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의 믿음은 어디에 있느냐?”(루카 8,25)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미국의 예수회 신부로서 시인이자 평화운동가로도 알려진 다니엘 베리건Daniel Berrigan(1921~2016년) 역시 “진정한 당신의 믿음 자리는 어디입니까?“(Where does your faith reside, where’s its real seat?)”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그 질문에 “믿음이란 머리에도, 또 가슴에도 있는 경우가 거의 드뭅니다. 믿음은 엉덩이에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어디에, 왜 그렇게 앉아 있는지, 무엇인가에 매달려 있다면, 실제로 그것이 무엇인지요?(Your faith is rarely where your head is at and rarely where your heart is at. Your faith is where your ass is at! Inside what commitments are you sitting? Within what reality do you anchor yourself?)”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아주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머리의 지성이나 이성적인 사고 안에도 아니고, 그렇다고 느낌과 감정이 오가는 마음에도 아니며, 그들을 넘어선 그 ‘무엇인가’가 나를 사로잡아 내가 믿음의 삶을 지키며 지금 이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게 하는 것이니, 바로 그 엉덩이에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머리(head)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할지라도, 마음(heart)에서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런 행위를 해야만 하는 당위를 절절하게 느끼고 있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나를 지금 이 자리에 붙들어두고 있는 무엇(guts), 나의 내면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고 그렇게 해야만 옳다고 하여 하고 있는 것, 내가 지금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그 자리와 그 자리에서 하고 있는 일과 행동 안에서, 내가 믿음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결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20160318 *이미지-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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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어둔 밤을 넘어 적극적 평화로 다니엘 베리건(*글 이전수 – 이전수 라파엘은 암을 연구하는 생물학자로 과학과 사회. 과학과 종교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으 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에서 위원으로 활동한다. 글 출처-한국천주교주교회의, 경향잡지, 2024년 6월호, 34-38쪽)
두 차례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 시대가 도래하자 세계 곳곳에서는 산발적인 국지전들이 이어졌다. 그 전쟁들은 냉전의 두 진영, 곧 미국을 위시한 서구권과 소비에트연방을 위시한 동구권의 대리전 성격을 띠기도 했다.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 역시 해방 이후 한반도의 남북을 미국과 소련이 각각 신탁통치하며 깊어진 이념 갈등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프랑스의 식민 통치와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 이후 분단되었던 베트남은 1955년부터 미국의 개입으로 전쟁을 치르게 된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8년, 미국의 한 사제가 동생과 함께 베트남전 징집 서류를 불태웠고, 미연방수사국(FBI)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수감된다. 반전운동을 통해 평화에 헌신한 그의 이름은 다니엘 베리건(Daniel Berrigan, 1921~2016년)이다.
시 쓰는 신부 다니엘
아일랜드계 이민자의 후손인 다니엘은 1921년 5월 9일 미국 미네소타주에서 6형제 가운데 다섯째로 태어났다. 미국으로 이주한 아일랜드 이민자들은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처럼 가톨릭 신앙이 깊었다. 대공황 시기에 다니엘의 어머니는 집에 찾아오는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고등학교 1학년이던 1939년, 그는 예수회의 엄격한 양성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홍보 포스터를 보고 친구와 함께 예수회에 입회한다. 특별한 계기 없이 포스터만 보고는 학교를 관두고 입회하기로 결심하였음에도, 그는 사제품을 받은 1952년을 자신이 새로 태어난 원년(Year One)으로 생각하고 예수회 입회를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회고하였다.
사제가 된 다니엘은 뉴욕 브루클린 고등학교에서 프랑스어와 철학을 가르치며 1957년 첫 시집 「영원한 시간(Time without Number)」을 냈고, 같은 해 시 문학 분야에서 상당한 권위를 자랑하는 라몬트 문예상을 받았다. 이후 그는 시는 물론 신학, 저널리즘, 연극, 문학비평 등 다양한 장르에서 50여 권의 책을 펴냈다.
도로시 데이와의 만남
앞서 1940년대 후반, 다니엘은 사목 실습 기간에 예수회가 세운 뉴욕 인근 뉴저지 성베드로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당시 도로시 데이는 뉴욕에서 피터 모린과 함께 가톨릭노동자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1월호 참조). 다니엘은 금요일 저녁마다 학생들을 데리고 허드슨강을 건너 도로시를 찾아가 이야기를 들으려 했다. 학생들이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노동자들의 현실, 가난한 이들이 처한 상황을 실감하기를, 훗날 그런 상황을 목격하거나 직접 겪을 때 어떻게 행동할지도 진지하게 고민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다니엘은 “도로시는 어떤 신학자보다도 더 많은 내용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고 말했다. 그가 배운 것은, 하느님께서는 전쟁과 같은 극단적 폭력과 맞물린 인간 사회의 비참함이 구조화된 상황 속에서도 모든 이를 위하여 모든 것을 충분히 창조하셨고, 인간은 그 창조를 통하여 비참함을 이겨낼 수 있다는 가장 근원적인 희망이었다.
하노이에서 만난 저항의 어둔 밤
다니엘 신부는 1953년, 예수회 양성을 마무리하러 1년간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거기서 그는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벨기에와 이탈리아로 확산되던 노동사제운동(Prétres au travail)을 접한다. 이때 노동자로 살았던 사제들의 경험은 글로 정리되어 당시 주프랑스 교황대사였던 안젤로 론칼리 대주교(성 요한 23세 교황, 1958-1963년 재위)에게 전해졌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지향에 일정 부분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다니엘도 그 영향으로 사회참여 활동을 꿈꾸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1963년 다니엘은 다시 찾은 프랑스의 예수회원들로부터 미국이 개입한 베트남전의 참상을 전해 듣는다. 이듬해 귀국한 그는 베트남전이 악화하고 있음을 깨닫고 본격적인 반전운동을 전개한다. 그는 ‘정당한 전쟁’은 없고 어떠한 전쟁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면서, 가톨릭평화협회(Catholic Peace Fellowship), 그리고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리처드 존 뉴하우스, 아브라함 헤셸 등 이웃 종교인들과 함께 단체행동에 나섰다.
다니엘은 1968년 2월에 베트남 하노이로 가서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도움을 받아, 포로로 잡힌 미군 조종사 3명의 석방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가 하노이에 도착한 날 밤, 미다. 공군은 하노이 시내에 폭격을 가했다. 저항의 어둔 밤은 폭격을 피해 찾아 들어간 방공호에서 시작되었다.
형제의 시민 불복종 운동
한편, 다니엘의 동생인 필립 베리건도 가톨릭 사제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 미군으로 참전했다가 살아 돌아와 성심의 성요셉회(Josephites)에 입회했던 것이다. 전쟁 생존자요 사제로서, 그는 형보다 더 격렬한 반전운동을 하고 있었다.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엄청난 자국 사상자를 냈음에도 이를 국민들에게 정확히 알리지 않은 채 징집병들을 전선에 끊임없이 투입했다. 1967년 10월, 필립은 미국 볼티모어의 징집 사무소에 잠입해 징집 서류에 피를 쏟아붓는 저항 행동을 강행했다. 이 사건으로 재판을 받던 필립은 다니엘을 설득했고, 1968년 5월 17일 형제는 미국 캐톤스빌의 지역 징집 사무소에 들어가 378건의 징집 서류를 불태웠다. 서류 없이는 징집병들을 파병하지 못하므로, 강력한 시민불복종 행위를 단행한 것이다.
필립 자신이 전쟁 생존자였고 다니엘도 베트남전 참상을 목격했기에, 전쟁에 반대하고 적극적 평화를 실천하려 했던 형제에게는 선택 가능한 저항이었다. 두 형제는 FBI에 체포, 기소되어 법원에서 징역 18개월형을 선고받고 1970년 수감되었으나, 베트남전에 반대하던 젊은이들이 이 행동에 영감을 받아 미국 각지에서 반전운동을 이어 가게 된다.
두 형제의 ‘보습 운동'(Plowshares Action, 미카 4.3 참조)은 베트남전 이후에도 끝나지 않았다. 1980년 그들은 평화운동 활동가들과 함께 펜실베니아 주의 제네럴일렉트릭 군수공장에 잠입하여 아직 미사일에 장착되지 않은 핵무기를 망치로 내려쳤다. 형제는 다시 기소되고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가 단기 복역형으로 곧 풀려났다. 다니엘은 1981년 재판에서 진술했다.
“제가 세상에 말하고 싶은 단 한마디는 무고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량 살상 무기 개발에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생명을 그만 죽여라’ 외에는 할 말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전쟁 시대의 ‘힘없는 범죄자’
성 요한 23세 교황은 회칙 「지상의 평화」(1963년) 110항에서, 평화는 결코 ‘무기라는 힘’의 균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관총과 같은 중화기부터 원자폭탄에 이르는 대량 살상 무기는 본래 힘의 우위를 선점하여 전쟁을 빨리 끝내고자 개발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전쟁은 끝났지만, 끊임없는 군비경쟁 속에 무기는 사용이 중단되기는커녕 개량을 거듭하며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는데 이용되었다. 평화를 위장하며 생명을 마구잡이로 죽이고 인간을 도구로 전락시키는 전쟁은 끊어 내야할 악순환의 고리였다.
캐톤스빌 사건으로 수감되기 전, 다니엘은 주일 미사 강론에서 말했다. “우리는 사람을 죽이는 전쟁이 아무렇지도 않은 시대에 사람을 죽이지 않는, ‘힘없는 범죄자’가 되기로 했습니다.” 저항의 어둔 밤을 넘어 지상의 평화를 이루고자 반전운동을 택한 자신의 의지를 피력한 것이다.
1984년 이후 다니엘은 뉴욕의 성빈센트병원에서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인들을 돌보았다. 그에게는 이 또한 생명을 중시하는 평화운동의 형태였다. 아울러 그는 비폭력 평화운동을 이끄는 단체 ‘카이로스'(Kairos)를 결성하고, 카이로스의 활동가들과 함께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에 벌어진 크고 작은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을 지속하였다.
다니엘은 크게 아픈 적도, 수술을 받은 적도, 성인병으로 약을 먹은 적도 없을 정도로 건강했지만,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는 못했다. 노환으로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진 그는 95세 생일을 일주일 남짓 앞둔 2016년 4월 30일 선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