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作家

어디선가 누가 나를 “작가作家” 신부라고 소개했다. 생뚱맞다고 생각했고 무안해서 얼굴이 붉어졌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이 “a person who writes books, plays, stories, or other works, as an occupation or profession; an author.”라고 정의한 대로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작가’라면 나는 작가가 아니다. 그렇지만 “a writer is a person who writes”라고 한 대로 무엇인가를 쓰는 이가 작가라면 나는 ‘작가’일지도 모른다. 일정 기간을 두고 계속 무엇인가를 써대고 있다면 더더욱 작가일지 모른다. 글을 잘 쓰든 잘 쓰지 못하든, 읽어주는 독자가 있든 없든, 책을 출판했든 하지 않았든, 소위 이러저러한 협회가 돈 받고 자기식대로의 검증을 거쳐 인정했든 하지 않았든, “언젠가 나도 무엇인가에 관하여 써보겠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에 비해 무엇인가를 계속 쓰고 있는 이는 이미 작가이다. 정원을 가꾸겠다고 생각하면서 정원 가꾸기에 관한 글을 읽어 해박하게 알고 있는 이라 하더라도 그는 정원사가 아니지만 실제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흙을 만져가며 창턱에 있는 허브 화분을 열심히 보살피고 있다면 그는 이미 정원사이다. 그런 면에서 옥스퍼드 영어 사전이 “a writer is a person who is in the habit of or skilled in composing pieces of writing”이라고 설명한 것은 옳았다. 글을 쓰는 습관이 있거나 글쓰기에 능숙한 사람이 작가이다. 습관이 먼저 중요하다.

그런 작가는 번뜩이는 영감으로 생각날 때만 쓰는 사람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기대하는 천재적인 영감은 일상에서 누구에게나 그리 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또 설령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쉽사리 현실로 구체화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고독한 천재(lone genius)’ 환상에 빠져 불현듯 찾아온 영감과 그로 인해 앉아서 완벽한 글을 쓰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다가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세월만 죽인다. 누군가와 어떤 주제를 토론하면서 나의 생각이 정리되고 또 다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 듯이 글은 쓰면서 써진다. 그리고 그 글이 수많은 피드백에 노출될 때 쓰는 이의 쓰기는 완숙해지고 성장한다. 이를 위해 동아리나 공동체처럼 함께 공동 관심사를 논의하고 나의 쓰기를 공유하는 자리는 몹시 소중하다.

영어에서 ‘쓰다’에 해당하는 동사 ‘write’는 거슬러 올라갈 때 ‘wrītan’으로서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인 ‘writer’가 거기서 파생되었다. 서양에서 7세기나 8세기에 극히 일부 사람만이 글을 읽거나 쓸 수 있었고, 사실 양피지羊皮紙(parchment)나 피지皮紙(vellum)에 깃촉(quill) 펜으로 글을 새긴다는 것은 고도의 숙련을 요구하는 작업이었다. 책 한 권을 제작하거나 복사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작업이 필요했고 재료비도 엄청나게 들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대·나무·잎사귀·가죽·점토·물건 등에 무엇인가를 쓰고 그려서 남겼던 우리나라나 동양 문화권에서도 본격적인 쓰기는 붓·먹·종이의 발명 이후에나 가능했을 것이다.

소식, 이야기, 정보, 자료, 일기, 블로그, 강의, 동영상, SNS……들이 범람한다. 쓰는 이도 많고 제작하는 이도 많으며 이를 통해 벌이하는 이들도 많다. 그런 면에서는 작가 천지다. 인간은 쓸 수밖에 없고 verbal이든 non verbal이든 자신을 표출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렇다고 그 모든 내용이 “누군가의 인생이 누군가에 관한 것이 아니듯” 그 사람 자체는 아니다. 또 그럴 필요도 없다.

많은 이는 누군가를 가르치고, 설득하며, 기쁘게 하고, 불안하게 하며, 위로하고, 손뼉을 쳐주기를 바라면서 쓴다. 또 누군가는 자기가 살지 못하는 것을 쓰면서 그 살지 못함에 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 그리고 자기 안에 숨긴 슬픔을 담아 쓴다. 또 누군가는 정작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을 전혀 그에게 들키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보이려고 쓴다.

쓰는 이는 독자의 에너지와 시간을 요구하고, 쓰면서 성장한다. 쓰는 이는 간혹 알아주는 이가 없다는 자괴감에 빠지거나 독자의 무지를 탓하지만, 그것은 쓰는 이의 주관적 자기중심 태도일 뿐이다. 그래도 쓰는 이는 나의 글이 나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쓸 수 있는 용기를 낸다. 쓰는 이는 써놓은 글을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면서 수정한다. 그렇다고 그 수정은 단순히 말마디의 교정이나 교열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시 쓸 각오로 몇 번이고 다시 쓰는 힘든 작업이며 냉엄한 피드백을 통해 겸손을 배우는 학습 과정이다.

어떻게 기도할지를 묻는 이들에게 고대의 금언은 “기도할 수 있는 만큼 기도하라. 할 수 없는 기도를 하려고 하지 말라.(Pray as you can, don’t try to pray as you can’t.)”라고 한다. 그러한 기도처럼 많은 이는 새벽에 맑은 정신으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을 때 써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자신의 생체 리듬이 있다. 자기에게 맞는 시간에 쓰면 그만이다. 또 누구는 매일 써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강박감이 되면 실패요 좌절감으로 돌아온다. 쓸 수 있는 만큼 쓰면 될 것이다. 이는 하루에 얼마만큼이라는 양을 설정하거나 시간의 단위를 약속하는 것만큼이나 바보스럽다.(*참조. 붓 율http://benjikim.com/?p=4020, 이미지-구글)

2 thoughts on “작가作家

  1. 제 생각에 신부님은 작가 맞는듯…
    글쓰기를 전
    주로 남
    흉보거나 원망 가득한 글만 쓴듯 해
    부끄럽습니다.
    최근에서야 감사의 글을 시작했지요.
    작가 반열에는 못 오르겠지만
    쓰고 싶을 때. 쓰고 싶은 것을 기록하다 보면
    제 삶의 계획이 구체적으로 전개될 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제 삶을 치열하게 살아보고 기록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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