하려는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이 복음에 관련된 내용을 강론하거나 해설하게 될 때마다 주님 앞에서만이 아니라 혼인 생활을 하는 남녀 신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서 겸손하게 묵상하며 성실하게 주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할 뿐 아니라, 혼인을 사는 형제자매들을 판단하거나 그들에게 불편이나 겁을 주고 심지어는 죄책감을 주는 일 없이, 또한,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28)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적어도 이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나는 떳떳하다는 식의 오만함이 없이, 말씀을 전해야 한다. 마태 5,28의 말씀을 아는 사람들은 혼인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과 나는 다르고 그들과는 다른 쪽에 있다고 생각하기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과는 맞지 않는 삶을 살 수밖에 없어서 힘든 혼인 생활을 꾸려가고 있는 형제자매들을 안타깝게 여기며 똑같은 인간임을 느끼고 연대감을 느껴야만 한다.

1.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구약의 수천 년 기간 중동을 비롯한 지중해 지역에서 이혼은 흔한 관행이었다. 그렇지만 이혼은 남편 쪽에서만 주도권을 쥐고 행사할 수 있으며 남편에게 유리하다고 할 수 있는 일방적인 규제요 현실이었다. 당시 혼인은 문서로 보증되지 않는 일종의 허술한 계약이었고 구약에는 결혼에 관한 법 자체가 없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분명한 근거처럼 제시하고 있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마태 10,4 참조. 신명 24,1-4) 하는 내용은 일반적인 법이라기보다 특정한 경우에 한정되는 내용이다.

해당 구절은 “어떤 남자가 여자를 맞아들여 혼인하였는데, 그 여자에게서 추한 것이 드러나 눈에 들지 않을 경우, 이혼 증서를 써서 손에 쥐어주고 자기 집에서 내보낼 수 있다.”(신명 24,1) 이다. 직역하면 ‘남편이 여자에게서 수치스러운 일(‘erwat dãbãr, עֶרְוַ֣ת דָּבָ֔ר, exposure of a thing or nakedness of a matter)을 발견하였으므로 여자가 남편의 눈에서 은혜를 보지 못하면’ 하는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관건은 남자가 여자에게서 발견하는추한 일”, 곧 ‘수치스러운 일’이다. 이는 라삐들이 이렇게도 해석하고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매우 모호한 말이다. 이 경우에 이혼할 수 있다는 것이다.(힐렐 학파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행동’으로 해석하고, 샴마이는 이를 ‘간음’으로 해석한다) 아무튼 특정한 이유가 있어야만 하고, 그것도 일정한 과정을 거쳐서만 이혼을 진행할 수 있는데, 이것을 두고 모세법이요 토라Torah가 이혼에 관한 법을 규정하였다는 식으로 일반화하여 해석하는 것은 무리이다. 예언서들이나 지혜서, 그리고 같은 내용을 다루는 소위 에세네파Essenes(Essenism)와 같은 곳에서 전하는 문서들에서도 이혼은 안 된다거나 하느님의 법이 이를 금지한다고 선포하는 분명한 입장을 발견할 수는 없다. 구약에서는 아주 단순한 내용으로 “정녕 나는 아내를 내쫓는 것을 싫어한다.”(말라 2,16) 하는 한 구절이 전해질 뿐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마르 10,2) 하는 질문에 직접적인 답을 하시도록 강요한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마르 10,3) 하는 질문으로 “되물으신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마르 10,4) 하고 대답한다. 바리사이들은 마치 이것이 ‘율법’이요 토라라는 듯이 답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대한 종교적 설명을 하시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혼에 대한 찬성도 아니고 반대도 아닌 답을 하신다.

당대의 라삐들이 답하는 것처럼 답을 하시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답을 놓고 경직되게 해석하시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융통성 있게 해석하시는 것도 아닌 답을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있게 하신 하느님의 원래의 뜻에 돌아가야 한다고 답하신다. 이러한 방식으로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결정적인 원리, 곧 인간의 전통이 아닌(참조. 마르 7,8.13) 하느님의 뜻이라는 기준을 제시하신다. 곧 당신의 말씀이 기록되게 하시어 당신의 뜻을 계시하고자 하신 하느님의 뜻을 말씀하신다.

2.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

예수님께서는 창세기를 인용하시며 “너희 마음이 완고<스클레로카르디아, σκληροκαρδία, sklerokardía>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창조 때<be-reshit, ΕΝ ΑΡΧΗ, en archê, 한처음에, 창세 1,1>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창세 1,27>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창세 2,24>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5-9)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흙의 먼지로”(창세 2,7)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계획,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창세 3,19)라고 말씀하신 하느님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신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주겠다.”(창세 2,18) 하신 하느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함께 역사를 이루고 사랑을 이루며 생명을 이루면서 얼굴을 맞대고 상호 책임 속에서 “둘이 한 몸이 된다”(창세 2,24) 하신 것처럼 하나의 현실을 살도록 부르신 태초 하느님의 계획과 인간의 부르심을 거론하신다.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세 1,25) 하신 남자와 여자의 만남은 사랑의 만남이다. 이 만남은 사랑이신 하느님(참조. 1요한 4,8.16)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사랑이 담긴 부르심이다. 이 사랑은 영속적이며 충실한 사랑이다. 이 사랑의 만남은 나의 몸에서 시작하여 다른 몸에게 나를 온전히 내어주고 넘겨주는,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이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은총이요 예술이다. 이 사랑의 만남은 시간의 역사 안에 이루어져 죽음까지 이어질 뿐 아니라 그 죽음을 넘어서고자 하는 “영원”의 결속이 담긴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 있었던 공간은 분리와 차별의 공간이 아니라 은총의 공간이요, 만남의 공간이었으며, 일치의 공간이요 사랑의 공간이다. 그 공간에 뱀의 간교함이 파고들어 인간은 죄에 빠진다. 뱀의 간계로 아담과 하와 사이에 균열이 생긴다. 오늘 제1독서인 창세기를 보면 하와가 탄생한 배경을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시어 그를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셨다.(창세 2,21-22)” 한다. 아담은 애초에 하와에게 어떠한 영향력도 끼치지 못한 상태(깊은 잠)에서 하와를 맞는다. 아담은 하와를 생각하거나 상상조차 하지 못한 상태였다. 마침내 하와를 맞이하게 되었을 때 아담은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창세 2,23)”라고 한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한 지배권을 의미(창세 2,19-20)하지만, 아담이 보통 명사 ‘여자’라고 불리던 자기 일부를 ‘하와’라고 이름 지은 것은 이름을 붙여 지배권을 갖는다는 것과는 다르다. “사람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하였다. 그가 살아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창세 3,20)”에서 보듯이 모든 생명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여자를 지으실 때 아담의 옆구리에서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창세 2,21) 아담의 옆구리에 생겼을 이 상처아담이 하느님께 열어 내어드렸을 선물과 생명의 상징이다. 아담을 위해 하와는 선물이었지만 아담이 열어 내어드렸어야 할 생명과 상처로 주어진 선물이었다. 아담의 옆구리에 열려야 했고 메꾸어져야 했던 이 공간이요 상처를 통해 하와의 생명이 주어지고아담의 생명이 온전히 이루어진다.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았던”(창세 2,18) 아담이 좋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하여 아담은 비로소 아담이 된다. 생명을 낳으면서 온전한 생명이 된다. 그렇게 아담은 비로소 사람이 된다. 하느님의 축복은 이처럼 하나의 상처를 통하여, 즉 하느님께서 온전히 나를 여닫으실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을 통하여 주어지는 선물이요 은총이다. 이것이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는 신성한 과정이다.

이 땅을 창조하시고 그 안에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 하시며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창조”(창세 1,27)하시어 사람을 두신 하느님의 뜻이 바로 이것이다. 참으로 위대한 신비이다. 어쩌면 너무나 위대하여 연약하고 보잘것없이 죄에 빠지고 마는 인간으로서는 충만하게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다. 남녀의 만남이라는 이 복잡다단하고 어찌 보면 피곤한 만남 안에서 인간은 수많은 비참을 느끼기도 하고 모순과 자가당착이며 이율배반에 얼마나 쉽게 빠지는지를 경험하며 산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의 거룩한 영이신 성령의 도우심과 은총으로 함께 사는 걸작이요 대작을 이뤄가는 예술임도 안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9) 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간결하고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 말씀을 하신 직후에 그 말씀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공동체의 본거지인 “집에” 돌아가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마르 10,11-12) 하시며 다시 한번 설명하셔야만 했다. 당시 문화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으로 남성과 여성을 동등한 책임으로 묶어 설명하셨다는 점이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마르 10,5)이라고 지적하신 것처럼 모세는 만연한 이혼의 관행에 여성을 존중하는 규정과도 같은 내용을 두어 당시 이혼을 인간적인 내용으로 설정하려고 노력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시 율법과 토라를 또 다른 “완고함”으로 악용하는 것과도 같은 상황을 가늠하시고, 모세의 규정에 앞선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의도를 강조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법과 그 준수에 관해서도 이와 같은 식으로 가르침을 주신 적이 있다.(참조. 마르 2,23-28)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율법 자체에 묶여 율법을 강요하는 식이 아니라 진정한 율법의 해석자로서 그 율법을 있게 하신 하느님의 의도, 특별히 공공연하게 죄인이라고 낙인이 찍힌 사람들이나 소외된 사람들에게 예언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밝혀 주시면서 그 말씀을 듣는 이마다 단죄받는 것이 아니라 항상 받아들여지고, 용서받는다는 사실을 선포하신다.

3.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

어린이들에 관한 말씀이 이어진다. 당시 어린이는 힘없고 작으며 소외되는 사람들의 표상과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이러한 말은 요즈음 대한민국이나 다른 선진국에서 어린이들이라면 최고의 우선권을 지닌 듯이 보이는 상황에서 선뜻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어린이들이 어른이 되어 사람 구실을 하기 전까지 ‘무익한’ 존재들이요 useless로서 가치 없는 존재들로 여겨지는 사회는 아직도 많다. 지구상의 많은 곳에서는 여전히 가장 좋고 맛있는 것을 어른이 먹어야 하고, 가장 무거운 것을 어린이가 기를 쓰면서 들려고 노력해야만 뭐라도 좀 얻어먹을 수 있는 사회가 많이 존재한다. 아직도 전쟁터에 총을 들고 내몰리는 아이들이 많고, 성性 착취나 장기매매를 위해 희생당하고 거래되는 아이들도 수없이 많다.

마음씨 좋은 어른과도 같은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마르 10,13-14) 많은 이가 어린이들을 순수성의 대명사로 해석하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시 어린이들이 처한 가난, 배제, 무시라는 상황에서 그들을 옹호하신다. 그래서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4-15) 하신다. 어린이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모범이라 하신다. 아이들은 별 볼 일이 없고 자기가 왜 그러한 선물을 받을 만한지 헤아려 생각할 줄 몰라도, 선물 앞에서 단순하게 놀랄 줄 알고, 기뻐할 줄 안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라고 하는데, 어린이는 벌어먹지 않고 받아먹는다. 하느님의 나라도 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니 이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작고 소외된 이들이 당신 공동체에 다가오는 것을 “꾸짖는”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언짢아하신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작고 소외된 어린이들이 더는 버림받거나 소외당했다고 느끼지 않도록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마르 10,16) 아멘!

2 thoughts on “마르 10,2-16 또는 10,2-12(연중 제27주일 ‘나’해)

  1. ‘하느님의 축복은, 하느님께서 온전히 나를 여닫으실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을 통하여 주어지는 선물이요 은총’ 이란 말씀을 새겨봅니다.

  2. 어떤 상황에서도 율법이 있게 하신 하느님 원래의 뜻을 생각하고 사랑의 길을 찾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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