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26) 새해 첫날이나 설날 아침 미사의 독서에서도 듣는 이 축복의 말씀은 무엇보다도 평화가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 백성이 드리는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임을 보여준다. “주 하느님 말씀을 내 듣고 싶사오니, 정녕 평화를 말씀하시나이다 당신의 백성과 성도들에게, 그 마음 당신께 돌아오는 이들에게.”(시편 84,9 최민순 역) 하시는 말씀 그대로 주님께서는 당신 말씀을 듣는 당신의 백성, 당신의 친구, 진심으로 당신께 돌아오는 이들에게 평화를 약속하신다.
평화가 우리 인간의 선택이고, 임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평화는 우리 스스로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에서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에게서 받는 것이다. 사람들은 역사적 요인이나 세계 역학 관계들의 상호작용, 국가 간 관계의 발전이나 분쟁 요인의 해결 등으로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말씀’에 따를 때 평화는 그런 것이 아니다. 주도적인 이데올로기의 주인이 되어서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으므로 비로소 평화가 우리의 것이 되었고 평화롭다고 생각할지는 몰라도 평화는 본질에서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께 달려 있다.
인간 존재 자체는 자신과 형제들을 거슬러 끊임없이 싸우는 분열된 존재이며 자신 안에 악, 죽음, 죄를 늘 지니고 있어서 폭력이라는 현실과 함께 살아가게 마련이다. 우리가 날마다 그저 피상적이거나 무엇에든 나 몰라라 하고 살아가는 맹목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의 일상과 밑바닥에 도사린 이러한 현실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우리, 늘 분열과 다툼 중인 우리 존재를 향하여, 하느님께서 먼저 다가오시고 평화의 언약에 관한 주도권을 잡으시면서 완전한 평화의 길을 주신다고 할 때 이를 두고 하느님의 말씀은 “구원”이라 한다.
평화와 구원은 동의어이며 하느님께서 당신과 언약을 맺는 이들에게 주시는 은총을 가리킨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이사 52,7) 한 그대로 하느님께서는 사실 당신께서 지니고 계신 것, 즉 구원이시며 평화이신 당신 자신을 주신다. 기쁜 소식, 복음의 선포는 구원과 평화의 선포, 대가 없는 무상無償의 선포이며, 인간이라는 장애를 무릅쓰고 하느님 편에서 먼저 주도권을 잡으시고 내려 주시는 선포이다. 평화는 지극히 높으신 분,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하느님의 개입, 아드님을 보내심, 인간이 되신 하느님, 바로 구세주를 대신한다. 평화의 선포는 인간의 프로그램이나 어떤 진화의 결과물이 아니라 오직 예언일 뿐이다. 사실 메시아, 임마누엘(=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샬롬, 절대적인 생명의 충만인 평화, 행복, 구원이 우리 안에 인격적으로 실현되고, 성령을 통하여 모든 피조물에까지 퍼져나간다.
이사야 예언서는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리이다. 다윗의 왕좌와 그의 왕국 위에 놓인 그 왕권은 강대하고 그 평화는 끝이 없으리이다.”(이사 9,5-6)라고 평화를 묘사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평화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과는 분명 다르지만, 말씀을 묵상하고 가까이할 때 평화가 우리 역사에 들어오는 선물이며 모든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현실이면서도 결국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체이심을 알게 된다. 하느님의 구원 경륜, 즉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들이고, 폭력과 압제, 자기 확신과 교만을 거슬러 온유와 연약함, 그리고 겸손으로 특징지어지는 그리스도의 수단과 방법론을 채택할 때만 인류에게는 평화가 있다. 즈카르야 예언서는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그분은 에프라임에서 병거를,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시고 전쟁에서 쓰는 활을 꺾으시어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즈카 9,9)라고 진정한 평화를 묘사한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곧 만민의 주님을 통하여 ‘평화의 복음’을 전하시면서…”(사도 10,36)라고 한 대로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가장 큰 선물, 아드님을 우리 인간에게 넘겨주신 것이야말로 예수님을 통한 평화의 복음이다. 바오로 사도가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에페 6,15)라고 말해준 대로 우리는 평화의 복음이신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의 신을 신는 이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참평화와 거짓 평화, 당신께로부터 오는 평화와 세상의 평화를 집요하게 구분하려 하셨다. 이는 세상의 평화라는 것이 권력을 쥔 자들이 주변을 초토화하고 적을 제거하면서 움켜쥔 평화이고, 예수님 없이 스스로 만들어가고 이루어낸다고 생각하는 평화, 전쟁이 멈추고 없는 것 같아도 죄와 거짓, 폭력이 교묘하고도 은밀하게 가려져 있는 평화이기 때문이다. 놀랍지만 이는 사실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원수와 적敵, 그리고 폭력 앞에서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새로운 계명을 주신 후에,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라고 말씀하신 이유이다.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평화가 이처럼 그저 은총일 뿐이라는 식의 사고 안에서 우리는 평화를 재건하기 위한 기도에 관하여 어느 정도 무관심해질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또한 다른 한편에서는 현실 도피로서의 영성주의나 관상에 맞서 평화 문제는 투쟁을 통해서만 쟁취할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나눔에서의 논지가 평화의 실천이라는 역사적인 임무를 약화하거나 제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평화에 관한 기도와 관상이라는 원천에 의지함으로써 평화를 강화하고 효력 있는 평화가 되도록 하고자 함이다. 말씀을 통하여 평화에 관한 진리를 깨우치고, 말씀으로 평화가 주어질 때, 그 기도에서 행동과 실천이 터져 나올 수 있다. 말씀을 통한 평화에는 그 어떤 회피나 사유화, 그리고 위협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평화와 마음의 평화를 재건하는 것이므로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평화의 원천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 차원에서도 평화의 원천이 되면서 역사에 활력을 불어넣고 역사적 구성 요소인 사건들을 만들며 실제의 역사를 이뤄간다.
성경의 언어에서 ‘기도하다’라는 말마디가 ‘결정하다, 하느님과 함께 결정하다’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의 의인들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고 간청할 때, 그는 의인들의 평화와 구원을 하느님과 함께 결정한다.(참조. 창세 18,16-33)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침범하여 전쟁이 났을 때 모세가 두 손을 높이 들어 기도하면 승리하고 기도를 멈추면 패배했다는 기록에서 모세는 선택된 백성을 위해 하느님과 함께 기도하면서 그들의 평안을 결정한다.(참조. 탈출 17,8-16)
우리 신앙에서 기도는 자신만만한 행위가 아니며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주술적 행위도 아니다. 기도로 건너갈 공간을 내 앞에 열어주시는 주님이신 하느님과 함께 식별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역사 안에서 기능하면서 억눌린 자, 짓밟힌 자, 가난한 자, 착취를 당하는 자, 갇힌 자, 고문당하는 자들의 외침을 역사 안에 들어 올려 하느님께 해방과 개입을 촉구하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믿는 이들이 짓밟힘과 억압이 있는 곳에 평화를 주시라는 간청인 것이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루카 18,7) 하신 말씀처럼 역사의 모든 희생자들은 그 자체로 효력이 있는 기도이다. 또한 하느님께 부르짖는 선택된 이들은 하느님의 즉각적인 개입을 본다.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들, 평화의 사람인 믿는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러한 기도는 ‘말씀’의 도우심 안에서 내면을 닦아 반항과 폭력을 키우는 인간으로부터 하느님께 순종하고 평화로운 인간으로 변화될 때만 가능하다. 사실 기도가 평화의 하느님이신 분의 생각에 들어가 평화에 대한 그분의 뜻을 나누는 것이라면, 기도하고 관상할 때 그는 당연히 평화의 존재가 되어간다. 샬롬을 노래한 아가서에서 메시아께서 샬롬이시고, 하느님 백성의 신부가 평화를 거행하는 술람밋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참조. 아가 7,1)
5세기의 어떤 그리스도인 관상가는 기도를 통해 평화에 이른 평화의 사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는 사랑으로 가득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의 마음은 세상의 온갖 피조물, 인간, 동물, 심지어 악마들까지도 포함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오른다. 그는 자기를 핍박하는 진리의 원수요 적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으며 모든 것이 생명을 보존하고 깨끗해지기를 기도한다. 그는 기도를 통하여 그의 마음에 한량없이 퍼부어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알게 된다. 하느님과 같아진 그는 모든 인류, 아담 전체를 위해 기도할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이 기쁨과 사랑으로 충만하여 마침내 그 마음 안에 착한 이나 악한 이, 친구나 원수를 가리지 않고 모든 이를 품게 된다. 그는 자신을 가장 작은 이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다른 이의 구원과 평화가 자기 자신의 것인 양 생각한다.……」
이러한 사람은 기도로 양육되고 자신과 형제들에게 복음의 말씀을 반복해서 전한다.
네가 박해를 받더라도 너는 박해하지 말며, 네가 모욕을 받더라도 너는 모욕하지 말며, 누군가가 네게 욕설을 내뱉더라도 너는 욕하지 말아라. 기뻐하는 이와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와 함께 울어라. 악을 저지르는 자를 불쌍히 여기고 악에서 돌아와 회개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여라.
기도와 평화는 이처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창세 6,6) 하였던 것처럼, 하느님께서 땅의 폭력 때문에 인간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셨을 때, “하느님과 함께 살아갔던” 노아라는 사람만은 “주님의 눈에 들었다.”(창세 6,9-10) 홍수가 들이닥쳤으나 노아 덕으로 인간과 동물, 그리고 모든 것이 구원을 받았고 계속 살 수 있었다.
오늘날 새로운 재앙이 들이닥친다 해도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 기도하는 단 한 사람의 의롭고 흠 없는 사람만이라도 있다면 우리의 역사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기도하는 이들과 평화를 결정할 준비가 되어 계시고, 모든 인간에게 평화를 주실 준비가 되어 계신다.(*번역글, 이미지와 원문 출처-https://www.ilblogdienzobianchi.it/blog-detail/post/209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