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자리

‘꽃자리’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함께 사는 수녀님께 부탁해서 외람되이 첫 연과 마지막 연의 반복되는 부분만을 책갈피 크기로 만들고 복사해서, 코팅까지 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명함 대신 몇 년을 두고 나누어주었던 시이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지나온 시간

우리는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 보면서 과거를 두 편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습성이 있다. 한 편은 감사해야 할, 그리고 오래도록 기억했으면 좋을, 그런 은혜로운 순간들이고, 또 한 편에서는 잊어버려야 할, 아니 어쩌면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서 잊어버리고 싶어지는, 차라리 없었으면 좋았을 법한 체험의 시간들이다. 감사하며 은혜 속에 산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과거, 좋았던 순간만큼이나 나빴던 순간, 그리고 기뻤던 때만큼이나 슬펐던 때까지도 그 모든 것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지금 내가

언제·어디서·누구에게나 돈 보스코-청소년의 부정적 상황

청소년들을 위한 돈 보스코 교육의 여섯 가지 생각 ​돈 보스코의 교육에 바탕을 두어 청소년들에게 곧잘 문제가 될 수 있는 여섯 가지 상황에 관해 돈 보스코라면 어떻게 했을까? 1월 31일은 성 요한 보스코의 천상 탄일을 기념하는 날로서 살레시오회에서는 창립자의 축일로서 가장 성대한 축제의 날이다. 돈 보스코라고 불리기도 하는 그는 가난하고 버림받거나 위험에 처한 청소년들의 아버지요 스승이며

고슴도치의 애정표현

온몸에 아주 거친 가시를 수도 없이 많이 가진 동물이 있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고슴도치이겠다. 추워서 서로 가까이 다가서려면 서로가 찔러대고…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살아야만 되는, 다시 말하면 정다운 포옹이나 어깨동무 한 번 할 수도 없는 가여운 동물인가 싶다. 그 동안 충분히 자연 학습을 하지 못한 나로서는 어떻게 저 동물들은 서로 좋아하는 애정표현을 할

요한 11,1-45(사순 제5주일 ‘가’해)

이제 부활절이 가까운 시점에서 교회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 부활의 예표로서 라자로 부활의 표징을 묵상하도록 우리를 이끈다.(*이미지 출처-ilblogdienzobianchi.it) 1. “마리아와 그 언니 마르타가 사는 베타니아 마을의 라자로” 복음은 “어떤 이가 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는 마리아와 그 언니 마르타가 사는 베타니아 마을의 라자로였다.”(요한 11,1)라고 시작한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체류하시는 동안 사랑하는 이 친구들을 자주 찾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3월 25일)

성모님의 덕을 칭송하면서 우리 신앙인의 삶에서 하느님께 ‘Yes’하는 삶을 잘 살기 위한 영감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다섯 가지 Yes’이다. 1. 신뢰의 ‘Yes’ 마리아의 Yes는 수동적인 포기나 항복이 아니라 사랑하는 하느님의 꿈을 이루기 위한 능동적인 기쁨의 포기요 갈망이다.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전해 들은 마리아는 처음에 무척 혼란스러워하였으며 당황하였고 두려워하며 “몹시 놀라” 천사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였다.”

6개월을 넘기면서

그동안 여기저기 글을 썼다. 초기에는 지금까지 내가 운영하고 있었던 여러 블로그 가운데에서 주로 benjikim.com이라는 나의 개인 도메인 홈페이지에만 썼는데, 정확히 기억을 못 하지만 그 홈페이지가 2001년 12월 4일에 6개월을 넘긴다고 썼었으니 2001년 6월이 그 홈페이지의 개설 시점일 것이다. 이번에 여러 다른 곳의 글들을 모아 benjikim.com에 새로운 홈페이지의 통합 개편을 마감하고 굳이 2001년의 첫 글을 찾아

언제·어디서·누구에게나 돈 보스코-교사敎師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돈 보스코의 이야기가 있다. 여느 위대한 성인들이나 모두 그렇겠지만 돈 보스코(성 요한 보스코) 역시 참 독특한 삶을 살았다. 그런 까닭이어서인지 돈 보스코는 온 세상 동서고금 남녀노소, 각양각색의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돈 보스코는 이탈리아 북부 토리노 근교 가난한 농촌에서 1815년 혹독한 가뭄과 기근으로 몸살을 앓고,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농촌으로부터 도시로 이농離農 이주민,

완성完成·공부

어느 날 예수님께서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하신다. 예수님으로 이루어진 그리스도교의 완성은 무엇일까? 구약이 신약이 되는 것, 유다인의 율법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되는 것, 법이 사랑이 되는 것, 결국 세로축 하느님 사랑과 가로축 이웃사랑으로 가는 예수님의 십자가요 새 계명이다. 십자가를 가슴에 안고 예수님의 새

요한 9,1-41(사순 제4주일 ‘가’해)

부활로 가는 여정에서 교회는 지난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주시는 생수에 관해 묵상하도록 초대한 뒤, 오늘 복음을 통해서는 빛에 관해서 아니 더욱 엄밀하게는 어둠을 뚫고 우리를 헤쳐나오게 하신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서 묵상하도록 초대한다.(*이미지 출처-ilblogdienzobianchi.it) 1.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누가 죄를 지었기에…나는 세상의 빛” 문맥으로 보아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초막절(수꼿 축제, סֻכּוֹת, Sukkot. 참조-레위 23,33-44 신명 16,13-15)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