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 당시 먼지가 자욱한 길거리를 다니다가 집에 돌아오면 식탁에 앉기 전이나 모임을 하기 전에 당연히 발을 씻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때 발을 씻어 주고 닦아주는 이는 노예였습니다. 노예가 하는 일이었으니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겠다고 몸을 굽히셨을 때 제자들이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이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음날 우리 모든 이들의 빚을 청산하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노예로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제자들이 이해하도록 이렇게 하셨습니다.
정말이지 우리가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잘 듣게 된다면 우리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울지요. 소위 똑똑하고 영리하다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처럼 서로 속이고 서로 이용하는 대신 서로서로 서둘러 도울 것이니 말입니다. 서로 돕고, 서로 손을 내미는 것은 아주 아름답습니다. 이런 것이 보편적인 인간의 행위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행동은 고귀하고 고상한 마음에서 우러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전례를 통해서 이와 같은 고상한 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 “저 교황님이 내 마음속에 내가 품고 있는 것을 아신다면…” 하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 마음을 아시고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면서 우리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에 절대 놀라시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이미 대가를 치르셨으므로 절대 놀라지 않으시고 오직 우리와 동행하고자 하십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게 힘들지 않도록 우리의 손을 잡아주고자 하십니다. 저도 예수님처럼 여러분의 발을 씻겨 드릴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저 해야 하니까 하는 의례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이것을 우리가 서로 어떤 존재가 되어야만 하는지를 선포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합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착취하는 바람에 그렇게 당하는 이들이 한쪽 구석에 내몰려 거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를 봅니다. 얼마나 많은 불의가 있는지, 얼마나 많은 실업자가 있는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기껏 일하고 돈을 받지 못하거나 일부만 받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이가 아파도 약을 살 돈이 없는지, 얼마나 많은 가정이 파탄 나고 마는지, 얼마나 많은 나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우리 중 그 누구도 “제가 그런 처지에 있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제가 그렇지 않은 것은 모두 주님의 은총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러한 인식, 누구도 그럴 수 없다는 확신이 우리에게 ‘존엄성’을 줍니다. 존엄성이란 우리가 죄인이라는 의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내가 너희를 구원하러 왔다. 내가 너희를 섬기러 왔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서로 돕고 살라고 가르쳐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저도 예수님처럼 똑같이 이제 그대로 하겠습니다. 그래야 삶은 더욱 아름다운 것이며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제가 잘 걷지 못하기 때문에 세족례 동안 제가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들은 “예수님께서 내 발을 씻으셨다.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다. 그래서 내가 지금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렇게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또한 지나갈 것입니다만, 주님께서 항상 여러분 곁에 계십니다. 절대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이것만 생각하십시오.(로마 외곽 카살 델 마르모라는 청소년 수감 교정 시설, 2023년 4월 6일, 성목요일 만찬 미사 교황 프란치스코 강론, 교황은 10년 전인 2013년 교황 취임 직후에도 같은 날 같은 시설을 방문한 적이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용서와 사랑…. 저도 누구의 발을 씻어 주고 싶은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서로 돕고 살라고 가르쳐주신 예수님의 말씀 기억하겠습니다.